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일무(六佾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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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줄로 춤 대열[舞列]을 이루어 추는 궁중무용.

개설

육일무(六佾舞)는 무용수들이 6줄로 정렬한 후 처음부터 끝까지 줄에서 이탈하지 않은 채 추는 춤이다. 다른 춤들의 경우에는 내용에 따라 배치가 다양한데, 육일무는 6줄의 규격을 지키면서 춤동작을 행한다는 점이 특징이다.

육일무는 일무의 한 갈래로 제후(諸侯)가 활용하도록 규정되어 있어, 제후국에 해당하는 조선시대에 특히 자주 사용되었다. 육일무 외에도 천자(天子)는 팔일무(八佾舞), 대부(大夫)는 사일무(四佾舞), 사(士)는 이일무(二佾舞)를 사용하도록 구분하여 춤으로써(『영조실록』 46년 7월 8일) 서열화된 근대 이전의 동아시아 국제 질서를 알 수 있다.

연원 및 변천

육일무는 1116년(고려 예종 11) 송(宋)나라에서 대성아악(大成雅樂)이 도입될 때 우리나라에 전래되어 제례에 수반되었다. 조선 건국 이후에도 대사(大祀)와 중사(中祀)로 분류된 종묘제례(宗廟祭禮)·사직제례(社稷祭禮)·문묘제례(文廟祭禮)·선농제(先農祭)·선잠제(先蠶祭) 등의 의례에 지속적으로 사용되었고, 조선후기를 거쳐 일제강점기까지 육일무의 전통이 이어졌다.

1897년(광무 1) 10월에 고종이 황제로 등극함으로써 황제국으로 격상되었던 대한제국기에는 육일무와 함께 팔일무도 병용하였는데, 제례의 위격에 따라 각각 다르게 쓰였다. 즉 대한제국기에는 대사에 속하는 원구제례(圜丘祭禮)·종묘제례·사직제례에는 팔일무를 도입하였고, 중사에 속하는 경모궁제례(景慕宮祭禮)·문묘제례·선농제·선잠제·관왕묘제례(關王廟祭禮) 등에는 육일무를 활용하였다.

절차 및 내용

육일무의 용례는 주로 제례에서 나타나지만, 이례적으로 세종대에 행해진 회례연(會禮宴)과(『세종실록』 14년 3월 28일) 영조의 보령 50세 기념 연향에서(『영조실록』 19년 9월 16일) 육일무를 춤추도록 한 사례가 있다. 길례(吉禮)뿐 아니라 가례(嘉禮)에서 육일무가 등장한 경우이다.

육일무의 무원(舞員)은 상황에 따라 인원이 달랐다. 6줄을 만들어 그 대열을 준수하며 육일무를 연행하는 것은 공통적이지만, 줄마다 6명씩 총 36명이 춤추는 경우도 있고 줄마다 8명씩 총 48명이 춤출 때도 있었다.

육일무는 주로 등가(登歌) 악대와 헌가(軒架) 악대 사이에 배치되어 신을 맞이하는 영신(迎神), 폐백을 올리는 전폐(奠幣), 첫 번째로 올리는 술잔인 초헌(初獻), 두 번째로 올리는 술잔인 아헌(亞獻), 마지막으로 올리는 술잔인 종헌(終獻)의 의식 절차에 이르기까지 문무(文舞)와 무무(武舞) 두 종류로 실현되었다.

참고문헌

  • 『논어집주(論語集註)』
  • 『국조오례의서례(國朝五禮儀序例)』
  • 『악학궤범(樂學軌範)』
  • 『종묘의궤(宗廟儀軌)』
  • 『시용무보(時用舞譜)』
  • 『춘관통고(春官通考)』
  • 『대한예전(大韓禮典)』
  • 『조선악개요(朝鮮樂槪要)』
  • 김영숙·이숙희·송지원, 『종묘제례악』, 국립문화재연구소/민속원, 2008.
  • 송지원, 「儒家 樂論에서 佾舞의 상징과 의미」, 『仙華金靜子敎授 華甲紀念 音樂學論文集』, 仙華金靜子敎授 華甲紀念論文集 刊行委員會, 2002.
  • 이정희, 「高宗代 圜丘祭禮樂 再考」, 『공연문화연구』 제14집, 한국공연문화학회,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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