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선거문집(尹宣擧文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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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문신ㆍ학자 윤선거(尹宣擧)의 시문집

개설

『윤선거문집(尹宣擧文集)』은 조선 후기의 문신ㆍ학자 윤선거(尹宣擧)의 시문집이다. 본래 이름은 『노서유고(老西遺稿)』이다. 원집 20권, 속집 3권, 별집 1권, 부록 2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총 26권 13책, 목판본이다.

편찬/발간 경위

서발(序跋)이 없어 편찬ㆍ간행경위는 분명하지 않으나, 이 문집은 아들 윤증(尹拯)이 직접 정리하고 편차하여, 1712년에 노강서원(魯岡書院)에서 목판으로 간행하였다. 당시 기휘(忌諱) 사항이었던 윤휴와 관련된 글들은 모두 별집(別集)으로 모아 따로 편차하였다. 그 외에 속집(續集), 부록(附錄)도 수록 내용을 살펴볼 때 원집(原集)과 같은 시기에 간행된 것으로 보인다.

서지 사항

26권 13책으로 구성되어 있고, 목판본이다. 크기는 세로 28.9cm, 가로 18.3cm이며 고려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구성/내용

이 책이 현재 전해지는 본집의 목록(目錄)에는 속집과 별집의 내용이 없고, 원집 바로 뒤에 부록이 있으며, 세계도(世系圖)가 부록의 첫머리에 붙어 있는 등 실제 구성과 내역이 약간 다르다. 이는 판본의 훼판(毁板)과 개간(改刊)이 반복되는 과정에서 일어난 현상인 것 같다.

원집 권1~2는 시(詩)이다. 총 330여 수로 시체(詩體)에 관계없이 연도순으로 수록하였는데, 내용은 주로 형제와 유계(兪棨), 송시열(宋時烈), 이유태(李惟泰) 등 교분이 깊었던 사람들과의 차운시나 스승인 김집(金集)을 비롯하여 유계, 조익(趙翼) 등에 대한 만시(挽詩)이다. 권2에는 1664년(현종 5) 금강산과 관동(關東) 일대를 유람하고 지은 시 등이 실려 있다. 권3~4에는 1653년(효종 4) 자의(咨議)를 사직한 상소, 1636년(인조 14) 윤선거가 강화도에 있을 때 심희세(沈熙世)ㆍ이시중(李時中)ㆍ이장영(李長英)ㆍ이정영(李正英)ㆍ윤성(尹城)ㆍ김익겸(金益兼) 등과 함께 연명하여 검찰(檢察)을 통진(通津)ㆍ김포(金浦)ㆍ부평(富平)ㆍ인천(仁川)ㆍ안산(安山)ㆍ남양(南陽) 등의 수령에게 보내어 병사를 모은다면, 포위된 상황을 바꿀 수 있다는 ‘강도상분사서(江都上分司書)’ 등 38편의 상소가 연도별로 수록되어 있다.

권5~12에는 총 270여 편의 편지가 실려 있으며, 문집에서 가장 많은 양을 차지하고 있다. 편지의 수신자는 스승인 김집, 송시열, 송준길(宋浚吉), 유계, 이유태, 권시(權諰), 정양(鄭瀁), 박세채(朴世采), 형제와 자제들이다. 권13에는 ‘후천도설(後天圖說)’과 그에 대해 유계와 왕복한 편지가 실려 있다. 권14에는 외조부인 성혼(成渾)에 대한 글과 김집, 김상헌(金尙憲) 등에 대한 유사(遺事)가 실려 있다. 권15에는 1652년 4월부터 1657년 4월까지의 일기가 실려 있는데, 1655년 12월 강화도의 치욕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말한 부분과 1657년 윤휴와 강화도의 일에 대해 문답한 부분은 효종(孝宗)을 모함하였다고 문제가 되기도 하였다.

권16은 설(說)ㆍ기(記)ㆍ서(序)ㆍ발(跋)ㆍ상량문(上樑文)ㆍ통문(通文)들로 조카 윤식(尹拭)과 유계의 아들인 유명필(兪命弼)의 자설(字說), 돈암서원(遯巖書院)과 임피서원(臨陂書院)의 상량문(上樑文), 아들 윤증과 윤추(尹推)의 혼인 때 지은 납폐서(納幣書) 등이 실려 있다. 권17~20은 제문(祭文), 묘지문(墓誌文), 행장(行狀)이다. 제문은 중형(仲兄) 윤순거(尹舜擧)의 제문 등 모두 27편이 실려 있다. 묘지(墓誌) 10편은 대부분 친족의 것이며, 행장은 절친했던 벗인 유계의 행장이 1권 분량을 차지하고 있다. 권20에는 김면(金沔), 권준(權儁), 윤집(尹集), 윤곤(尹坤)의 행장이 실려 있다. 속집(續集)의 권1은 시(詩), 소(疏), 서(書)이다. 65편의 시가 창작시기 순으로 수록되어 있는데 대부분 만시(挽詩)이다. 소는 1660년부터 1662년까지의 사직소(辭職疏)와 1665년과 1666년 현종(顯宗)이 온천에서 소명을 내린 것에 대한 대죄소(待罪疏)이다. 서는 송시열, 송준길, 권시와 아들에게 보낸 것이다. 이 중에서 ‘답권사성(答權思誠)’은 1658년 대궐 아래 나아가 소를 올린 자신의 뜻을 친구이자 사돈인 권시에게 토로한 것인데, 내용 가운데 ‘작금일지두거(作今日之杜擧)’란 대목이 효종의 잘못을 지적한 것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권2의 ‘서송강사정변후시송이제익(書松江邪正辨後示宋李諸益)’은 기축옥사(己丑獄事)에 대한 글이며, ‘양선생사우록목록(兩先生師友錄目錄)’은 성혼과 이이(李珥)의 문인록(門人錄)이다. 그 밖에 통문과 제문, 단편적인 일기 7조목이 실려 있다. 권3에는 1664년 윤순거와 함께 관동 일대를 유람한 것을 기록한 일기인 「파동기행(巴東紀行)」이 실려 있다. 별집(別集)은 1권으로 시 17편, 서(書) 15편, 일기 3조가 수록되어 있다. 시는 송시열, 윤휴 등과 수창한 시이다. ‘의답송영보(擬答宋英甫)’는 일명 기유의서(己酉擬書)로 불리는 편지로, 1669년 윤선거가 죽기 직전에 윤휴의 문제로 송시열에게 보내려다 그만두었는데, 후에 아들 윤증이 송시열에게 저자의 묘도문을 부탁하면서, 보여 주어 결정적으로 불화를 가져온 계기가 되었다. 또한 윤휴와 주고받은 편지 4편이 실려 있는데, 당시에 기휘(忌諱)하던 것이었기에 시와 아울러 별집에 넣은 것으로 보인다. 일기 3조도 모두 윤휴와 관련된 글로 윤휴가 윤선거의 후천설(後天說)을 잘 이해하고 있다는 것 등을 인정하는 내용들이다. 부록 상에는 아들 윤증이 편차한 연보와 유사(遺事), 강화도에서 순절(殉節)한 부인 이씨의 유사가 실려 있다. 부록 하에는 1673년 박세채가 지은 행장, 윤원거(尹元擧)가 지은 묘표음기(墓表陰記), 제문, 만사(挽詞)가 실려 있다. 뒤에는 윤선거가 배향된 노강서원과 신곡서원(新谷書院)의 제문이 실려 있다. 마지막에는 노서선생세계도(魯西先生世系圖)가 수록되어 있다.

소문은 다소 수식과 자존으로 일관한 감이 없지 않으나, 그 당시 추세로 보아 저자의 주장은 시의에 따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저자는 김상헌(金尙憲)ㆍ삼학사(三學士)들과 같이 존주대의(尊周大義)를 부르짖고 척화론(斥和論)을 주장하였다. 저자는 강도사(江都事)가 있은 뒤 소명(召命)이 있을 때마다 죄인으로 자처하여 응하지 않고, 사의를 표하는 소(疏)를 올려, 자신의 주장을 논설로 전개하였다.

저자는 당시 문장과 학식이 송시열(宋時烈)과 쌍벽을 이루던 인물로 많은 서한을 남겼다. 서신을 주고받은 사람으로는 송준길(宋浚吉)ㆍ송시열ㆍ이민적(李敏迪)ㆍ김집(金集)ㆍ유계(兪棨)ㆍ조복양(趙復陽)ㆍ이유태(李惟泰)ㆍ권시(權諰)ㆍ김상헌ㆍ송기후(宋基厚)ㆍ박세채(朴世采) 등 당시의 명사들이 총망라되어 있다.

이 가운데 송준길ㆍ송시열과 주고받은 서한이 가장 많은데, 특히 송시열과의 관계는 그 뒤 회니문제(懷尼問題)가 일어난 일과 관련해 연구할 만한 자료가 된다. 김집과의 ‘사우문답(師友問答)’, 송준길과 윤선도(尹善道)를 논한 것, 김집과 파산비문(坡山碑文)을 논한 것, 권시와 더불어 정인홍(鄭仁弘)을 관련시켜, 유영경(柳永慶)을 논한 것 등은 당시 정계의 의식구조와 동향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자료들이다.

잡저의 ‘후천도설(後天圖說)’은 『주역』의 역상변화(易象變化)에 대해 도표로 표현하고 있다. 이 역설(易說)에 관해 토론한 내용은 유계와 교환한 서(書)의 ‘여시남왕복서(與市南往復書)’에 수록되어 있다. 또한 잡저의 일기는 1652년(효종 3)부터 1657년까지 산발적으로 적은 것이며, 별집에 누락된 일기 3조가 수록되어 있다.

참고문헌

  • 김향숙, 「윤선거 부자 문집의 간행과 훼판(毁板)에 대한 고찰」, 『서지학보』 제35호, 한국서지학회, 2010.
  • 도민재, 「노서 윤선거의 예학사상」, 『충남대학교 유학연구』 제18집, 충남대학교 유학연구소, 2008
  • 이송희, 「노서 윤선거의 만시(挽詩) 연구」, 『어문연구』 제74권, 어문연구학회, 2012.
  • 이송희, 「노서 윤선거의 문학 연구」, 충남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4.
  • 황의동, 「노서 윤선거의 무실사상(務實思想)」, 『유학연구』 제18집, 충남대학교유학연구소,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