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봉서(柳鳳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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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654년(효종 5)~1699년(숙종 25) = 46세]. 조선 중기 숙종(肅宗) 때의 문신. 자는 계휴(季休)이며, 본관은 문화(文化)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사간원(司諫院)정언(正言)홍문관(弘文館)교리(校理) 등을 역임하였다. 아버지는 영의정을 지낸 유상운(柳尙運)이고, 어머니 전의 이씨(全義李氏)는 사헌부(司憲府)대사헌(大司憲)을 지낸 이행원(李行遠)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형조 정랑(正郞)을 지낸 유성오(柳誠吳)이다. 좌의정이자 소론(少論)의 영수이던 유봉휘(柳鳳輝)의 형이기도 하다.

숙종 시대 활동

1684년(숙종 10)에 진사시(進士詩)에 장원으로 합격하고, 1689년(숙종 15)에 감귤제(柑橘製)에 장원으로 뽑혀서 전시에 나가 증광(增廣)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숙종실록(肅宗實錄)』숙종 15년 1월 24일, 『방목(榜目)』] 1694년(숙종 20) 예문관(藝文館) 검열(檢閱)에 천거되었으며, 이듬해인 1695년(숙종 21)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설서(說書)로 옮겼다.[『숙종실록』숙종 20년 10월 21일, 『약천집(藥泉集)』 권21 「교리유군묘갈명(校理柳君墓碣銘)」 이하 「유봉서묘갈명」으로 약칭] 이어 병조 좌랑(佐郞)으로 승진하여 사간원 정언과 세자시강원 문학(文學), 사헌부 지평(持平)을 역임하였으며 지제교(知製敎)에 선정되었다.[『숙종실록』숙종 21년 6월 29일, 숙종 21년 9월 17일, 「유봉서묘갈명」] 1695년(숙종 21)에는 평안도의 암행어사(暗行御史)로 활동하다가 그해 4월 다시 사헌부 지평이 되었다.[『숙종실록』숙종 22년 1월 26일, 숙종 22년 4월 9일] 이때 사헌부 대사헌최석정(崔錫鼎)과 장희빈(張禧嬪)의 오라버니인 장희재(張希載) 등의 처벌을 주장하였으나, 숙종이 따르지 않았다.[『숙종실록』숙종 22년 4월 11일] 1696년(숙종 22)에 관서(關西) 지방을 염문(廉問)하고 돌아와 병조 정랑에 임명되었다. 영남경시관(嶺南京試官)으로 차출되었다가 포천현감(抱川縣監)이 되었는데, 몸가짐이 간소하고 진휼에 성의를 다하였으므로, 떠날 때에 백성들이 철비(鐵碑)를 세웠다.[「유봉서묘갈명」]

1697년(숙종 23) 홍문관(弘文館)부교리(副校理)와 사간원 헌납(獻納), 홍문관 수찬(修撰), 홍문관 교리(校理) 등을 돌아가며 역임하였다.[『숙종실록』숙종 23년 7월 6일, 숙종 23년 8월 27일, 숙종 23년 10월 20일, 숙종 23년 10월 28일, 숙종 23년 11월 6일, 숙종 23년 12월 2일, 숙종 23년 12월 17일, 숙종 23년 12월 27일] 한편 그가 홍문관 교리이던 그해 12월 김진귀(金鎭龜)가 상소하여 자신의 아들 김춘택(金春澤)이 논박을 입은 사실을 변명하면서, 사헌부 장령(掌令)김홍정(金弘楨)이 인피(引避)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숙종실록』 숙종 23년 12월 22일, 숙종 23년 12월 26일] 그해 봄 이영창(李榮昌)이 장길산(張吉山)과 연계하여 역모를 일으키려고 한 일이 발각되었을 때, 첨사(僉使)홍기주(洪箕疇)가 이와 관련되어 형장(刑杖)을 맞다가 죽은 일이 있었다.[『숙종실록』숙종 23년 1월 10일] 그런데 김춘택이 홍기주와 가까운 사이였을 뿐만 아니라, 홍기주가 이 사건과 관련하여 상변(上變)을 할 때 김진귀의 하인이 따라갔었던 것이 문제가 되었다. 그리하여 사헌부 장령이동암(李東馣)과 당시 사간원 정언이던 김홍정 등이 김춘택을 탄핵하였고, 결국 김춘택은 정배되었던 것이다.[『숙종실록』숙종 23년 7월 16일, 숙종 23년 7월 24일, 숙종 23년 10월 23일] 김진귀의 상소가 올라온 후, 사헌부 지평윤이림(尹爾霖)은 김홍정이 근거 없는 말을 하였다며 김홍정의 체직을 청하였다.[『숙종실록』숙종 23년 12월 27일]

그러자 유봉서(柳鳳瑞)가 국가를 부지(扶持)하는 것은 오로지 공의(公議)에 달려 있다고 하면서, 아들의 잘못을 아버지가 모를 리가 없다며 김춘택뿐만 아니라 김진귀 또한 처벌할 것을 주장하였다.[『숙종실록』숙종 23년 12월 27일] 이에 숙종은 역모가 아닌데 아들의 일로 아버지까지 연좌할 수 없다며 유봉서의 주장을 일축하고, 유봉서를 대정현감(大靜縣監)에 제수하였다.[『숙종실록』숙종 23년 12월 27일, 숙종 24년 6월 9일, 『숙종실록보궐정오(肅宗實錄補闕正誤)』숙종 23년 12월 27일, 숙종 24년 1월 10일] 이때 숙종은 유봉서가 소론의 당론을 따라 노론(老論)의 영수이던 이세백(李世白) 등을 공격하기 위하여 또 다른 노론인 김진귀를 끌어들인 것이라고 비난하기도 하였다.[『숙종실록』숙종 23년 12월 27일, 숙종 23년 12월 30일]

이후 유봉서를 위한 변명이 끊이지 않자, 얼마 후인 1698년(숙종 24) 1월 숙종은 유봉서를 제주도의 대정현에서 전라도 흥양현으로 임지를 바꾸어 그를 흥양현감(興陽縣監)에 제수하였으며, 이어 그해 7월 북평사(北評事)에 임명하였다.[『숙종실록』숙종 24년 1월 3일] 그러나 이듬해인 1696년(숙종 25) 4월 16일 병으로 경성(鏡城)의 객관(客館)에서 사망하니, 향년 46세였다.[『숙종실록』숙종 25년 4월 27일, 『숙종실록보궐정오』숙종 25년 4월 25일, 「유봉서묘갈명」]

성품과 일화

유봉서의 성품과 자질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해진다. 그는 성격이 강직하고 엄격하여 남의 과오를 용인하지 못하였다. 친척이나 오랜 친구라 하더라도 옳지 않다고 생각되면 곧 서슴없이 그 잘못을 지적하고 용서치 않다가 나중에 지나침을 깨닫고는 패위(佩韋 : 위(魏)나라의 서문표(西門豹)가 자신의 성급한 마음을 고치기 위하여 항상 부드럽게 한 가죽을 차고 다니며 반성했다는 고사(故事))의 경계를 가슴에 새겨서 감정이 동요해도 본성을 굳게 지킬 수 있었다.[「유봉서묘갈명」]

유봉서가 사망한 뒤 대신(臺臣)이 글을 올리기를, “군이 남쪽에 내쳐졌다가 돌아오자마자 바로 북쪽으로 배척당하여 마침내 먼 변방에서 죽으니 길가는 사람도 이를 듣고 눈물 흘립니다.” 하였다. 또 유신(儒臣)이 경연(經筵)에 나아가 군이 언사(言事)로 인하여 내침을 받아 죽은 상황을 말하니, 숙종이 “내 어찌 끝내 버릴 생각이야 있었겠는가? 장차 불러 쓰려 하였는데 젊은 사람이 뜻밖에 죽으니 마음이 매우 슬프다.” 하였다.[『숙종실록』숙종 25년 4월 27일, 「유봉서묘갈명」]

묘소와 후손

유봉서의 묘소는 경기도 양평군 옥천면에 있으며, 남구만(南九萬)이 쓴 묘갈명(墓碣銘)이 남아있다.[「유봉서묘갈명」]

부인 청송 심씨(靑松沈氏)는 학생(學生) 심약제(沈若濟)의 딸이며, 자녀는 1남 2녀를 두었다. 아들은 유태원(柳太垣)이고, 장녀는 봉사(奉事)이명언(李明彦)에게, 차녀는 윤상길(尹尙吉)에게 각각 시집갔다.[「유봉서묘갈명」]

참고문헌

  • 『숙종실록(肅宗實錄)』
  • 『숙종실록보궐정오(肅宗實錄補闕正誤)』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국조방목(國朝榜目)』
  • 『사마방목(司馬榜目)』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약천집(藥泉集)』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우사집(雩沙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