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록(李慶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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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43년(중종 38)∼1599년(선조 32) = 57세]. 조선 중기 선조 때의 무신. 행직(行職)은 제주 목사(濟州牧使)이고, 증직(贈職)은 영의정(領議政)이며, 봉작(封爵)은 완령부원군(完寧府院君)이다. 자(字)는 백수(伯綏), 또는 자홍(子弘)이다.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회덕 현감(行懷德縣監)이간(李幹)이고, 어머니 경주김씨(慶州金氏)는 진주 목사(晉州牧使)김홍(金泓)의 딸이다. 효령 대군(孝寧大君)의 6대손이며, <인조반정(仁祖反正)>의 1등 공신 이서(李曙)의 아버지다.

선조 시대 활동

1576년(선조 9) 식년(式年) 무과(武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는데, 그때 나이가 34세였다. 바로 선전관(宣傳官)에 보임되었는데,[비문] 임기가 만료되면서 단성 현감(丹城縣監)으로 승진하였으나, 미처 부임하기도 전에 호조 좌랑(戶曹佐郞)에 임명되었다. 이어 하동 현감(河東縣監)으로 전임되었다가, 고성 현령(固城縣令)이 되었는데, 백성에게 선정을 베풀었다고 하여 경흥 부사(慶興府使)로 발탁되었다.[비문]

이경록은 두만강 하류에 있는 삼각주섬인 녹둔도(鹿屯島)에 둔전(屯田)을 설치하고, 농민들로 하여금 녹둔도에 들어가서 농사를 짓게 하였는데, 조산 만호(造山萬戶)이순신(李舜臣)이 이를 관리하였다. 그러나 1587년(선조 20) 9월, 조산보의 농민들이 녹둔도에 들어가서 추수를 할 때, 시전(時錢) 부락에 살던 번호(藩胡) 하오랑아(何吾朗阿)가 만주 내지의 우디캐족과 연합해 녹둔도에 침입한 후. 농산물을 약탈하고, 여진족을 방비하던 수호장(守護將)오형(吳亨), 감관(監官)임경번(林景藩) 등 11명의 군사를 살해하고, 군민(軍民)을 납치하였으며, 말을 약탈해 갔다. 이때 경흥 부사이경록은 조산 만호이순신과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힘을 다해 오랑캐와 싸워 녹둔도에 침입한 오랑캐를 물리쳤으나, 서로 공방전을 벌이는 과정에서 엄청난 살상이 벌어졌다. 당시 오랑캐의 병력은 많았으나, 경흥 부사이경록과 조산 만호이순신이 거느린 군사는 고작 2백 명에 지나지 않았고, 근처에 있던 진(鎭)에서도 제때에 군사를 출동하여 구원해 주지 않았기 때문에 오랑캐를 물리치기는 하였으나, 우리 군사의 사상자가 많이 발생하게 되었다.[비문] 이 사건으로 이경록과 이순신 두 사람은 처벌을 받은 후, 백의종군(白衣從軍)하게 되었다.(『선조실록』 20년 10월 16일) 이경록은 1588년(선조 21) 북병사(北兵使)이일(李鎰)이 시전(時錢) 부락의 하오랑아(何吾朗阿)를 정벌할 때, 백의종군하게 되었는데, 이 전투에서 선봉(先鋒)이 되어 오랑캐와 용감하게 싸워 전공을 세우면서 마침내 죄를 용서받게 되었다. 1589년(선조 22) 서용되어 김해 부사(金海府使)에 임명되었다.(『선조실록』 22년 8월 16일) 1591년(선조 24) 나주목사(羅州牧使)가 되었는데,(『선조실록』 24년 2월 13일)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풀어 임금으로부터 표리 1습(表裏一襲 : 속과 겉의 옷감 한 벌)을 하사받았다.[비문]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는 서울 도성(都城)을 버리고 근신(近臣)만을 데리고 개성(開城)·평양(平壤)을 거쳐 의주(義州)로 피난을 갔다. 각 도(道)에서는 임금을 지키기 위하여 근왕병(勤王兵)을 일으켰으나, 모두 왜적에게 궤멸되면서, 선조는 고립무원(孤立無援)에 빠지게 되었다. 관군이 이처럼 나라를 지키지 못하는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각 고을에서는 의병(義兵)이 일어나 왜적의 약탈에서 자기 고을을 지키려고 하였을 뿐만 아니라, 관군과 연합하여 서울을 수복하려고 하였다. 나주 목사이경록은 전라도 나주(羅州)에서 창의사(倡義使)김천일(金千鎰: 1537~1593)이 의병을 일으켜 국난(國難)을 구하려고 하자, 갑옷과 병장기(兵仗器) 등을 마련해 김천일을 적극 도와주었다.[비문] 그해 7월, 제주목사(濟州牧使)에 임명되었다.

당시 전쟁으로 길이 막히면서, 각 도에서 임금에게 사철 바치는 공물(供物)이 대부분 선조가 머물고 있는 의주의 행재소(行在所)까지 전달되지 못하고 있었으나, 제주 목사이경록만은 때마다 방물(方物)을 마련하여 의주의 행재소까지 바닷길을 통해 수송 하였다. 전쟁으로 물자 부족에 허덕이던 행재소에서는 제주도에서 보내오는 진상(進上)을 너무나 반가워하며, 그의 충성심을 가상하게 여겼다.[비문] 1598년(선조 31) 3월,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월정집(月汀集)』] 집으로 돌아가려했으나, 조정에서는 목사의 관직을 그대로 수행하도록 이경록을 기복(起復)시켰다.[비문] 결국 어버이의 상례(喪禮)조차 치르지 못한 것을 비통하게 여긴 이경록은 이듬해 관아에서 돌아갔는데, 향년 57세이다.[비문]

녹둔도와 이경록

녹둔도(廘屯島)가 역사상 우리의 고유 영토로 처음 기록된 것은 『세종실록(世宗實錄)』 지리지(地理志)이다. 처음에 사람들은 이 섬을 사차마(沙次亇: saicham), 또는 사혈마(沙泬麻: saixuem)라고 불렀는데, 이것은 두만강 사이에 있는 섬, 즉 간도(間島: 사이 섬)라는 뜻이다. ‘사이 섬’의 발음을 한자로 사차마(沙次亇: saicham)→사혈마(沙泬麻, 沙泬磨: saixuem)→간도(間島: saisuem)라고 표기한 것인데, 세종 때 육진(六鎭) 개척 이후, 북방의 지명을 새로 지으면서 ‘사슴이 사는 섬’이라는 뜻의 녹둔도(廘屯島)로 하게 되었다. 녹둔도는 두만강이 바다에 맞닿는 곳에 있는 작은 섬인데, 둘레는 2리(里) 정도이고 높이는 수면에서 10자 정도이다. 녹둔도에는 농사를 지을 만한 넓은 모래땅이 있었으나, 번호(藩胡)들이 침입하여 약탈할까봐 두려워 농민들이 들어가서 농사를 짓지 못하였다. 번호(藩胡)라는 말은 우리나라 영토의 ‘울타리 노릇을 하는 오랑캐’라는 뜻이다. 그러나 이들은 겉으로는 우리나라에 조공(朝貢)하고 복속(服屬)하는 체하지만, 기회만 있으면, 만주 내지(內地)의 오랑캐족과 우디케족을 끌어들여 조선의 5진(鎭)의 진보(鎭堡)를 침입하여 약탈하였다.

녹둔도는 한 동안 5진(鎭)의 번호(藩胡)들이 그 섬을 차지하고 사슴을 사냥하던 땅이었다. 선조 때 함경도 감사정언신(鄭彦信)이 군량미를 확보하려고 녹둔도에 둔전(屯田)을 설치하였으나, 1583년(선조 16) 번호(藩胡) 니탕개의 반란으로 실패하였다. 1587년(선조 20) 경흥 부사(慶興府使)이경록(李慶祿)이 다시 녹둔도에 둔전(屯田)을 설치하고, 녹둔도와 가장 가까운 조산보(造山堡) 농민들에게 섬으로 들어가 농사를 짓게 하였는데, 조산보 만호(萬戶)이순신(李舜臣)이 녹둔도의 둔전을 관리하도록 하였다. 이때 농사짓는 농민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섬 안에는 길이 1,246척의 토성(土城)을 쌓고 높이 6척의 목책(木柵)을 세워 여진족의 침입을 방어하였다. 그러나 농민들이 녹둔도에 상주하는 것이 아니라 조산보의 병사가 방어하는 가운데 농민들이 배를 타고 섬을 오가며 농사를 짓는 방식이었다. [『제승방략』]

1587년(선조 20) 9월, 조산보의 농민들이 녹둔도에 들어가서 추수할 때, 5진(鎭)의 번호(藩胡) 가운데 시전(時錢) 부락에 살던 번호(藩胡) 하오랑아(何吾朗阿)가 만주 내지의 우디캐족을 끌어들여, 녹둔도에 침입한 후. 농산물을 약탈하고, 여진족을 방비하던 수호장(守護將)오형(吳亨), 감관(監官)임경번(林景藩) 등 11명의 군사를 살해하고, 군민(軍民) 106명을 납치해 갔으며, 말 15필을 약탈해 갔다. 이때 경흥 부사이경록(李慶祿)은 조산 만호(造山萬戶)이순신(李舜臣)과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힘을 다해 오랑캐와 싸워 녹둔도에 침입한 오랑캐를 물리쳤으나, 서로 공방전을 벌이는 과정에서 엄청난 살상전이 벌어졌다. 당시 오랑캐의 병력은 많았으나, 경흥 부사이경록과 조산 만호이순신이 거느린 군사는 고작 2백 명에 지나지 않았으며, 근처에 있던 진(鎭)에서도 제때에 군사를 출동하여 구원해 주지 않았기 때문에 오랑캐를 물리치기는 하였으나, 우리 군사의 사상자가 많이 발생하게 되었다. 북병사(北兵使)이일(李鎰)은 경흥 부사이경록과 조산 만호이순신을 체포하여 수금(囚禁)하고 재판에 회부하여 두 사람을 죽이려고 하였다.[비문]

그해 10월, 북병사(北兵使)이일(李鎰)은 선조에게 “적호(賊胡)가 녹둔도의 목책(木柵)을 포위했을 때 경흥 부사이경록과 조산 만호이순신이 군사 작전을 잘못 써서 전사(戰士) 10여 명이 피살되고, 1백 6명의 농민이 포로가 되었으며, 15필의 말이 끌려갔습니다. 국가에 욕을 끼쳤으므로 이경록과 이순신을 수금(囚禁)하였습니다.”라고 보고하였다.(『선조실록』 20년 10월 10일) 비변사(備邊司)에서 이경록과 이순신 등을 서울로 압송하여 재판에 회부할 것을 청하자, 선조는 “이경록과 이순신은 전쟁에서 패배한 사람과는 차이가 있다. 북병사로 하여금 두 사람에게 장형(杖刑)을 집행하도록 한 다음에 백의종군(白衣從軍)시켜서 공을 세우도록 하라.”고 전교하였다. 이에 경흥 부사이경록과 조산 만호이순신은 곤장 1백대를 맞은 후, 백의종군(白衣從軍)하게 되었다. (『선조실록』 20년 10월 16일)

이듬해 북병사(北兵使)이일(李鎰)이 시전(時錢) 부락의 하오랑아(何吾朗阿)를 정벌할 때 이경록과 이순신은 백의종군(白衣從軍)하였다. 시전 부락에서 전투가 벌어졌을 때, 선봉(先鋒)이 된 이경록은 오랑캐 한 사람을 뒤쫓게 되었는데, 기마(騎馬)에 능한 그 오랑캐는 말을 타고 달아나면서도 그를 향하여 활을 쏘았다. 이 과정에서 이경록은 몸에 서너 군데나 화살을 맞아 부상을 입고, 말까지도 화살을 맞았으나, 끝까지 그 오랑캐를 추격해서 마침내 사로잡았다. 그러나 그때 이경록이 타고 있던 말이 부상으로 땅 바닥에 넘어지면서, 도망하던 오랑캐 무리가 군사를 돌려 이경록을 포위해 왔다. 오랑캐 한 사람이 칼을 빼들고 이경록에게 곧장 덤벼드는 것을 그가 화살 한 방을 쏘아 거꾸러뜨렸다. 이어 오랑캐 한 사람이 또 앞에 나서자, 이경록은 그 오랑캐를 죽인 후, 그가 타고 있던 말을 빼앗아 타고 우리 군사 진영(陣營)으로 돌아왔다. 이 소식을 들은 군영(軍營)의 사람들은 이경록의 용맹에 탄복하며, ‘한비장군(漢飛將軍)’이라고 불렀는데, ‘한비장군’은 중국 한(漢)나라의 용맹한 장군 이광(李廣)을 말한다. 그러나 이경록은 이때 동상(凍傷)으로 인하여 오른손 엄지손가락을 잃고 말았다.[비문] 이경록과 이순신은 시전 부락의 정벌에서 공을 세워서 마침내 죄를 용서받게 되었다.

그 뒤에 녹둔도는 우리나라의 영토로 편입되어 경흥부에서 관리하여 왔는데, 1800년대 이후 두만강 상류의 모래가 유속(流速)으로 밀려 내려와 녹둔도와 그 맞은편 만주 땅 사이에 계속 쌓여 퇴적되면서 만주 땅과 연결되게 되었다. 이에 1860년 청나라와 러시아 사이에 <북경조약(北京條約)>이 맺어져 아무르강 동쪽의 연해주(沿海州)가 러시아 땅으로 넘어갈 때, 녹둔도는 러시아의 영토로 편입되었다. 1882년(고종 19) 1월, 고종은 어윤중(魚允中)을 서북경략사(西北經略使)로 삼고 녹둔도를 다시 되찾을 방안을 모색하도록 하였다. 이후 러시아와 국교가 열리자, 고종은 러시아 공사에게 녹둔도의 반환을 요청했으나 아무런 답변이 없었다. 앞으로 우리나라가 통일되면, 중국·러시아 사이의 국경 회담을 다시 열도록 요구하고, 반드시 녹둔도를 되찾아 와야 할 것이다.

성품과 일화

어려서부터 걸출하고 씩씩하였는데, 활쏘기와 말 타기를 좋아하였다. 점차 성장하면서 무술을 연마하였는데, 스스로 무사의 재능과 역량이 뛰어나다고 자부하였다.[비문]

이경록(李慶祿)은 젊었을 때 호쾌하고 용맹스러워서, 곧잘 협기(俠氣)를 부리기도 하였다. 그는 일찍이 중 보우(普雨)가 주지로 있던 절에 들른 적이 있었는데, 명종 재위 당시 문정 대비(文定大妃)가 중 보우를 총애하면서 그의 위세가 한창 치솟았을 때였다. 당시 어느 누구도 감히 보우 앞에서 그를 힐긋 흘겨보지도 못하는 상황이었으나, 이경록은 보우가 무례하게 구는 것을 보고 격분한 나머지 곧장 절 안으로 뛰어 들어가, 두 손으로 중 보우의 턱을 움켜잡고 주먹으로 마구 때렸다. 당시 절 안에 무려 수백 명의 중이 있었으나, 이경록의 위세가 너무나 당당하였기 때문에 모두 둘러서서 숨을 죽이고 구경만 할 뿐, 누구도 감히 나서서 만류하지 못하였다. 이때 이경록이 문정대비의 비호를 받던 중 보우를 욕보였다는 말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 그를 장하다고 칭찬하였다.[비문]

그러나 이경록은 장년이 되면서 자신을 낮추고 성실하게 자기 몸을 단속하였다. 남을 대할 때에는 침묵으로 일관한 채 웃기만 하고 말을 잘 하지 않았으며, 기쁘거나 화난 기색을 남에게 드러내지 않았고, 남과 화목한 분위기를 만들려고 항상 노력하였으며, 특히 아랫사람들에게 온정을 베풀었다. 평소 집안의 살림살이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았기 때문에, 8년 동안 제주 목사(濟州牧使)를 지냈으나, 집안의 살림살이가 가난을 벗어나지 못하였으므로, 사람들이 그를 청렴한 지방관이었다고 칭송하였다.[비문]

1592년(선조 25) 왜적이 쳐들어오자, 선조는 서울 도성(都城)을 버린 채 근신(近臣)만을 데리고 초라하게 개성(開城)·평양(平壤)을 거쳐 서북의 최북단에 있는 의주(義州)로 피난을 갔다. 각 도(道)에서는 임금을 지키기 위하여 근왕병(勤王兵)을 일으켰으나, 모두 왜적에게 궤멸되고, 선조는 고립무원(孤立無援)이 되었다. 의주에 머물던 선조는 평양이 왜군에게 함락되자, 몹시 불안해하던 나머지, 중국 요동(遼東)으로 망명하려고 생각하였다. 관군이 나라를 지키지 못하는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각 고을에서는 의병(義兵)이 벌떼처럼 일어나 왜적의 약탈에서 자기 고을을 지키려고 하였을 뿐만 아니라, 관군과 연합하여 서울을 수복하고 임금을 다시 서울로 모시려고 하였다. 이때 전라도 나주(羅州) 사람인 창의사(倡義使)김천일(金千鎰: 1537~1593)이 의병을 일으켜 국난(國難)을 구하려고 하자, 나주 목사이경록은 개연히 갑옷과 병장기(兵仗器) 등을 마련해 김천일을 적극 도와주었다.[비문] 그 덕으로 김천일(金千鎰)은 고경명(高敬命) 등과 함께 3백여 명의 의병을 모아서 수도 서울을 수복하기 위하여 북상하여 권율(權慄)의 행주(幸州) 대첩(大捷)에 참여하여, 큰 공을 세웠다.

그해 여름에 이경록은 제주 목사(濟州牧使)에 임명되었는데, 당시 선조는 멀리 평안도 의주(義州)에 머물고 있었다. 당시 전쟁으로 길이 막히면서, 각 도에서 임금에게 사철 바치는 공물(供物)은 대부분 의주로 전달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제주 목사이경록만은 때마다 방물(方物)을 마련하여 바닷길을 통해 의주의 행재소(行在所)까지 수송 하였다. 전쟁으로 물자 부족에 허덕이던 행재소에서는 제주도의 진상(進上)을 너무나 반가워하였다. 이경록의 충성심을 가상하게 여긴 선조는 “만일 일이 불행하게 되어, 과인이 요동(遼東)으로 건너가 중국에 망명하게 되면, 경(卿)이 본주(本州)의 병력을 이끌고 육지로 나와서 왜적을 무찌르고 기필코 광복(匡復)을 이룬 다음에 나를 복위시키도록 하시오.” 라고 수교(手敎)를 내렸다. 당시 선조가 명나라 요동으로 망명하려고 하자, 도승지이항복(李恒福)과 전 좌의정정철(鄭澈)은 이를 지지하였으나, 서인의 영수인 좌의정윤두수(尹斗壽)와 동인의 영수인 전 영의정유성룡(柳成龍)이 깜짝 놀라 조정의 동인과 서인의 힘을 합하여 적극 만류하면서, 선조의 요동 망명은 결국 실현되지 못하였다.[비문]

제주 목사이경록은 평소 무사의 지기(志氣)를 자부하면서 무략(武略)에 힘써 왔고, 또 선조의 지우(知遇)까지 받고 있었으나, 나라가 어려운 위기에 봉착하였는데도 제주도의 외딴 섬에서 우두커니 목사의 자리만을 지키고 있을 뿐, 직접 전쟁터에 뛰어들어 나라를 위해 공을 세우지 못하고 있는 것을 항상 가슴 답답하게 여겼는데, 어찌할 수가 없는 상황을 한탄하며 때로 강개(慷慨)한 기분에 젖은 나머지 눈물을 흘리는 때가 많았다. 또한 연세가 높은 아버지 이간(李幹)을 오래도록 찾아뵙지 못하는 것도 마음에 걸려, 여러 차례 상소하여 사임하기를 간청하였으나, 선조는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비문] 1598년(선조 31) 3월, 아버지가 돌아갔다는 부음(訃音)을 듣고, 급히 집으로 돌아가려했으나 미처 바다를 건너기도 전에 기복(起復)의 명을 받고 그대로 유임하게 되었다. 어버이 생존 시에 제대로 봉양도 못했는데 세상을 떠나신 뒤에 상례(喪禮)까지도 치르지 못하는 것을 마음 아프게 여긴 목사이경록은 살아갈 의욕조차 잃고 말았다. 그는 관아의 업무 시간이 끝나면 곧 바로 돌아와 상복(喪服)으로 갈아입은 후, 예(禮)를 행하곤 하였는데, 너무 비통하게 호곡(號哭)하며 몸을 상하게 한 나머지 1599년(선조 32) 관아에서 돌아가니, 향년이 57세였다.[비문]

묘소와 후손

묘소는 경기 양주(楊州) 송산리(松山里)의 선영(先塋)에 있는데, 계곡(溪谷)장유(張維)가 지은 신도비명(神道碑銘)이 남아있다.[비문] 둘째 아들 이서(李曙)가 <인조반정(仁祖反正)>을 성공시킨 공훈으로 정사공신(靖社功臣) 1등에 책훈되자, 그 공으로 아버지 이경록이 완령부원군(完寧府院君)에 봉해지고, 영의정(領議政)으로 추증되었다.

부인 덕수이씨(德水李氏)는 사헌부 감찰(監察)이학증(李學曾)의 딸인데, 자녀는 3남 3녀를 두었다. 장남 이탁(李晫)은 장악원(掌樂院) 첨정(僉正)을 지냈고, 차남 완풍군(完豐君)이서(李曙)는 <인조반정(仁祖反正)>의 1등 공신으로 병조 판서와 총융사(摠戎使)를 지냈고, 3남 이흔(李昕)은 유사(儒士)로서 장가들기 전에 일찍 죽었다. 장녀는 직장(直長)황영중(黃瑩中: 황진의 아들)에게, 차녀는 수군 절도사(節度使)이의배(李義培: 이흡의 아들)에게, 3녀는 주부(主簿)유준(柳浚)에게 각각 출가하였다.[비문]

부인 이씨(李氏)는 현명하고 부덕(婦德)을 갖추어, 자식들을 반드시 법도(法度)에 따라 교육하였다. 광해군(光海君) 때 대북(大北)의 이이첨(李爾瞻) 일당이 장차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위(廢位)시키려고 조정 신하들에게 강제로 정청(庭請)에 참가하게 하고, 각자 헌의(獻議)하게 하며, 감히 이의(異議)를 제기하는 자들에 대해서는 겁을 주고 윽박지르는 상황이 되자, 부인 이씨가 둘째 아들 이서를 불러서 조용히 말하기를, “내가 살기 위해서 스스로 무군 무모(無君無母)에 빠지는 일이 없도록 하라.” 하였다. 이에 이서는 친한 친구 신경진(申景禛)과 쿠데타를 모의하고, 장단(長湍)의 군사를 이끌고 서울로 들어가 마침내 <인조반정(仁祖反正)>을 일으켜, 광해군을 몰아내고 인조를 세웠는데, 그 공으로 정사공신(靖社功臣) 1등 완풍 부원군(完豊府院君)에 봉해졌다.[비문]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계곡집(谿谷集)』
  • 『오산집(五山集)』
  • 『월정집(月汀集)』
  • 『임하필기(林下筆記)』
  • 『제승방략(制勝方略)』
  • 『백사집(白沙集)』
  • 『가휴집(可畦集)』
  • 『팔오헌집(八吾軒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