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관명(李觀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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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661년(현종 2)∼1733년(영조 9) = 73세]. 조선 후기 숙종~영조 때의 문신. 행직(行職)은 의정부 좌의정(左議政)·예문관 대제학(大提學)이다. 자(字)는 자빈(子賓)이고, 호(號)는 병산(屛山)이고,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 는 이조 판서(吏曹判書)·예문관 대제학(大提學)이민서(李敏敍)이고, 어머니 원주원씨(原州元氏)는 좌의정원두표(元斗杓)의 딸이다. 밀성군(密城君)이침(李琛: 세종의 서출 제 5왕자)의 8대손이고, 영의정이경여(李敬輿)의 손자이고, 좌의정이건명(李健命)의 형이다.

숙종 때 동생 이건명은 대과에 합격하였으나, 형 이관명은 과거에 거듭 실패하고 음서(蔭敍)로 공조 정랑과 함열 현감(咸悅縣監)이 되었다. 나이 38세 때 알성 문과에 급제하여, <갑술옥사(甲戌獄事)> 이후에 서인이 집권하자, 삼관(三館)의 청요직(淸要職)을 두루 거쳤다. 1703년(숙종 29) 노론이 소론 박세당(朴世堂)을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공격하자, 숙종이 교리이관명(李觀命)에게 응교권상유(權尙游)와 함께 박세당의 『사변록(思辨錄)』을 분석하여 그 이론을 반박하는 글을 지어서 바치게 하였다. 이때부터 이관명·이건명 형제는 노론의 강경파로 지목되었다. 또 1719년(숙종 45) 이관명이 이조 판서(吏曹判書)가 되어, 동생 우의정이건명과 함께 도목정사(都目政事)를 두 차례나 행하여 노론을 대거 등용하자, 소론이 이관명 형제를 맹렬하게 비난하였다.

경종 때 임금이 정신 이상 증세를 심하게 보이자, 노론의 김창업(金昌業)·이이명(李頤命)·조태채(趙泰采)·이건명(李健命) 등은 경종이 국정을 다스릴 능력이 없다고 판단하여, 최숙빈(崔叔嬪)이 낳은 연잉군(延礽君: 영조)을 왕세제(王世弟)로 책봉하고, 왕세제로 하여금 정사를 대리 청정(聽政)하도록 청하자, 경종이 이를 허락하고 왕세제(王世弟)를 책봉하는 교서(敎書)를 반포하였는데, 이관명이 그 교서를 지었다. 그러나 소론의 대신 조태구(趙泰耈)는 밤중에 몰래 입궐하여 경종을 설득하여 왕세제의 대리 청정을 거두도록 하고, 소론의 승지 김일경(金一鏡)이 노론의 4대신을 탄핵하여 마침내 귀양을 보냈다. 또 승지김일경(金一鏡)이 목호룡(睦虎龍)을 시켜서, 노론의 4대신이 경종을 시해하려고 하였다고 무고하게 하여, <신임사화(辛壬士禍)>를 일으켜서 노론의 4대신을 역모죄로 몰아서 처형하였다. 1722년(경종 2) 동생 좌의정이건명이 흥양(興陽) 나로도(羅老島)에 유배되었다가 사사(賜死)되었고, 형 이관명도 평안도 덕천(德川)으로 유배되어, 2년 동안 노복(奴僕)으로 고역(苦役)하였다.

영조 때 유배에서 풀려나서, 공조 판서를 거쳐 우의정에 임명되었다. 『경종실록(景宗實錄)』을 편찬할 때 우의정이관명이 그 총재관(總裁官)에 임명되었다. 또 좌의정에 임명되었으나, 이관명이 분수와 의리를 내세워 관직을 사양하자, 한직인 중추부 판사(判事)로 옮겼다. 1727년(영조 3) 소론의 강경파 목시룡(睦時龍)·이중환(李重煥) 등 5인을 처형할 때 영조는 노론의 강경파 대신 민진원(閔鎭遠)과 이관명 등을 비롯한 노론의 강경파 101명을 파직하였다. 이때부터 영조는 <탕평책(蕩平策)>을 강력히 추진하여, 노론과 소론의 강경파를 모조리 쫓아내고 4색의 당파 인물을 골고루 등용하여 붕당(朋黨) 정치의 폐단을 막으려고 하였다. 이에 이관명은 강외(江外)로 나가서 몇 년 동안 살면서, 아무리 병이 위독할 때에도 오직 나라의 안위(安危)만을 생각하다가 돌아갔다.

숙종 시대 활동

1687년(숙종 13) 사마시(司馬試) 생원과(生員科)로 합격하였는데, 나이가 27세였다.[『국조방목(國朝榜目)』] 그보다 두 살 아래 동생 한포(寒圃)이건명(李健命: 1663~1722)은 그보다 앞서 알성(謁聖) 문과에 급제하여, 청요직(淸要職)에 진출하였으나, 형 이관명은 과거에 거듭 실패하고, 1688년(숙종 14) 음서(蔭敍)로 진출하여 세자익위사 세마(洗馬)가 되었다. 그해 2월에 아버지 이민서(李敏敍)가 돌아가서, 3년 동안 동생 이건명(李健命)과 함께 여묘살이를 하였다. 1691년(숙종 17)에 3년 상례(喪禮)를 끝마치고, 서인에 속한 이관명과 이건명 형제는 관직에 복귀하였으나, 남인이 집권하고 있었으므로, 관계 진출이 쉽지 않았다. 1694년(숙종 20) 3월에 인현왕후(仁顯王后)가 복위되고 왕비로 있던 장희빈(張禧嬪)이 쫓겨나고, <갑술옥사(甲戌獄事)>가 일어나서 장희빈을 지지하던 남인이 몰락하고, 그 대신에 서인의 소론(小論)이 집권하였다. 그해 9월에 무수리 출신 숙의(淑儀) 최씨(崔氏)가 왕자(王子) 이금(李昑: 영조)을 낳았다. 이에 이관명 형제는 서인의 노론에 속하였나, 서인의 소론이 집권하자, 관계 진출이 한결 쉬워졌다. 1698년(숙종 24) 이관명은 공조 정랑(工曹正郞)이 되었다가, 경상도 함열 현감(咸悅縣監)으로 나갔다. 그해 가을에 알성(謁聖) 문과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였는데, 그때 나이가 38세였다.[『국조방목(國朝榜目)』] 그해 11월에 서인들은 억울하게 왕위에서 쫓겨난 노산군(魯山君)을 다시 단종(端宗)으로 복위하였다.

1699년(숙종 25) 4월에 사헌부 지평(持平)이 되었다가, 그해 5월에 홍문록(弘文錄)에 선록되었다. 그때 부제학(副提學)홍수헌(洪受瀗) 등이 홍문록(弘文錄)에 권상유(權尙遊)·이의현(李宜顯)·이관명(李觀命) 등 10인을 선발하였다.(『숙종실록』 25년 5월 15일) 1700년(숙종 26) 2월에 세자시강원 사서(司書)가 되었고, 그해 3월에 도당록(都堂錄)에 선록되었다. 그때 의정부에서 도당록(都堂錄)에 조태로(趙泰老)·권상유(權尙游)·이관명(李觀命) 등 8명을 선발하였다.(『숙종실록』 26년 3월 4일) 그해 6월에 홍문관에 들어가서 부수찬(副修撰)·수찬(修撰)으로 승진되었고, 그해 8월에 홍문관 부교리(副校理)로 승진되었다. 1701년(숙종 27) 3월에 홍문관 교리(校理)가 되었다가, 그해 9월에 다시 홍문관 부수찬이 되었다. 그해 8월에 인현왕후(仁顯王后)가 돌아가자, 그해 10월에 숙종이 장희빈(張禧嬪)에게 자진(自盡: 자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때 부수찬이관명이 부교리권상유(權尙游: 권상하의 동생)와 함께 차자를 올리기를, “전의 비망기에서 장희빈을 자진(自盡)하게 하라는 교지(敎旨)가 있었습니다. 여러 신하들은 춘궁(春宮: 경종)의 마음을 손상시킬까봐 염려합니다. 우리 춘궁의 어린 나이로서 망극한 변고를 당해서 만의 하나라도 마음이 손상될까봐 염려됩니다.” 하였으나, 숙종이 달가워하지 아니하였다.(『숙종실록』 27년 10월 8일) 그해 12월에 세자시강원 문학(文學)에 되어, 세자 이윤(李昀)을 가르쳤다. 그때 세자 이윤의 심신이 미약하여 크게 걱정하였으나, 세자의 이상 증세를 극비밀리에 붙였다.

1702년(숙종 28) 1월에 다시 홍문관 부교리가 되었다가, 그해 6월에 홍문관 교리(校理)가 되었다. 그해 9월에 다시 홍문관 수찬이 되었다가, 그해 10월에 다시 홍문관 부교리가 되었고, 그해 12월에 이조 좌랑(吏曹左郞)이 되었다. 1703년(숙종 29) 3월에 다시 홍문관 교리(校理)가 되었다가, 그해 7월에 다시 이조 좌랑이 되어, 세자시강원 사서(司書)를 겸임하였고, 다시 홍문관 교리가 되었다. 그해 9월에 다시 이조 좌랑이 되어, 그해 10월에 세자시강원 문학을 겸임하였다. 세자 이윤(李昀)은 숙종의 미움을 받자, 점차 우울증의 증세를 보이기 시작하였다. 왜냐하면, 숙종은 장희빈에 대한 노여움을 그녀가 낳은 아들에게 풀었기 때문이다. 무수리 출신 최숙빈(崔叔嬪)이 낳은 연잉군(延礽君)이금(李昑: 영조)이 똑똑하였으므로, 숙종은 연잉군이금을 세자로 삼을 생각을 하였다. <갑술옥사> 이후에 정권을 잡은 소론은 세자 이윤을 보호하고 병을 고쳐서 훌륭한 임금으로 만들려고 노력하였으나, 노론은 세자의 우울증이 점차 심해지는 것을 보고, 세자의 동생 연잉군이금을 대신 세자로 삼으려고 하였다. 같은 서인의 뿌리에서 나온 노론과 소론이 세자 문제를 둘러싸고 점차 논쟁이 격화되어 갔다. 그해 11월에 이관명은 다시 홍문관 수찬이 되었다가, 이조 좌랑이 되었고, 그해 12월에 다시 홍문관 수찬이 되었다가, 이조 좌랑이 되었다.

1703년(숙종 29) 2월에 소론 최석정(崔錫鼎)이 영의정이 되었고, 그해 3월에 이관명이 다시 홍문관 교리가 되었고, 그해 4월에 소론의 학자 서계(西溪)박세당(朴世堂: 1629~1703)이 죽었는데, 노론은 박세당이 지은 『사변록(思辨錄)』을 사문난적(斯文亂賊)이라고 맹렬히 비판하였다. 그해 7월에 숙종이 응교권상유(權尙游)와 교리이관명(李觀命)에게 박세당의 『사변록(思辨錄)』을 분석하여 그 이론을 반박하는 글을 지어서 바치게 하였으나, 두 사람은 모두 사양하였다. 그해 7월에 다시 이조 좌랑이 되어, 세자시강원 사서(司書)를 겸임하였고, 다시 홍문관 교리가 되었다. 그해 9월에 다시 이조 좌랑이 되었는데, 그해 8월에 동생 이건명이 강화 유수(江華留守)로 나가자, 늙은 어머니가 강화도로 따라갔으므로, 하루 말미를 받아 전송하였다. 그때 승정원의 소론 승지들이 이관명 형제를 미워하여 말미를 주지 않으려고 하자, 이조 좌랑이관명이 바로 임금에게 하소연하고 나루로 나가서 어머니와 동생을 전송하였다.(『숙종실록』 29년 8월 17일) 그해 10월에 세자시강원 문학을 겸임하였고, 그해 11월에 다시 홍문관 수찬이 되었다가, 이조 좌랑이 되었고, 그해 12월에 다시 홍문관 수찬이 되었다가, 다시 이조 좌랑이 되었다.

1704년(숙종 30) 1월에 다시 홍문관 수찬이 되었다가, 2월에 다시 홍문관 교리가 되었다. 그해 3월에 사간원 헌납(獻納)을 거쳐, 다시 홍문관 교리가 되었고, 그해 6월에 이조 좌랑이 되었다가, 그해 7월에 홍문관에 들어가서 다시 부교리를 거쳐, 부응교(副應敎)가 되었다. 그해 8월에 박세당(朴世堂)의 『사변록(思辨錄)』을 분석하여 반박하는 글을 비로소 완성하여 숙종에게 바쳤다.(『숙종실록』 30년 8월 5일) 세자시강원 필선(弼善)을 겸임하였고, 그해 9월에 다시 홍문관 교리가 되었다. 그해 10월에 사헌부 집의(執義)가 되어, 나라 목장(牧場)의 땅을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어 농사를 짓게 하기를 청하였으나, 숙종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때 백성들이 경작하던 목장의 땅을 회수하여, 사복시(司僕寺)에서 말을 기르려고 하였기 때문이다.(『숙종실록』 30년 10월 6일) 그해 11월에 부사과(副司果)가 되어, 『단종실록(端宗實錄)』 부록(附錄)을 편찬할 때 찬집청(撰集廳)의 낭청(郎廳)에 임명되어, 그 부록을 4개월만에 편찬하여, 사고(史庫)에 보관하였다. 1705년(숙종 31) 10월에 홍문관 교리(校理)가 되었고, 그해 11월에 세자시강원 보덕(輔德)을 겸임하였다. 그해 12월에 임금에게 직언(直言)하다가, 숙종의 노여움을 사서, 평안도 영유 현령(永柔縣令)으로 좌천되었다.(『숙종실록』 31년 12월 1일)

1706년(숙종 32) 5월에 영의정최석정(崔錫鼎: 최명길의 손자)의 변론으로 다시 홍문관 응교(應敎)가 되었다. 그때 영의정최석정이 영유 현령(永柔縣令)이관명(李觀命)과 상주 목사(尙州牧使)이광좌(李光佐)를 소환(召還)할 것을 청하니, 숙종이 허락하였다.(『숙종실록』 32년 5월 20일) 두 사람은 노론과 소론을 대표하는 강직한 인물이었으므로, 소론의 영의정최석정이 노론과 소론을 화해시키려고 노력하였던 것이다. 그해 8월에 다시 세자시강원 보덕(輔德)을 겸임하였다. 그해 10월에 다시 홍문관 부응교가 되었다가, 사간원 사간(司諫)이 되었다. 1707년(숙종 33) 3월에 세자시강원 필선(弼善)을 겸임하였고, 그해 4월에 다시 홍문관 응교가 되었고, 그해 5월에 세자시강원 보덕을 겸임하였고, 그해 다시 6월에 홍문관 응교(應敎)가 되었다. 1708년(숙종 34) 1월에 의정부 사인(舍人)이 되었고, 그해 2월에 다시 세자시강원 필선(弼善)이 되었다. 그해 3월에 홍문관 부응교가 되었다가, 그해 윤3월에 홍문관 응교가 되어, 세자시강원 보덕(輔德)을 겸임하였다. 그해 11월에 세자시강원 보덕이 되었다가, 그해 12월에 다시 의정부 사인을 거쳐, 홍문관 부교리가 되었다.

1709년(숙종 35) 1월에 홍문관 응교(應敎)가 되었다가, 사간원 사간(司諫)을 거쳐, 동부승지(同副承旨)로 발탁되었다. 이때 승지이관명이 상소하여, 노론 민진원(閔鎭遠)과 민진후(閔鎭厚) 형제가 인현왕후의 인척이라고 하여 권세를 부린다고 비판하고, 소론의 영의정최석정(崔錫鼎)의 『예기유편(禮記類編)』이 사문난적(斯文亂賊)이라고 공격하다가, 그해 2월에 사헌부 장령윤회(尹會)의 탄핵을 받고 관작이 삭탈되었다. 그해 11월에 어머니의 상(喪)을 당하여, 동생 이건명(李健命)과 함께 선영(先塋)에서 3년 동안 여묘살이를 하였다. 1712년(숙종 38) 3년 상례(喪禮)를 끝마치자, 안동부사(安東府使)로 나갔다. 1713년(숙종 39) 2월에 소명(召命)을 받고 올라와서 대사간(大司諫)이 되었다. 그해 윤5월에 이조 참의(吏曹參議)에 임명되었다. 1714년(숙종 40) 2월에 우승지(右承旨)가 되었다가, 그해 4월에 다시 이조 참의가 되었다. 그해 10월에 홍문관 부제학(副提學)이 되었다가, 그해 11월에 한성부 우윤(右尹)을 거쳐, 홍문관 부제학(副提學)이 되었다.

1715년(숙종 41) 2월에 셋째아들 이휘지(李徽之)가 태어났는데, 그때 이관명의 나이가 55세였다. 나중에 이휘지는 문과에 급제하여, 대제학(大提學)과 우의정(右議政)을 지냈다. 그해 3월에 대사간(大司諫)이 되었다가, 그해 12월에 이조 참판(吏曹參判)이 되었다. 1716년(숙종 42) 1월에 예조 참판(禮曹參判)으로 옮겼다가, 그해 7월에 다시 이조 참판을 거쳐, 도승지(都承旨)로 영전되었다. 그해 11월에 병조 참판(兵曹參判)을 거쳐, 다시 대사헌(大司憲)이 되었다. 1717년(숙종 43) 2월에 다시 도승지가 되었다가. 그해 8월에 성균관 대사성(大司成)이 되었고, 그해 12월에 사은사(謝恩使)의 부사(副使)에 임명되어, 정사(正使)박필성(朴弼成)과 함께 청나라 연경(燕京)에 갔다. 1718년(숙종 44) 3월에 청나라에서 돌아와서 임금에게 복명(復命)하였고, 6월에 다시 대사헌(大司憲)이 되었다가, 그해 7월에 다시 홍문관 부제학(副提學)이 되었다. 그해 8월에 동생 이건명(李健命)이 우의정이 되었고, 그해 11월에 형 이관명은 이조 참판이 되어, 홍문관 제학(提學)을 겸임하다가, 마침내 형조 판서(刑曹判書)가 되었는데, 동생 이건명이 먼저 재임한 자리를 형이 이어 받았다.

1719년(숙종 45) 1월에 원접사(遠接使)에 임명되어, 청나라 사신을 맞이하였다. 그해 4월에 예조 판서(禮曹判書)가 되었고, 그해 5월에 예문관과 홍문관의 양관 대제학(大提學)이 되어, 마침내 문형(文衡)이 되었다가, 다시 예조 판서가 되었다. 그해 6월에 그때 나이가 60세라고 하여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고, 기로소의 영수각(靈壽閣)이 완공되자, 그 상량문(上樑文)을 지었는데, 숙종이 숙마(熟馬) 1필(匹)을 하사하였다. 마침내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임명되어, 인사 행정을 맡았다. 동생 이건명(李健命)이 우의정이 되고 형 이관명이 이조 판서가 되어, 도목정사(都目政事)를 두 차례나 행하여 노론을 대거 등용하자, 소론이 이관명 형제를 맹렬하게 비난하였다.(『숙종실록』 45년 7월 6일) 1720년(숙종 46) 1월에 이조 판서이관명은 숙종이 육순(六旬)을 맞이하여 전국에 반포하는 교지(敎旨)를 지어서, 널리 반포하였다. 그해 3월에 이관명 형제는 소론의 공격을 받아서, 동생 이건명은 우의정에서 체차되었고, 그해 4월에 이관명도 다시 예조 판서로 옮겼다. 그해 6월에 숙종이 60세의 나이로 승하하였다.

경종 시대 활동

1720년(경종 즉위년) 6월에 34세의 나이로 경종이 즉위하자, 빈전도감 제조(提調)가 되어, 예조 판서로서 숙종의 국장(國葬) 절차와 경종의 즉위 의식을 총지휘하였고, 또 숙종의 행장(行狀)을 짓고, 경종의 즉위 교서(敎書)를 지었다. 그해 11월에 예문관 대제학(大提學)이 되었는데, 그해 12월에 경종이 성균관 유생들에게 제주 귤을 내려주고 글을 짓게 하는 황감제(黃柑製)를 시행하려고 하였으나, 문형(文衡)을 맡은 대제학이관명(李觀命)이 홍문관의 관원이 모두 국장(國葬)에 동원되어 대독(對讀)할 사람이 없다고 아뢰자, 경종이 날짜를 물려서라도 시행하라고 명하였다.(『경종실록』 즉위년 12월 23일) 이에 국장을 치른 뒤에 대제학이관명은 다시 날짜를 잡아서 황감제(黃柑製)를 실시하여, 성균관 유생들이 새 임금의 은혜에 감동하여 충성을 다하도록 하였다. 그해 11월에 예조 판서(禮曹判書)가 되었고, 그해 12월에 청나라 칙사(勅使)가 숙종에게 치제(致祭)하려고 나오자, 영의정김창집·좌의정이건명·예조 판서이관명 등이 경종에게 청나라 사신을 접대하는 의례를 자세하게 가르쳤으나, 막상 칙사를 맞이한 경종이 지나치게 위축되어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 노론의 4대신 등은 경종의 왕으로서의 자질을 의심하였다. 경종이 우울증이 더욱 심해져서 모든 국사는 내전의 인원대비(仁元大妃)가 도맡아서 처리하였다

1721년(경종 1) 4월에 한성부 판윤(判尹)이 되었다가. 그해 5월에 다시 형조 판서가 되었다. 그해 6월에 공조 판서가 되었다. 경종이 우울증으로 왕권을 도저히 수행할 능력이 없다고 판단한 노론은 연잉군(延礽君)이금(李昑)을 왕세제(王世弟)로 삼으려고 하였으나, 소론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혔다. 이에 노론 4대신은 국구(國舅) 김주신(金柱臣)을 설득하여, 숙종의 계비(繼妃) 인원대비(仁元大妃: 김주신의 딸)의 밀지(密旨)를 받아내어 연잉군(延礽君)을 ‘왕세제(王世弟)’로 책봉(册封)하였다. 그해 8월 20일 밤 2경(二更)에 영의정김창집(金昌集)과 좌의정이건명이 빈청(賓廳)에 나가서 원임 대신(原任大臣)·육경(六卿)·삼사 장관(三司長官) 등을 불러서 회의를 하고 연잉군(延礽君)을 왕세제(王世弟)로 책봉할 것을 청하였는데, 영의정김창집이 말하기를, “성상께서 춘추가 한창 젊은데도 아직껏 저사(儲嗣: 후사)가 없으니, 주야로 걱정이 됩니다.” 하고, 연잉군(延礽君)이금(李昑)을 왕세제(王世弟)로 책봉할 것을 청하였다. 노론의 승지조영복(趙榮福)이 거듭 다그치자, 경종이 마지못하여 말하기를, “윤허하고 따르겠다.” 하였다. 경종이 대내(大內)로 들어가서, 대비의 언문 교서(諺文敎書)를 받아서 전하기를, “선대왕(先大王: 숙종)의 혈육으로는 다만 주상과 연잉군(延礽君)뿐이니, 어찌 다른 뜻이 있겠는가.” 하여, 마침내 무수리 최숙빈(崔叔嬪)이 낳은 연잉군을 왕세제(王世弟)로 삼았다. 이때 이관명(李觀命)이 왕세제(王世弟)를 책봉하는 교서(敎書)를 지었다

그해 8월에 왕세제(王世弟)에게 학문을 진강(進講)하기 위하여 세자시강원은 설치하였는데, 그 사부(師傅)에는 노론의 영의정김창집(金昌集)과 좌의정이건명(李健命)이 임명되었고, 또 소론의 최석항(崔錫恒)이 우빈객(右賓客)으로, 노론의 이관명(李觀命)이 좌부빈객(左副賓客)으로 각각 임명되었다. 그러나 소론은 세자시강원의 겸직에 부임하기를 거절하였다. 소론의 대신 유봉휘(柳鳳輝)가 상소하여, 왕세제의 책봉을 비판하였다. 몸이 몹시 허약한 경종이 가끔 우울증 증세를 심하게 보이자, 노론의 4대신 김창집(金昌集)·이건명(李健命: 이관명 동생)·이이명(李頤命)·조태채(趙泰采) 등은 경종이 국정을 다스릴 능력이 없다고 판단하여, 왕세제(王世弟) 연잉군(延礽君)이금(李昑: 영조)으로 하여금 왕을 대리하여 정사를 청정(聽政)하도록 경종에게 강력히 청(請)하자, 심신이 허약한 경종은 비망기(備忘記)를 내리기를, “내가 이상한 병에 걸려서 조금도 회복될 기미가 없으니, 만기(萬機)를 수응(酬應)하기가 진실로 어렵다. 이제 왕세제는 젊고 영명(英明)하므로, 만약 청정(聽政)하게 하면, 내가 마음을 편하게 병을 조섭할 수가 있을 것이니, 대소의 국사(國事)를 모두 왕세제로 하여금 결단하게 하라.” 하였다. 그해 9월에 경종이 왕세제(王世弟)가 대리 청정한다는 교서(敎書)를 반포하였는데, 이관명이 그 교서를 지었다.(『경종실록』 1년 9월 27일)

그해 10월 16일에 소론의 4대신 유봉휘(柳鳳輝)·이광좌(李光佐)·조태구(趙泰耉)·최석항(崔錫恒)이 경종에게 왕세제(王世弟)로 하여금 대리 청정(聽政)하라는 어명(御命)을 거두도록 청하는 정청(庭請) 운동을 전개하였는데, 노론의 온건파 대신 조태채(趙泰采)·민진원(閔鎭遠)·이관명 등은 정청(庭請) 운동에 참여하였다. 이때 소론의 온건파 대신 최석항·이광좌 등은 왕세제의 책봉에는 찬성하였으나, 대리 청정에는 반대하였다. 이때 노론의 강경파 대신 김창집(金昌集)·이건명(李健命: 이관명 동생)·이이명(李頤命)은 정청(庭請) 운동에 참여한 소론과 노론을 설득하는 한편, 왕세제의 대리 청정하는 절차를 논의하였다. 그해 10월 17일에 경종이 창경궁(昌慶宮)에 있었는데, 소론의 우의정조태구(趙泰耈)는 한밤중에 창경궁의 선인문(宣仁門: 북문)으로 들어가서 비밀리 청대(請對)하고, 경종에게 눈물을 흘리고 간청하여 마침내 대리 청정하라는 어명을 거두도록 하였다. 그때 그의 동생 좌의정이건명(李健命)은 주청사(奏請使)에 임명되어 청나라에 가서 왕세제의 책봉(冊封)을 청하게 되었다. 주청사이건명은 부사(副使)윤양래(尹陽來)와 함께 청나라 연경(燕京)으로 떠났다.

그해 12월에 승지김일경(金一鏡)이 환관 박상검(朴尙儉)과 몰래 결탁하여, 왕세제 연잉군(延礽君)이 경종에게 시선(視膳: 임금의 수라를 살피는 것)하고, 문침(問寢: 임금의 잠자리를 문안하는 것)하는 길을 막아서 내전(內殿)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였고, 또 왕세제를 모해하려고 꾀하다가 실패하였다.[영조의 「지문(誌文)」] 그해 12월 6일에 소론의 급진강경파 준소(峻少) 계열의 김일경(金一鏡)·박필몽(朴弼夢)·이명의(李明誼) 등 7인이 상소하기를, “전하께서는 빨리 사흉(四凶: 노론 4대신)을 법으로 다스려서 창궐(猖獗)하지 못하게 하소서. 저들 네 사람은 선왕을 잊고 전하를 저버렸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모두 ‘죽이는 것이 옳다.’고 하는데, 어찌하여 전하께서는 너그럽게 용서하여 지금까지 조정에 두고 있습니까. 천토(天討)를 행하여 더럽고 악한 자들을 숙청하여, 정치에 간여하지 못하게 하소서.” 하니, 경종이 크게 기뻐하며 비답하기를, “나의 뜻에 부응하여 진언(進言)한 것을 내가 깊이 가납(嘉納)한다.” 하였다. 이에 경종은 우의정(右議政)조태구(趙泰耈)를 영의정에 임명하고 영의정김창집과 좌의정이건명을 체직시키라고 명하였다. 이에 소론의 승지김일경(金一鏡)·박필몽(朴弼夢) 등 7인이 상소하여, 노론의 4대신을 탄핵하여 노론 4대신을 몰아내는 데 성공하였다.

그해 12월 12일에 사간(司諫)이진유(李眞儒)·헌납(獻納)이명의(李明誼)·지평(持平)박필몽(朴弼夢)·정언(正言)서종하(徐宗廈)가 노론 4대신을 탄핵하기를, “김창집(金昌集)은 숙종 때 고묘(告廟)의 의논을 저지해서 막았고, 이이명(李頤命)은 숙종과 독대(獨對)하였으며, 이건명(李健命)은 언로(言路)를 막았으며, 조태채(趙泰采)는 겉으로 정청(庭請)에 참여하고, 실제로는 세 대신과 함께 대리 청정의 절차를 의논하였으니, 너무나 흉악합니다. 만약 이러한 무리를 조정에 둔다면, 반드시 종묘사직에 근심을 끼칠 것입니다. 청컨대, 모두 절도(絶島)에 위리안치(圍籬安置)하소서.” 하니, 경종이 그대로 따랐다. 이에 노론의 4대신과 노론의 중진 50여명이 유배되었다. 이것을 <신축환국(辛丑換局)>이라고 한다.

1722년(경종 2) 2월에 소론의 승지김일경(金一鏡)이 목호룡(睦虎龍)을 시켜서, 영의정김창집의 손자 김성행(金省行), 좌의정이이명의 아들 이기지(李器之)와 조카 이희지(李喜之: 이사명의 아들) 등 노론의 명문가 자제 13명이 궁녀와 결탁하여 경종을 죽이려고 하였다고 무고하게 하여, <신임사화(辛壬士禍)>를 일으켜서 노론의 4대신과 50여 명을 처형하고 170여 명을 유배하였다.

1722년(경종 2) 2월에 소론의 승지김일경(金一鏡)이 목호룡(睦虎龍)을 시켜서, 영의정김창집의 손자 김성행(金省行), 좌의정이이명의 아들 이기지(李器之)와 조카 이희지(李喜之: 이사명의 아들) 등 노론의 명문가 자제 13명이 궁녀와 결탁하여 경종을 죽이려고 하였다고 무고하게 하여, <신임사화(辛壬士禍)>를 일으켜서 노론의 4대신을 역모죄로 유배지에서 처형하였고, 노론의 중진 50여명도 유배지에서 처형하고 노론 인사 150여 명을 다시 유배하였다. 이때 이관명도 <신임사화>에 연루되어 평안도 덕천(德川)으로 유배되어, 신분이 노복(奴僕)으로 강등되어 3년 동안 고역(苦役) 생활을 하였다. 그해 4월에 동생 이건명이 주청사로서 중국에 갔다가 돌아오자 의금부에서 체포하여 유배지로 압송하였는데, 처음에 전라도 고흥군 흥양(興陽: 남양면)의 사도(蛇島: 뱀섬)에 유배하였다가, 나중에 흥양의 나로도(羅老島)에 이배(移配)하였으며, 그해 8월 19일에 유배지에서 처형되었다.

1724년(경종 2) 8월에 병약한 경종이 37세의 나이로 승하하였다. 일설에는 경종이 입맛이 없어서 수라를 들지 못하자, 왕세제 연잉군(延礽君)이 바친 게장을 맛있게 먹고 갑자기 돌아갔다고 한다. 이에 왕세제(王世弟) 연잉군(延礽君)이금(李昑)이 왕위에 오르니, 그가 바로 영조이다.

영조 시대 활동

1724년(영조 즉위년) 10월에 영조는 소론의 온건파 이광좌(李光佐)를 영의정으로 삼아서, 소론의 정권을 유지하면서, 노론을 다시 등용하여, 정권을 안정시키려고 애를 썼다. 처음에 영조는 왕권의 정통성이 미약하여 소론의 정부와 타협하지 않을 수 없었으므로, <탕평책(蕩平策)>을 써서, 노론과 소론을 화합시키고 남인까지 끌어들여 연립 정권을 수립하려고 모색하였다. 우선 소론의 범법자를 처형하고 노론의 유배자를 석방하여, 정권의 정통성을 확립하려고 노력하였다. 그해 11월에 소론의 김일경(金一鏡) 참형에 처하고 박필몽은 유배하였고, 그해 12월에 소론의 무고자 목호룡(睦虎龍) 등을 참형(斬刑)하여 효수(梟首)하였다. 이에 경종 때 조정에서 쫓겨났던 노론을 등용하기 시작하였고, 또 숙종 때 조정에서 쫓겨났던 남인도 등용하였다. 영조는 4색 당파의 인재를 골고루 등용하여 붕당(朋黨) 정치의 폐단을 막으려고 노력하였다. 이것이 바로 <탕평책(蕩平策)>이다.

1725년(영조 1) 3월에 노론 이관명은 사면을 받고 유배에서 풀려나서, 장원서(掌苑署) 제조(提調)에 임명되었다가, 돈녕부 지사(知事)에 임명되어 경연(經筵)의 지사(知事)를 겸임하였다. 그해 4월에 공조 판서(工曹判書)를 거쳐 우의정(右議政)에 임명되었다. 우의정을 복상(卜相: 재상을 추천함)할 때 이의현(李宜顯)과 이관명(李觀命) 두 사람이 추천되었는데, 영조가 이관명을 낙점(落點)하였다. 이때 영조가 이건명·이관명 형제의 충성에 보답하려고 낙점하였던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영조는 정호(鄭澔)를 영의정으로, 민진원(閔鎭遠: 인현왕후의 오빠)을 좌의정으로, 이관명을 우의정으로 삼아서, 노론의 정권을 수립하고 소론도 참여시켜서 연립 정권을 꾀하였다.(『영조실록』 1년 4월 23일) 그해 5월에 『경종실록(景宗實錄)』을 편찬하기 위하여 실록청(實錄廳)이 설치되자, 우의정이관명이 그 총재관(總裁官)에 맡아서 실록을 편찬하였다. 그해 7월에 우의정이관명이 나이가 많다고 하여 관직을 사양하는 글을 여덟 번이나 올렸으나, 영조가 윤허하지 않았다. 1726년(영조 2) 1월에 좌의정에 임명되었으나, 좌의정이관명이 분수와 의리를 내세워 관직을 사양하는 글을 다시 올렸다. 그해 5월에 한직인 중추부 판사(判事)로 옮겼다.

1727년(영조 3) 7월에 사간원 정언(正言)정석오(鄭錫五)가 소론의 강경파 목시룡(睦時龍)·이중환(李重煥) 등 5인을 처형할 것을 청하자, 영조는 노론의 대신 민진원과 이관명 등을 비롯한 노론의 중진 1백 1명을 파직하였다, 이때부터 영조는 <탕평책(蕩平策)>을 강력히 추진하여, 노론과 소론의 강경파를 모조리 제거하고 4색의 당파 인물을 골고루 등용하여 붕당(朋黨) 정치의 폐단을 막으려고 하였다. 이에 이관명은 강외(江外)로 나가서 몇 년 동안 살면서, 아무리 병이 위독할 때에도 오직 나라의 안위(安危)만을 생각하였다. 실제로 영조를 왕으로 만들기 위하여 노론의 대신 이관명과 이건명·이이명 형제의 힘이 매우 컸지만, 영조의 탕평책에 의하여 노론을 대표하는 인물로 낙인 찍혀서, 조정에서 쫓겨났다. 그러나 동생 이건명이 화(禍)를 당한 이후로 세상사에 대한 관심이 모두 없어졌다. 이때 이관명은 한강 가에서 낚싯대만 드리우고 멍하니 앉아 있었고, 또 가끔 그를 찾아오는 옛 동료들과 어울려서 술을 마시고 시문(詩文)을 지으며, 소일하였다.

1728년(영조 4) 3월에 소론의 강경파 이인좌(李麟佐)와 김영해(金寧海: 김일경의 아들) 등은 노론의 대신들이 경종을 억울하게 독살하였다고 소문을 퍼뜨리고, 무수리가 낳은 영조의 즉위에 반대하여 소현세자(昭顯世子)의 적손 밀풍군(密豊君)이탄(李坦)을 추대하고, 충청도 청주(淸州)에서 반란을 일으켜서, 반란의 규모가 전라도와 경상도 지역까지 확대되었으나, 영조가 소론 정권으로 하여금 이를 진압하게 하여, 간신히 위기를 넘겼다. 이때 이관명은 강교(江郊)로 물러나서 조용히 여생을 보내며 영조가 왕권의 안정을 찾아서 훌륭한 정사를 펴도록 기원하였다. 이관명은 호(號)를 스스로 ‘병산(屛山)’이라고 부르고, 일찍부터 자나깨나 청풍(淸風: 맑은 바람) 금병(錦屛: 비단 병풍)의 산수(山水)를 그리워하였으므로, 만년에 아름다운 풍광을 찾아서 명산대천(名山大川)을 두루 돌아다녔다. 1733년(영조 9) 10월에 병이 위독하여, 마침내 들것에 실려서 서울 집으로 돌아와서, 그해 11월 10일에 북곡(北谷)의 집에서 돌아가니, 향년이 73세였다.

문집으로 『병산집(屛山集)』 15권 8책이 남아 있다.

노론과 소론의 싸움

1720년(경종 즉위) 숙종이 승하하고 장희빈(張禧嬪)의 아들 경종이 즉위하자, 홍석주(洪奭周)는 병조참지(兵曹參知)에 임명되었다가, 영의정김창집(金昌集)에 의하여 다시 동부승지로 발탁되었다. 노론의 영수 김창집은 그의 스승의 큰형이었는데. 그는 소론과 싸우는 데에 앞장설 수밖에 없었다. 앞서 숙종은 말년에 장희빈을 죽이고, 그 아들 경종마저 미워하여, 노론과 손을 잡고 세자를 교체하려고 하다가, 실행하지 못하고 그대로 죽었다. 경종이 33세로 즉위하였으나, 심한 우울증을 앓고 후사가 없었으므로, 노론은 숙종의 제 2왕자 연잉군(延礽君: 최숙빈 소생)을 세제(世弟)로 삼으려고 하였으나, 소론은 적극 반대하였다. 1721년(경종 1) 노론(老論)의 4대신 김창집(金昌集)·이이명(李頤命)·이건명(李健命)·조태채(趙泰采) 등은 소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인원왕후(仁元王后)김대비(金大妃: 김주신의 딸)의 밀지(密旨)를 받아내어 연잉군(延礽君: 영조)을 세제(世弟)로 책봉(册封)하였다. 그때 그는 승지로서 부름을 받고 시민당(時敏堂)으로 들어가서 건저(建儲)하는 논의에 참여하였다. 그 뒤에 대사간(大司諫)에 임명되었다가, 대사성(大司成)으로 옮겨서 『숙종실록(肅宗實錄)』을 편찬하는 당상관(堂上官)을 겸임하였다. 소론 김일경(金一鏡)·박필몽(朴弼夢) 등 7인이 상소하여, 노론 4대신을 탄핵하여 노론 4대신을 몰아내는 데 성공하여 마침내 정권을 잡았다. 이것이 <신축환국(辛丑換局)>이다. 이때 노론 인사 5, 6십여 명이 유배되었는데, 홍석주(洪奭周)도 영암(靈巖)으로 귀양을 갔다. 1722년(경종 2) 소론 김일경의 사주를 받은 목호룡(睦虎龍)이 고변(告變)하여, 영의정김창집의 손자 김성행(金省行), 좌의정이이명의 아들 이기지(李器之)와 조카 이희지(李喜之) 등 노론의 명문가 자제들이 궁녀와 결탁하여 경종을 죽이려고 하였다고 무고하였다. 홍석보는 영암에 있으면서 이희지의 집안과 편지를 주고받은 것이 발각되어, 다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1723년(경종 3) 그는 감옥에서 형신(刑訊)을 당하여 의식까지 잃었으나, 사촌 이진유(李眞儒)의 도움으로 겨우 죽음을 면하여 거제(巨濟)로 유배되었다. 이때 노론의 4대신은 죽음을 당하였고, 노론 인사 170여 명이 죽거나 귀양을 갔는데, 당파싸움에서 노론이 가장 피해를 많이 입은 옥사였다. 1724년(경종 4) 8월 경종의 병세가 악화되어 거의 수라를 들지 못하다가, 세제(世弟)가 보낸 게장을 먹고 복통을 일으켜서 5일만에 죽었다. 노론이 경종을 독살하였다는 소문이 나돌았고, 영조도 평생 그 부담을 지고 살았다.[「홍석주전(洪奭周傳)」]

경종과 영조의 왕위 계승을 둘러싼 소론과 노론의 싸움

현종 때 충청도 회천(懷川)에 살던 우암(尤庵)송시열(宋時烈)과 이성(尼城)에 살던 제자 윤증(尹拯) 사이에 윤증의 아버지 윤선거(尹宣擧)의 비문을 둘러싸고 몇 차례 논쟁하고 시비(是非)를 벌렸는데, 이것을 <회니시비(懷尼是非)>라고 일컫는다.[『명재 연보』 1권] 서인은 <회니시비>로 인하여 송시열을 지지하는 노장층과 윤증을 지지하는 소장층으로 나누어져서, 노론(老論)과 소론(少論)으로 분당되었다. 숙종 때 인현왕후와 장희빈의 왕비 책봉을 둘러싸고, 숙종은 <기사환국>에서 서인을 내쫒고 남인을 등용하였고, <갑술환국>에서 남인을 내쫒고 서인의 소론을 등용하였다. 이에 숙종 말년에 남인은 완전히 몰락하고 서인의 노론과 소론이 경종과 연잉군(延礽君: 영조)의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싸웠는데, 경종 때 <신축환국(辛丑換局)>에서 노론 4대신이 죽음을 당하고, 영조 초기에 <이인좌(李麟佐) 반란>이 일어나서 소론의 강경파와 이를 지지하는 3남(南)의 농민들이 수난을 당하였다.

처음에 별궁(別宮)에 유폐되었던 장희빈이 아들 경종을 만나보려고 하였으므로, 숙종은 두 모자를 만나지 못하도록 금지하였을 뿐만 아니라, 1701년(숙종 27) 사약을 내려서 장희빈을 죽였는데, 이것은 나중에 경종이 왕이 되면, 장희빈이 무슨 짓을 할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어머니를 그리워하던 어린 세자 경종은 아버지를 아주 싫어하였으므로, 숙종은 세자 경종을 몹시 미워하였다. 이에 세자 경종의 아버지에 대한 극단적인 공포심은 마침내 정신 이상 증세로 발전하였다. 장희빈의 죽음에 대하여 소론 정권이 미온적인 태도를 취하자, 숙종은 다시 노론을 중용하고, 다시 노론의 대신들과 손을 잡고 세자 경종을 폐위하고 둘째아들 연잉군(延礽君)을 세자로 삼으려고 생각하였다. 소론이 세자 경종을 적극 지지하였으므로, 숙종은 은밀히 노론의 실력자 좌의정이이명(李頤命)을 불러서 세자를 교체하도록 부탁하였는데, 이것을 <정유(丁酉) 독대(獨對)>라고 한다. 그러나 숙종이 병으로 일찍 죽는 바람에 세자의 교체를 미처 실행하지 못하였다.

경종이 33세로 즉위하였으나, 심한 우울증을 앓고 후사(後嗣)가 없었으므로, 노론은 숙종의 제 2왕자 연잉군(延礽君)을 왕세제(王世弟)로 삼으려고 하였으나, 소론은 이에 적극 반대하였다. 1721년(경종 1) 노론의 4대신 김창집(金昌集)·이이명(李頤命)·이건명(李健命)·조태채(趙泰采) 등은 소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인원대비(仁元大妃: 김주신의 딸)의 밀지(密旨)를 받아내어 연잉군(延礽君: 영조)을 마침내 왕세제로 책봉(册封)하였다. 노론 정권의 영의정김창집(金昌集)과 좌의정이건명(李健命)이 국구(國舅) 김주신을 찾아가서 설득하여 연잉군을 왕세제로 세우기로 합의하였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영조가 왕위에 오르는 데에 국구 김주신과 인원대비의 부녀가 결정적 역할을 하였던 셈이다. 나중에 왕이 된 영조는 김주신의 사당에 예관(禮官)을 보내어 제사를 지내고, 그 은공을 고마워하였다.

처음에 노론이 연잉군(延礽君)을 왕세손을 책봉하였을 때 소론의 4대신 조태구(趙泰耈)·유봉휘(劉鳳輝)·최석항(崔錫恒)·이광좌(李光佐) 등은 이를 수용하였으나, 나중에 왕세제가 대리 청정을 하게 되었을 때 소론은 이에 반대하여, 소론의 우의정조태구(趙泰耈)는 한밤중에 창경궁의 선인문(宣仁門: 북문)으로 들어가서 비밀리 경종을 만나서 눈물을 흘리고 간청하여 마침내 대리 청정하라는 어명을 거두도록 하였다. 이 기회를 틈타서 소론의 급진강경파 준소(峻少) 계열의 김일경(金一鏡)·박필몽(朴弼夢) 등이 목호룡(睦虎龍)을 시켜서, 노론의4대신의 명문가 자제들이 궁녀와 결탁하여 경종을 죽이려고 하였다고 무고하게 하여, <신임사화(辛壬士禍)>를 일으켜서 노론의 4대신과 노론 중진 50여 명을 처형하고 노론 인사 170여 명을 유배하였다. 그러므로 경종 시대 4년 동안 경종과 왕세제 연잉군을 둘러싸고 소론과 노론의 치열한 권력 투쟁이 전개되었다. 이에 소론이 노론을 몰아내고 정권을 잡았는데, 당시 소론의 정권에서 온건파 이광좌·유봉휘와 강경파 김일경·박필몽 등이 두각을 나타냈다.

1724년(경종 4) 8월 경종이 식욕이 없다가, 왕세제(王世弟) 연잉군(延仍君)이 바친 게장을 맛있게 먹고 갑자기 돌아갔는데, 그때 경종의 나이는 37세였다. 경종이 즉위한 지 4년만에 갑자기 돌아가고, 왕세제 연잉군(延礽君)이 31세의 나이로 즉위하니, 그가 바로 영조(英祖)이다. 경종이 워낙 갑자기 돌아갔기 때문에, 시약청(侍藥廳)을 미처 설치하지 못하여, 아무도 그 사인을 몰랐으나, 궁전 안팎에서는 노론이 연잉군을 시켜서 경종을 독살하였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나돌았다. 이때 경종의 처남 심유현(沈維賢)이 경종의 임종을 지켜보았는데, 그 사인이 독살이 틀림없다고 발설하였기 때문이다. 영조는 이러한 풍문을 잠재우고 왕권 초기의 불안정을 극복하려고 <탕평책(蕩平策)>을 내세우고 소론의 이광좌를 영의정으로, 유봉휘를 좌의정으로 임명하고, 박필몽을 도승지로 발탁하여, 노론과 소론의 연립 정권을 모색하였다. 그러나 영조는 소론의 온건파 대신들을 포섭하고 젊은 과격파를 배척하였다. 1724년(영조 즉위년) 12월 영조는 소론의 과격파 김일경(金一鏡)·목호룡(睦虎龍) 등을 친히 국문(鞠問)하여, 김일경·목호룡을 당고개(唐古介)에서 참형(斬刑)에 처하였고, 박필몽 등을 해도(海島)로 유배하였다.(『영조실록』 즉위년 12월 8일)

처음에 소론의 이광좌가 영의정이 되어서 그의 심복 권익관(權益寬)을 함경도 관찰사에, 이사성(李思晟)을 평안도 병마사(兵馬使)에, 정사효(鄭思孝)를 전라도 관찰사에 임용하여 보내어, 소론이 함경도·평안도의 북도 지방과 전라도 등 하 3도 지방을 장악하였다. 그러나 도승지박필몽(朴弼夢)은 김일경의 상소에 가담한 7인의 하나라고 하여, 제주도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가, 소론의 병조판서오명항(吳命恒)의 구원에 의하여 전라도 무장(茂長)으로 이배(移配)되었다. 이때부터 소론의 박필현(朴弼顯)과 심유현(沈維賢)이 함께 반란을 모의하여, 그의 4촌형 박필몽(朴弼夢)을 대장(大將)으로 삼고, 전라도·충청도·경상도의 3남 지방에서 먼저 반란을 일으키고, 그의 매부인 함경도 감사권익관이 평안도 병사이사성과 함께 “3남의 반란을 진압한다.”는 명분으로 북도 지방의 군사를 거느리고 남하하여 서울을 점령하고 영조를 폐위시킨 다음에, 소현세자(昭顯世子)의 증손자 밀풍군(密豊君)이탄(李坦)을 왕으로 옹립하려고 계획하였다.[『호남절의록(湖南節義錄)』]

박필현과 심유현은 김일경의 아들 김영해(金寧海), 목호룡의 형 목시룡(睦時龍) 등을 규합하고 <갑술환국(甲戌換局)> 때 몰락한 남인 민종도(閔宗道)와 이의징(李義徵)의 자손들과 손을 잡고, 현종과 숙종 때 당파 싸움으로 쫓겨나서 낙향한 남인·소론의 여러 인사들과 중앙 정부에 불평불만을 가진 지방 토호들을 포섭하고, 경종이 독살되었다는 소문을 퍼뜨려서 도탄에 빠진 민심을 선동하였다. 먼저 충청도에서 이인좌(李麟佐)가, 경상도에서 정희량(鄭希亮)가 각각 원수(元帥)가 되어서 민란을 일으키고, 다음에 함경도에서 감사권익대와 평안도에서 병마사이사성이 북도 지방의 관군을 거느리고 남하하여 서울을 점령하기로 계획하였다.[『호남절의록(湖南節義錄)』] 또 경종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하여 반란군은 모두 하얀 소복을 입기로 약속하였다. 그러나 박필현의 반란 계획은 처음에 하 3도 지방에서 농민을 사서 민병을 조직하여 민란을 일으키고 나중에 북도의 관군을 동원하기로 하였으나, 하 3도 지방의 농민 반란군이 제대로 조직되지 못하고 서로 연합하지도 못하여 지리멸렬하였으므로, 결국 북도의 관군을 동원하지도 못하고 보름 만에 반란은 진압되고 말았던 것이다.

1728년(영조4) 무신년 3월 충청도에서 이인좌(李麟佐)가, 경상도에서 정희량(鄭希亮)이, 전라도에서 박필현(朴弼顯)이 각각 반란을 일으켰는데, 3도에서 반란을 일제히 일으키기로 약속하였으나, 3도의 반란군은 제때에 조직하지 못하여 서로 연합하지 못하였다. 1728년 3월 15일, 이인좌가 민병을 조직하여 청주성(淸州城)을 공격하여 점령하면서 <무신반란(戊申反亂)>이 시작되었는데, 이인좌는 먼저 충청도 병사이봉상(李鳳祥)과 영장남연년(南延年)을 죽이고 서울로 진격하였다. 그 뒤를 이어 박필현과 정희량도 호남과 영남에서 거병하였다. 당황한 영조는 이이제이(以夷制夷) 정책을 써서 소론의 온건파 병조 판서오명항(吳命恒)을 도순무사(都巡撫使)에 임명하여 반란군을 토벌하게 하였다. 충청도 반란군은 안성(安城)과 죽산(竹山)의 전투에서 오명항의 관군에게 대패하여, 이인좌는 체포당하여 서울로 압송되었다. 충청도의 이인좌는 약속대로 반란을 일으켰으므로, <무신반란>을 일명 <이인좌의 반란>이라고 한다.

이인좌가 청주를 함락한 지 19일이 지나도, 무장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된 박필몽은 약속한 날짜에 맞추어 도착하지 못하자, 초조한 나머지 태인 현감박필현은 근왕(勤王)한다고 핑계를 대고 태인군의 병마를 징발하여 3일 동안 훈련시킨 다음에 3월 22일 군사를 이끌고 전주의 감영(監營)으로 가서 관문(官門) 앞에 진을 쳤다. 그러나 전라도 감사정사효(鄭思孝)도 박필현과 함께 모의하고 기일을 정하여 군사를 일으키기로 약속하였으나, 도순무사오명항이 관군을 이끌고 충청도의 반란을 진압하고 이인좌를 잡아갔다는 소식을 듣고, 정세를 관망하기로 작정하고 관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태인 현감박필현은 감사정사효가 문을 열어주지 않자, 군사를 이끌고 금산사(金山寺) 고개를 넘어서 밤중에 전주의 삼천(三川)에 이르렀다가, 향리(鄕吏) 이주연(李周衍)·오진형(吳震亨) 등이 이끄는 군사에 의해서 반란군이 궤멸되었다. 박필현은 아들 박사제(朴師濟)와 함께 상주(尙州)로 도주하였다가, 상주 영장(營將)한랄(韓玉+束)에게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호남절의록(湖南節義錄)』]

경상도에서 정희량(鄭希亮)은 이인좌의 아우 이웅보(李熊輔)와 함께 민병을 조직하여 안의(安義)·거창(居昌)·함양(咸陽)을 습격하여 모두 함락시키자, 반란군의 형세가 경상도 일대로 크게 확대되었다. 정희량이 반란군을 이끌고 전라도의 반란군과 힘을 합쳐서 북상(北上)하려고 하였다. 경상도의 정희량은 거창(居昌)·안음(安陰) 지역을 근거지로 세력을 확대하여 전라도의 박필현의 반란군과 제휴하려고 전라도 남원으로 진출하려고 하였으나, 정부군은 남원의 전략적 요충지인 우두치(牛頭峙)와 팔량치(八良峙)에서 전라도 의병과 함께 방어하여 경상도 반란군의 진입을 막았다. 정희량의 반란군은 전라도로 진격하지 못하고 함양으로 물러났는데, 도순무사오명항이 이끄는 정부군이 남하하여, 3월 30일 함양을 점령하고 4월 2일 거창에서 정희량을 체포하여 처형하였다. 이리하여 3남 지방에서 20만 명 이상의 농민 반란군이 참여한 <무신반란(戊申反亂)>은 보름만에 신속히 평정되었다.[『호남절의록(湖南節義錄)』]

영조가 국청(鞫廳)을 설치하고 <무신반란>의 주모자를 심문할 때 이인좌는 영조를 숙종의 아들이 아니라고 하여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영조의 어머니 최숙빈(崔叔嬪)은 무수리 출신으로 전남편 김씨와 사이에서 영조를 낳았다는 소문도 있었고, 노론의 세도가 비첩으로서 그 사이에서 영조를 낳았다는 소문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영조는 어머니 출신으로 인하여 어려서부터 궁내에서 푸대접을 받아서 신분에 대한 콤플렉스를 항상 가지고 있었다. 또 박필현은 공초(供招)하기를, “남인과 북인과 소론이 경종의 원수를 갚기 위하여 반란에 모두 가담하였고, 3남 지방의 대장(大將)은 박필몽을, 북도 지방의 맹주(盟主)는 이사성을 받들려고 하였다.”고 하였다. 이리하여 이인좌·박필현·박필몽 등의 반역을 주도한 사람들은 모두 가족과 함께 능지처참(陵遲處斬)을 당하였다.

성품과 일화

1733년(영조 9) 11월 10일에 중추부 판사(判事)이관명(李觀命)이 돌아가자, 『영조실록』의 졸기(卒記)에서, “성품이 차분하고 깨끗하였으며, 젊어서는 강직하다는 명성이 있었다. <신임사화(辛壬士禍)>를 겪고 나서, 세상사에 대한 관심이 모두 없어졌다. 영조가 즉위하자, 제일 먼저 등용하였으나, 분수와 의리를 내세워 힘써 사양하였고, 강교(江郊)로 물러나서 마침내 등용되지 아니하였다. 간혹 집안에서 식량이 자주 떨어지는 데에까지 이르렀으나, 얼굴에 그런 낌새를 거의 드러내지 않았다. 문형(文衡)을 맡았고,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여생을 한가롭게 살다가 돌아갔다.” 하였다.(『영조실록』 9년 11월 10일)

이관명은 아버지 이민서(李敏敍)와 어머니 원주원씨(原州元氏) 사이에 2남 3녀 중에서 맏아들로서 1661년(현종 2) 1월 21일 서울에서 태어났다. 친조부는 영의정이경여(李敬輿)이고, 외조부는 좌의정원두표(元斗杓)이었으므로, 당대 최고의 명문 집안에서 태어났다. 이관명은 동생 이건명(李健命: 1663~1722)보다 두 살 위였으나, 동생 이건명이 1684년(숙종 10) 나이가 22세 때 사마시(司馬試) 진사과(進士科)에 합격하였으나, 형 이관명은 1687년(숙종 13) 나이가 27세 때 사마시(司馬試) 생원과(生員科)로 합격하였다.[『사마방목』] 또 동생 이건명이 1686년(숙종 12) 나이가 24세 때 알성(謁聖) 문과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여, 청요직(淸要職)에 진출하였으나, 형 이관명은 과거에 거듭 실패하고, 음서(蔭敍)로 진출하여 세 공조 정랑(工曹正郞)과 함열 현감(咸悅縣監)을 지내다가, 1698년(숙종 24) 나이가 38세 때 알성(謁聖) 문과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였다.[『국조방목(國朝榜目)』] 그러므로 동생 이건명은 빨리 관계에 진출하여 출세가 빨랐으나, 형 이관명은 늦게 관계에 진출하여 출세가 비교적 늦었다. 두 사람 모두 벼슬이 좌의정(左議政)에까지 올랐으나, 동생 이건명이 판서를 거쳐 먼저 정승이 되었고, 형 이관명이 동생의 뒤를 따라서 판서와 정승이 되었다.

1718년(숙종 44) 8월에 동생 이건명(李健命)이 우의정이 되었고, 그해 11월에 형 이관명은 이조 참판이 되었는데, 이때부터 소론은 이건명과 이관명 형제가 나라의 권력을 독차지한다고 비난하였다. 1719년(숙종 45) 6월에 이관명이 이조 판서에 임명되어, 동생 우의정이건명과 함께 도목정사(都目政事: 인사 행정)를 두 차례나 행하자, 소론이 이관명 형제가 소론의 인물을 배제하고 노론의 인사만을 등용한다고 맹렬하게 비난하였다.(『숙종실록』 45년 7월 6일) 그때 영의정김창집(金昌集)이 이관명과 이건명 형제를 변호하기를, “이조 판서이관명은 형제가 나란히 정부와 전조(銓曹: 이조·병조)에 있는 것을 불편하게 여겨서 사직하고자 합니다. 옛날 정태화(鄭太和)가 영의정이었을 때 그 아우 정치화(鄭致和)가 이조 판서가 되었으며, 이조 판서권상유(權尙游)는 좌의정권상하(權尙夏)의 아우인데, 모두 처음에는 인혐(引嫌)하였으나 나중에 출사(出仕)하였습니다.” 하였다. 소론의 비난을 받을 때마다 이관명·이건명 형제가 피혐(避嫌)하고 관직을 사양하자, 숙종이 두 형제를 불러서 위로하고 사직을 윤허하지 않았으며, 두 번만 도목정사(都目政事)를 맡아주면 다른 자리로 옮겨주겠다고 약속하였다. 그 뒤에 숙종은 약속대로 이관명을 예조 판서로 옮겨 주었다.[이건명의 묘지명]

그 뒤에 정조가 이조 판서이만수(李晩秀)가 그의 형 이시수(李時秀)가 영의정이라고 하여 출사(出仕)하지 않자, 숙종 때 이관명과 이건명의 고사(故事)를 인용하기를, “수백 년 이래로 형제지간에 정승과 이조 판서를 맡았던 예가 수 없이 많았지만, 고 상신(相臣) 이관명·이건명 형제로 말하자면, 동생이 우의정이 되고 형은 이조 판서가 되어, 두 번이나 대정(大政: 도목정사)을 맡아서 본래부터 권력을 가졌던 사람처럼 거리낌 없이 행사하였다. 나이 많은 형이 이조 판서가 되어도 오히려 그러하였는데, 하물며 나이 적은 동생이 이조 판서가 된다면, 두말할 것이 있겠는가.”하고, 이만수에게 출사(出仕)하라고 명하였다.[『홍재전서(弘齋全書)』 36권] 그때 정조는 <신임사화>의 원인이 노론과 소론의 정권을 잡기 위한 싸움보다 두 번이나 도목정사(都目政事)를 맡았던 노론의 이관명·이건명 형제가 노론의 인사만을 등용하고 소론의 인물을 배제하였기 때문이라고 지적하였다. 정조는 영조의 뒤를 이어서 <탕평책(蕩平策)>을 계승하여 4색 당파의 인재를 고루 기용하는 정책을 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관명의 가문은 가까운 친인척들이 조선 시대 정승을 가장 많이 배출한 집안으로 유명하다. 부자가 정승이 된 집안은 황희(黃喜)와 그 아들 황수신(黃守身), 윤두수(尹斗壽)와 그 아들 윤방(尹昉) 등 18가문인데, 아버지 이관명이 좌의정이고, 그 아들 이휘지(李徽之)가 우의정이었다. 형제가 정승이 된 집안은 김상용(金尙容)·김상헌(金尙憲), 김수흥(金壽興)·김수항(金壽恒) 등 16가문인데, 형 이관명이 좌의정이고, 동생 이건명이 좌의정이었다. 외조부와 외손자가 정승이 된 집안은 정유길(鄭惟吉)과 외손자 김상용(金尙容)·김상헌(金尙憲), 신흠(申欽)과 외손자 조사석(趙師錫)·박세채(朴世采) 등 19가문인데, 외조부 원두표(元斗杓)가 영의정이고, 외손자 이관명·이건명 형제가 좌의정이었다. 장인과 사위가 정승이 된 집안은 이산해(李山海)와 사위 이덕형(李德馨), 김상용(金尙容)과 사위 장유(張維) 등 19가문인데, 장인 이관명이 좌의정이고, 사위 김치인(金致仁)이 영의정이었다. 사돈끼리 정승이 된 집안은 권람(權擥)과 신승선(愼承善), 이시백(李時白)과 김자점(金自點) 등 11가문인데, 이관명이 좌의정이고, 김재로(金在魯: 김치인의 아버지)가 영의정이었다.[『임하필기』 30권] 후세의 사가(史家)들은 말하기를, “영의정이경여(李敬輿)의 손자인 이관명·이건명과 이이명(李頤命)이 모두 정승이 되었으나, 달이 차면 기울듯이 권력이 너무 가득차서, <신임사화> 때 이건명과 이이명이 노론 4대신으로 참화(慘禍)를 당하였다.”고 하였다.

묘소와 후손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묘소는 경기 교하(交河) 법흥리(法興里)의 언덕에 있는데, 맏사위 겸산(兼山)유숙기(兪肅基)가 지은 묘표(墓表)가 남아있다.[비문] 전라도 흥덕(興德)의 동산서원(東山書院)과 나주의 서하사우(西河祠宇)에 제향되었다. 숙종 때 세워진 서하사우에는 아버지 이민서(李敏叙)와 동생 이건명(李健命)과 함께 3부자가 제향되었다.[『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 별집 4권]

첫째부인 덕수장씨(德水張氏)는 판서장선징(張善徵)의 딸인데, 자녀는 2남 1녀를 낳았고, 둘째부인 안동권씨(安東權氏)는 학생(學生) 권중만(權重萬)의 딸인데, 자녀는 2남 7녀를 낳았다. 장남 이망지(李望之)는 27세에 요절(夭折)하였고, 차남 이익지(李翊之)는 생원(生員)으로서 순창 군수(淳昌郡守)를 지냈고, 3남 이휘지(李徽之)는 문과에 급제하여, 우의정(右議政)·예문관 대제학(大提學)을 지냈고, 4남 이홍지(李弘之)는 삼척 부사(三陟府使)를 지냈으며, 장녀는 형조 정랑유숙기(兪肅基: 판서 유명웅의 아들)에게, 차녀는 사인(士人) 심정현(沈廷賢)에게, 3녀는 감사(監司)조중회(趙重晦)에게, 4녀는 공조 정랑김치량(金致良)에게, 5녀는 사인(士人) 신최령(辛最寧)에게, 6녀는 영의정김치인(金致仁: 영의정 김재로의 아들)에게 각각 출가하였다. 측실(側室)에서 1남 1녀를 두었는데, 서자 이헌지(李憲之)는 일찍 죽었고, 서녀는 김익겸(金益謙)에게 시집갔다.[비문] 손자 이회상(李晦祥: 이홍지 아들)은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교리(校理)를 지냈다.

참고문헌

  • 『숙종실록(肅宗實錄)』
  • 『경종실록(景宗實錄)』
  • 『영조실록(英祖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병산집(屛山集)』
  • 『국조보감(國朝寶鑑)』
  • 『농암집(農巖集)』
  • 『명재유고(明齋遺稿)』
  • 『약천집(藥泉集)』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임하필기(林下筆記)』
  • 『호남절의록(湖南節義錄)』
  • 『홍재전서(弘齋全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