이사(里社)

sillok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지방 조직 단위의 하나인 리(里)에 설치된 사직신의 제단.

개설

사(社)는 토지의 신, 직(稷)은 곡물의 신으로, 이를 국가 제사의 중요한 대상으로 제사하는 제도는 중국에서 유래되었다. 사직신(社稷神)은 실내가 아니라 옥외에 제단을 마련하여 모셨는데, 그것은 하늘의 기운과 통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사직단(社稷壇)은 중앙뿐만 아니라 지방 행정 단위에도 모셔졌다. 중앙의 사직단에서는 국토 전체의 토지와 곡물신을, 지방의 사직단에서는 해당 지역의 토지와 곡물신을 제사했다. 이러한 지방 사직단 중의 하나가 이사(里社)인데, 이사는 100가 또는 25가 단위로 하나씩 건립되었다.

내용 및 특징

한국에서 사직단은 고구려부터 확인되며, 신라를 거쳐 고려시대로 이어졌다. 그러나 고려시대까지만 해도 지방 사직단의 존재는 확인되지 않는다. 이에 비해 조선시대에는 중앙은 물론 지방에까지 사직단의 설치가 확산되었다. 지방 사직단의 설치는 부·주·현(府州縣)의 사직과 이사에 대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는 명나라 『홍무예제(洪武禮制)』의 영향이었다. 1406년(태종 6) 주현 사직단을 두고 사직제를 실시했는데(『태종실록』 6년 6월 5일), 『동국여지승람』에서 모든 주현의 읍치 서쪽에 사직단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어서 1414년(태종 14) 충청도관찰사 허지(許遲)가 40~50호 단위로 이사를 하나씩 설치하자고 건의한 것을 계기로 이사의 설치가 본격화되었다. 1416년 기우제를 이사에서 지내자고 하여 이사의 존재를 기정사실화한 점이나, 세종 때는 이사에서 기우제를 거행했다는 기록이 몇 차례 확인되는 점은 이러한 사실을 반영한다. 그러나 조선초 면리제가 확립되지 않았고, 향촌 사회의 민속신앙 전통이 강인해 이사의 설치가 전국적으로 이루어진 것 같지는 않다. 조선왕조에서 사직제는 2월[仲春]과 8월[仲秋]의 첫 번째 무일(戊日)에 거행되었다. 그러므로 이사에서도 사직제도 같은 날 제사되었을 것이다.

변천

조선중기 이후 향촌 사회의 유교적 교화를 명분으로 이사의 설립은 추진되었다. 예컨대 1665년(현종 6)에는 허목(許穆)이, 1670년(현종 11) 윤휴(尹鑴)가 이사를 설치하고 이사제를 지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이사들이 얼마나 존속되었으며 어느 정도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는지는 의문이다. 이렇듯 이사제는 조선시대를 통하여 제대로 시행되지는 못했지만, 이사라는 용어는 조선후기에는 어의(語義)의 확장을 통해 널리 사용되었다. 그 중 하나는 향리(鄕里)와 동의어로 사용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지역에서 배출한 유학자를 모시는 향현사(鄕賢祠)라는 의미로도 사용되었다.

의의

이사의 설치를 추진한 목적은 중국에서 시행하고 있는 최신 유교 예제의 수용이라는 의미도 있었지만 조선 왕조 자체의 필요성에서 말미암은 바 크다. 즉 이사제를 통해 지역민들을 교화하고 단결시킴으로서 향촌 사회의 안정과 국가의 향촌 지배를 관철시키고자 하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향촌 사회의 비유교적 민속신앙들을 이사로 흡수·대체한다는 의미도 있었다.

참고문헌

  • 『미수기언(眉叟記言)』
  • 『백호전서(白湖全書)』
  • 『홍무예제(洪武禮制)』
  • 한우근, 「朝鮮王朝初期에 있어서의 儒敎理念의 實踐과 信仰·宗敎」,『韓國史論』3, 1976년.
  • 한우근, 한우근전집간행위원회, 『朝鮮時代思想史硏究論攷』 한우근전집 3, 한국학술정보, 2001.
  • 和田博德, 「里甲制と里社壇·鄕厲壇」, 『西と東と-前嶋信次先生追悼論文集』, 汲古書院, 19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