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몽학지난(李夢鶴之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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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6년 7월, 충청도 홍산현에서 이몽학이 주동한 반란.

개설

이몽학(李夢鶴)은 전쟁의 고통에 지친 백성들을 선동하여 한현(韓絢)과 함께 반란을 모의하였다. 이몽학은 1596년(선조 29) 7월 6일 거병하여 홍산현을 탈취한 뒤에 차례로 임천군, 정산현, 청양현, 대흥군을 함락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이몽학은 홍주목사 홍가신(洪可臣)의 철저한 방어 태세에 홍주성 공략에 실패하고 덕산으로 퇴각하는 도중에 휘하 반군에게 목을 베이고 말았다. 또 다른 주모자인 한현도 면천에서 사로잡힘으로써 반란은 완전히 진압되었다.

역사적 배경

1593년(선조 26) 4월을 전후로 명·일 사이의 강화 협상이 재개되고, 같은 해 5월 일본군이 밀양 이남 지역으로 전면 철수하기 시작하면서 임진왜란 초반의 처절한 전화(戰火)는 점차 잦아들었다. 그러나 일본군의 재침에 대비하여 조정이 추진한 산성 증축 등의 군비 증강책은 도리어 전쟁으로 인한 피해와 기근에 시달리던 백성들에게 큰 고통을 안겨 주었다. 이몽학은 이러한 분위기에 편승하여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발단

이몽학은 종실의 서얼(庶孽) 출신으로 강퍅하고 못된 성격으로 인하여 아버지로부터 쫓겨나 충청도와 전라도 사이를 떠돌아 다녔다. 임진왜란 발발 이후 서얼로서 종군하여 조련장관(操練將官)이 되었는데, 이때 선봉장 한현 등과 친교를 맺었다. 이몽학은 어리석고 아무 재능이 없었으나, 한현은 교활하고 사리에 밝았다고 한다. 한현은 순무어사(巡撫御史)이시발(李時發)의 휘하로 호서(湖西) 속오군의 군사 조련을 관할하던 자 중의 하나였는데, 각 고을의 민심이 이반되어 있고 방비가 허술한 것을 보고 반란을 모의하게 되었다. 그는 이몽학을 사주하여 거사하도록 하고, 자신은 부친상을 당해 홍주(洪州)로 내려가면서 내포(內浦)에서 호응하겠다고 약속하였다. 이몽학은 홍산현(鴻山縣) 무량사(無量寺)에서 승병(僧兵)들을 규합하는 한편, 동갑회(同甲會)라는 친목 모임을 이용하여 사족(士族) 자제, 무뢰배, 사노(私奴)들을 모집하였다.

이몽학은 1596년 7월 6일 야음을 틈타 600~700명에 달하는 승속군(僧俗軍)을 이끌고 홍산현을 습격하여 현감윤영현(尹英賢)을 사로잡는 데 성공하였다. 임천군수(林川郡守)박진국(朴振國)도 사로잡았는데, 이들은 모두 항복하여 반란군에게 동조하였다(『선조수정실록』 29년 7월 1일). 7일에는 정산현(定山縣), 8일에는 청양현(靑陽縣), 9일에는 대흥군(大興郡) 등 모두 5개의 고을을 파죽지세로 함락시켰다. 이때 반군의 무리가 수천~수만 명으로 늘어났다는 기록도 전하지만, 무장을 한 군사는 수백 명에 지나지 않았고 대부분 맨손의 백성들이었다. 이몽학은 승세를 몰아 목사 홍가신이 지키고 있는 홍주성의 공략을 시도하였다.

경과

홍가신은 휘하 관속(官屬)인 이희(李希)·신수(申壽)를 반군 진영에 거짓 투항하게 하여 방어에 필요한 시간을 버는 한편, 고을에 사는 무장 박명현(朴名賢)·임득의(林得義)와 전 병사(兵使)신경항(申景恒) 등을 불러 성을 지킬 수성책(守城策)을 모의하고 민병(民兵)을 모집하였다. 남포현감박동선(朴東善)의 강력한 요청에 의해 충청 수사최호(崔湖)의 원군도 홍주성에 입성하여 수성군의 군세는 크게 강화되었다.

뒤늦게 속은 것을 깨달은 이몽학은 7월 10일, 홍주성에서 3리쯤 떨어진 곳에 군진(軍陣)을 펼치고 사람을 보내어 홍가신에게 항복을 촉구하였으나 거부당하였다. 한편, 충청병사이시언(李時言)은 홍주에, 순무어사이시발은 유구(維鳩)에, 중군(中軍)이간(李侃)은 청양에 포진하여 반란군을 압박하였다. 이몽학은 홍주성의 공략을 포기하고 7월 11일 새벽에 어둠을 타서 덕산(德山)으로 도주하면서 김덕령(金德齡)·홍계남(洪季男)의 의병 부대와 합류하여 한양으로 진격하겠다고 떠벌렸으나, 이미 반란군 내부의 동요는 심각해져서 도망자가 속출하는 상태였다. 주모자의 수급을 베어 오면 역모에 가담한 죄를 사면해 주고 포상을 내리겠다는 선전에 현혹된 반군 김경창(金慶昌) 등이 군막 안에 있던 이몽학을 참살함으로써 반군의 활동은 막을 내렸다(『선조수정실록』 29년 7월 1일). 반란의 추이를 살펴보다가 몰래 면천(沔川)으로 도주한 한현도 면천군수이원(李瑗)에게 체포되어 홍주로 압송되었다.

이 반란과 관련하여 한양으로 압송하여 처형된 자는 33명이었고, 외방에서 처형된 자는 100여 명에 달하였다. 한편 조정은 연좌율을 가급적 느슨하게 적용하여 처벌의 범위를 축소함으로써 해당 지역의 민심을 달래고자 하였다. 가담자들의 심문 과정에서 김덕령·최담령(崔聃齡)·홍계남·곽재우·고언백(高彦伯) 등이 무고로 연루되어 큰 파문을 일으켰다. 선조의 특명으로 김덕령과 최담령을 제외한 자들은 불문에 부쳐졌다. 그러나 혹독한 심문 도중에 김덕령은 장살(杖殺) 당하였고, 최담령은 옥사하고 말았다. 반란은 진압하는 데 큰 공을 세운 홍가신 등은 1604년(선조 37) 청난공신(淸難功臣)에 봉해졌다(『선조실록』 37년 6월 25일).

참고문헌

  • 『난중잡록(亂中雜錄)』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이장희, 「임진왜란 중 민간 반란에 대하여」, 『향토서울』32,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1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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