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휘(李慶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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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617년(광해군 9)∼1669년(현종 10) = 53세]. 조선 후기 인조(仁祖)~현종(顯宗) 때의 문신. 이조 판서(判書) 등을 지냈다. 자는 군미(君美)이고, 호는 묵호(默好)·춘전거사(春田居士)이며, 시호는 익헌(翼憲)이다. 본관은 경주(慶州)이고, 거주지는 서울과 광주(廣州)이다. 아버지는 형조 판서(判書)이시발(李時發)이며, 어머니 고령 신씨(高靈申氏)는 승정원(承政院) 승지(承旨)신응구(申應榘)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이대건(李大建)이고, 증조할아버지는 이경윤(李憬胤)이다. 좌의정이경억(李慶億)의 친형이기도 하다. 송시열(宋時烈)과 송준길(宋浚吉)과 가깝게 교유하고, 서인(西人)의 예론을 적극 지지하였다. 효종(孝宗)·현종 때 동생 이경억과 함께 청요직을 두루 거쳐 홍문관 부제학(副提學) 및 이조 판서에 올랐다.

인조~현종 시대 활동

1633년(인조 11) 사마시(司馬試) 진사과(進士科)로 합격하였는데, 그때 나이가 17세였다. 28세가 되던 1644년(인조 22) 별시(別試)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방목(榜目)』] 이듬해인 1645년(인조 23) 예문관(藝文館) 검열(檢閱)에 임명되었다가,(『인조실록』 23년 윤6월 13일) 1647년(인조 25)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에 임명되었으나 직언을 하다가 파직(罷職)되었다.[『인조실록』 25년 2월 3일 2번쨰기사],(『인조실록』 25년 6월 29일)

1647년(효종 즉위년) 다시 사헌부 지평에 임명되었고,(『효종실록』 즉위년 6월 20일) 홍문록(弘文錄)에 선록(選錄)되었다. 1652년(효종 3) 홍문관(弘文館) 부수찬(副修撰)에 임명되었다가 1653년(효종 4) 홍문관 수찬(修撰)과 홍문관 교리(校理)로 승진하였고, 사헌부 헌납(獻納)에 임명되었다.(『효종실록』 3년 12월 22일),[『효종실록』 4년 6월 14일 1번쨰기사] 이때 『인조실록』을 편찬하는 데에 편수관으로 참여하였다. 1654년(효종 5) 홍문관 교리와 홍문관 부수찬(副修撰)에 다시 임명되었고, 1655년(효종 6)에도 홍문관 교리와 홍문관 수찬(修撰)에 임명되었다.(『효종실록』 5년 8월 1일),(『효종실록』 5년 12월 15일),(『효종실록』 6년 6월 10일) 1656년(효종 7) 다시 사헌부 헌납에 임명되었다가, 이조 좌랑(佐郞)에 임명되었으며, 1657년(효종 8) 이조 정랑으로 승진하였다.(『효종실록』 8년 6월 13일) 1658년(효종 9)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문학(文學)을 겸임하였고, 다시 사헌부 헌납에 임명되었다. 이어 암행어사에 임명되어 전라도 지역을 염찰(廉察)하고 돌아와서 임금에게 보고하였으며, 홍문관 부응교(副應敎)와 홍문관 응교(應敎)로 승진하였다. 1659년(효종 9) 사헌부 집의(執義)에 임명되었다가, 사간원 사간(司諫)에 임명되었다.

1659년(현종 즉위년) 빈전도감(殯殿都監) 도청(都廳)에 임명되어, 효종을 영릉(寧陵)에 장사지냈다. 다시 홍문관 응교에 임명되었다가,(『현종실록』 즉위년 6월 16일) 사헌부 집의와 의정부 사인(舍人)을 거쳐, 병조 참지(參知)에 임명되었다.(『현종실록』 즉위년 7월 21일),(『현종실록』 즉위년 8월 14일) 이때 동생 이경억은 성균관 대사성(大司成)에 임명되었다. 1660년(현종 1) 이조 참의(參議)에 임명되었다가 성균관 대사성에 임명되었고, 승정원(承政院) 동부승지(同副承旨)로 발탁되었다.(『현종실록』 1년 2월 8일),(『현종실록』 1년 9월 16일),(『현종실록』 1년 12월 4일) 1661년(현종 2) 승정원 우부승지(右副承旨)로 승진하였고, 1663년(현종 4) 홍문관 부제학(副提學)과 이조 참의 및 병조 참지를 거쳐, 사간원 대사간(大司諫)에 임명되었다.(『현종실록』 4년 8월 21일),(『현종실록』 4년 9월 16일) 1664년(현종 5) 다시 이조 참의와 병조 참지를 거쳐, 다시 사간원 대사간·성균관 대사성·홍문관 부제학을 역임하였다. 1665년(현종 6) 강화도유수(江華島留守)로 나갔다가 이조 참판(參判)으로 승진한 후 성균관 대사성을 겸임하였다.(『현종실록』 6년 6월 11일),(『현종실록』 6년 6월 13일)

1666년(현종 7) 다시 사헌부 대사헌에 임명되었다가, 다시 이조 참판에 임명되었다.(『현종실록』 9년 3월 4일),(『현종실록』 9년 3월 8일) 1667년(현종 8) 병조 참판을 거쳐 경기관찰사(京畿觀察使)에 임명되었다.(『현종실록』 8년 1월 1일) 1668년(현종 9) 홍문관 부제학에 임명되었다가 이조 참판을 거쳐 사헌부 대사헌과 사간원 대사간이 되었다. 이때 그의 동생 이경억은 예조 판서(判書)로 있었다. 1669년(현종 10) 이조 참판으로 있다가 이조 판서로 승진하였는데, 이는 그가 인망(人望)이 있었기 때문이다.(『현종실록』 10년 1월 3일) 그러나 그해 여름 얼굴에 종기가 나서 병이 낫지 않고 날로 심해지자, 관직을 사임하였다.(『현종실록』 10년 6월 11일) 결국 그해 6월 17일 종기가 악화되어 서울 집에서 세상을 떠나니, 향년이 53세였다.(『현종실록』 10년 6월 17일)

성품과 일화

이경휘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성품이 온후하고 의지가 확고하며,(『현종실록』 10년 6월 17일) 모습이 준걸(俊傑)하고, 기량이 크고 넓었다. 평상시에는 말이 별로 없고 모습이 엄격하고 의연하여, 남이 범접하지 못할 듯하였다. 그러다가 사람을 대할 때에는 너그럽고 관대하여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하면서도 그를 좋아하였다. 조정에서 일을 처리할 때에는 한결같이 충신(忠信)과 공평(公平)을 위주로 하였다. 기강(紀綱)을 세우고 대체(大體)를 지녀서, 작은 일을 세밀하게 따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지론(持論)도 과격하지 않았다. 옳고 그름을 구분할 때에는 소신이 확실하여, 여러 사람들이 분분하게 의논을 다투다가도 이경휘가 천천히 한마디 하면, 그대로 의논이 정해졌다. 그렇기 때문에 일을 의논할 때 모두 이경휘에게 물어서 결정하였다. 사관(史官)이 논평하기를, “동료들 중에 그의 논의가 제일 훌륭하다고 일컬어졌다. 사람들이 그의 아우 좌의정이경억(李慶億)보다 더 훌륭하다고 칭찬하였다.”고 하였다(『현종실록』 10년 6월 17일)

일찍이 아버지 이시발은 첫째 부인 여흥 민씨(驪興閔氏)와 사별하고 둘째 부인 고령 신씨와 혼인하였다. 어느 날 자다가 밤에 꿈을 꾸니 바다에 아침 해가 둘씩이나 연달아 둥실둥실 떠오르는 것을 보고, 깨어나서 마음속으로 이상하게 여겼다. 그 뒤에 이경휘·이경억 형제가 잇따라 태어나서, 모두 과거에 급제하여 판서와 정승이 되었다. 이경휘는 어릴 때 노는 모습이 다른 아이들과 달랐으며, 글의 문리(文理)가 일찍 터져서 여섯 살 때 항우전(項羽傳)을 읽을 정도였다. 이때 아버지 이시발이 후금의 누르하치의 침략에 대비하여 찬획사(贊劃使)에 임명되어 평안도에 있었는데, 이시발이 떠날 때 광해군(光海君)이 자기의 상방보검(尙房寶劍)을 풀어주면서, 대장(大將) 이하의 생사여탈권을 주었다. 마침 평안도관찰사(平安道觀察使)박엽(朴燁)이 와서 아버지를 뵐 때, 어린 이경휘가 아버지 옆에서 모시고 있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나가 관찰사박엽에게 절을 하라고 명하자, 이경휘가 즉시 일어서서 말하기를, “제가 듣건대, 관찰사가 포학하여 살인을 많이 한다고 하는데, 어찌 절을 하겠습니까.” 하였다. 아버지가 매우 기특하게 여겼다.

1626년(인조 6) 1월 아버지 이시발이 58세로 세상을 떠났는데, 이때 형 이경휘는 10세, 동생 이경억은 7세로 아직 어렸다. 젊은 어머니 고령 신씨는 스스로 아이들의 스승이 되어 밤낮으로 가르치고, 회초리로써 아이들이 게으르지 못하도록 독려하였고, 그 결과 학업이 놀라울 만큼 날로 진취하였다. 이경휘는 나이 17세 때 사마시(司馬試) 진사과(進士科)에 4등으로 합격하였고, 그 뒤에 11년이 지나 28세 때 별시(別試)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그러나 동생 이경억은 형보다 한 달 앞서 25세 때 정시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두 형제가 거의 동시에 과거에 합격하자, 나라에서는 어머니 고령 신씨에게 수연(壽宴)을 베풀어 주었고, 온 세상 사람들이 부러워하며 칭송하였다. 동생 이경억이 장원 급제하여, 형 이경휘보다 벼슬이 빨리 진급하여 정승이 되었는데, 형 이경휘도 오래 살았더라면 정승이 되었을 것이다.

이경휘·이경억 형제는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홀로 된 어머니를 효성으로 모셨다. 형제가 이미 높은 벼슬에 올라서 바쁜 몸이 되었음에도 항상 곁에서 어머니를 모셨는데, 특별한 일이 없으면 잠시도 곁을 떠나지 않고, 다정하게 굴면서 어머니를 기쁘게 해드리는 것이 갓난아이와 다를 바가 없었다. 어머니가 병이 들었을 때는 한 해가 넘도록 병 수발을 들면서 약물과 반찬을 반드시 몸소 받들었으며, 상을 당해서 상복을 입을 때에는 잠잘 때도 상복을 벗지 않았다. 집 안팎의 법도가 아주 엄격하였는데, 이경휘는 아우 이경억과 더불어 머리가 희게 셀 때까지 함께 광주의 한 집안에 살면서 우애가 돈독하였다. 집안 살림이 검소하여 입는 옷이 가난한 선비와 같았으며, 부녀자들에게도 경계하여 비단옷을 입고 주옥(珠玉)을 몸에 차지 못하도록 하였다. 형제의 벼슬이 점차 높아져서 형제가 번갈아 이조 판서가 되어서 전형(銓衡 : 인사 행정)을 맡았을 때 장남 이인환(李寅煥)이 또 과거에 급제하자, 이경휘는 “복이 가득 차서 넘치면 기울어진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벼슬에 오래 있는 것을 두려워하고, 벼슬을 사퇴하고 항상 전리(田里)로 돌아갈 뜻을 가지고 있었다.

이경휘는 처음에 호를 묵호라 하였다가, 만년에 춘전거사로 고쳤는데, 이것은 전리로 돌아갈 뜻을 나타낸 것이다. 일찍이 문한(文翰)에 뛰어나다고 스스로 자부하지 않았으나, 시문이 전아(典雅)하고 섬세하였는데, 문단에서 그의 사부(詞賦)를 평하기를, “작풍(作風)이 적고 음조가 시원하여 『이소(離騷)』나 『문선(文選)』의 문체를 터득하였다.”고 칭찬하였다.

묘소와 후손

시호는 익헌(翼憲)이다. 묘소는 충청도 청주(淸州) 천내(川內)의 언덕에 있는데, 최석정(崔錫鼎)이 지은 신도비명(神道碑銘)이 남아있다. 처음에 경기도 인천(仁川) 도리현(桃李峴)에 장사지냈다가 그 뒤 청주에 있는 부인의 묘소에 합장하였다.

부인 해평 윤씨(海平尹氏)는 광흥창(廣興倉) 수(守)윤게(尹垍)의 딸인데, 자녀는 아들 여섯을 두었다. 장남 이인환은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이조 참판을 지냈는데, 백부(伯父) 이경연(李慶衍)의 후사가 되었다. 차남 이인혁(李寅爀)은 사복시(司僕寺) 정(正)인데, 후덕하고 식견이 높았다. 3남 이인욱(李寅煜)과 4남 이인찬(李寅燦)은 모두 요절하였다. 5남 이인희(李寅熺)는 남원부사(南原府使)를 지냈고, 6남 이인식(李寅烒)은 통덕랑(通德郞)이었다.

참고문헌

  • 『인조실록(仁祖實錄)』
  • 『효종실록(孝宗實錄)』
  • 『현종실록(顯宗實錄)』
  • 『현종개수실록(顯宗改修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명곡집(明谷集)』
  • 『농암집(農巖集)』
  • 『동춘당집(同春堂集)』
  • 『만기요람(萬機要覽)』
  • 『미수기언(眉叟記言)』
  • 『명재유고(明齋遺稿)』
  • 『백호전서(白湖全書)』
  • 『송자대전(宋子大全)』
  • 『신독재전서(愼獨齋全書)』
  • 『서계집(西溪集)』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월사집(月沙集)』
  • 『임하필기(林下筆記)』
  • 『응천일록(凝川日錄)』
  • 『잠곡유고(潛谷遺稿)』
  • 『청음집(淸陰集)』
  • 『택당집(澤堂集)』
  • 『포저집(浦渚集)』
  • 『국조보감(國朝寶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