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백병(油白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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멥쌀가루나 찹쌀가루를 반죽하여 기름에 지진 떡.

개설

멥쌀가루 또는 찹쌀가루를 뜨거운 물로 익반죽하여 모양을 만든 후 뜨거운 기름에 지져서 익힌 떡이다. 조선에서는 제향(祭享)에 제물(祭物)로 이용되었다.

만드는 법

멥쌀이나 찹쌀을 깨끗하게 씻어 찬물을 부어 불린 후 건져서 물기를 뺀다. 불린 쌀은 빻아서 가루를 낸다. 쌀가루에 펄펄 끓는 물을 조금씩 부어 가며 반죽한다. 익반죽을 하여야 떡이 잘 익고 차지게 된다. 떡 반죽은 젖은 면포를 덮어 30분 정도 잠시 둔다. 떡 반죽을 떼어 용도에 맞게 모양을 빚는다. 기름이 달구어지면 떡 반죽을 올려 지진다. 떡이 충분히 익어야 하므로 약한 불에서 지지고, 한쪽 면이 다 익으면 뒤집어 다른 쪽을 익힌 후 낸다. 찹쌀가루로 떡을 만들면 처지기 쉬우므로 떡의 크기를 작게 빚는다.

연원 및 용도

『임원십육지(林園十六志』에서 “기름에 지지는 떡을 유병(油餠)이다.”라고 하고, “꽃떡[花糕]이 유병이다.”라고 하였다. 즉 진달래나 국화 같은 제철의 꽃을 올려 지지는 떡을 부르는 것이다. 유백병(油白餠)은 흰떡[白餠]을 지진 떡[油餠]으로, 떡을 고일 때 웃기떡으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조선에서 유백병은 왕실 제향에 제물로 쓰인 것으로 보인다. 참찬(參贊)허조(許稠)는 후릉(厚陵)의 명일별제(名日別祭)는 익조(翼祖) 이하의 능제(陵祭)의 전례에 의거하여 유백병을 쓰도록 하겠다고 보고하였다(『세종실록』 4년 2월 22일). 예조(禮曹)에서는 종실(宗室)과 대신(大臣)의 사제(賜祭) 시 유백병 사행탁(四行卓)을 내렸다. 그러나 국상(國喪) 대·소렴전(大小斂奠)에 이미 사행탁을 사용하게 되어 있어 상하의 등급이 없게 되므로, 대신 유백병을 세 줄로 쓸 것을 청하였다(『세종실록』 6년 3월 2일).

또 예장(禮葬)할 때에, 제전(祭奠)을 예조와 의례상정소(儀禮詳定所)가 함께 의논하여 작정하였는데, 계빈전(啓殯奠)에는 유백병이 세 줄이요, 탁자 위에 화초를 갖추며 일헌삼전례(一獻三奠禮)로 거행하고, 조전(祖奠)과 견전(遣奠)은 위의 의식과 동일하게 하라고 하였다[『세종실록』 6년 3월 14일 4번쨰사]. 예조에서 올린 봉상시(奉常寺)의 첩정에 의하여 광효전과 헌릉 삭망제(朔望祭)에는 문소전·건원릉(健元陵)의 예에 의하여 유백병 쓰기를 청하였다(『세종실록』 6년 6월 12일).

세종은 공사로 인해 사람들이 죽자, 나라를 위해 일을 하다 죽은 사람에게 부의(賻儀)만을 주는 것은 도리가 아니니 제사에 쓰이는 물품을 예조를 통하여 내리게 하였다. 그러므로 예조에서는 상정소와 함께 의논하여 종2품은 정2품의 치제(致祭)하는 예에 따라 유백병 세 줄 탁자(卓子)에 아홉 가지 찬물(饌物)로 하고, 3품 이하에게는 유백병 세 줄 탁자에 일곱 가지 찬물로 하고, 관직이 없는 군민(軍民)에게는 유백병 열한 가지 과실 탁자에 다섯 가지 찬물로 하였다. 또 제문(祭文)은 3품 이상에게는 교서(敎書)로 하고, 4품 이하로부터 군민에 이르기까지는, 서울에서는 예조에서, 외방(外方)에서는 소재관(所在官)에서 교지를 받들어 글을 지어 행하게 하고, 비록 4품 이하의 관원이라도 만약 명령을 받아 국사를 처리하다가 나라를 위하여 죽은 사람에게는 임시로 임금의 윤허를 받아 교서(敎書)를 내리게 하였다(『세종실록』 14년 9월 7일).

『일성록』에서는 ‘유병’으로 기록이 보인다. 정조대 예조 판서서호수(徐浩修)가 영흥본궁(永興本宮)과 준원전(濬源殿)의 작헌례(酌獻禮)를 섭생할 때의 제물에 유병이 있었다. 또 봉상시 제조서유방(徐有防)은 능(陵)의 향사(享事)에 쓰이는 병품(餠品) 중에서 두단병(豆團餠)이 여름철이 되면 상하는 것이 걱정스러우므로 4월부터 8월까지는 송고병(松膏餠)으로 바꾸어 사용하라고 명하였다. 그런데 여름에 친제를 만나게 되면 송고병과 두단병이 모두 9가지 병품 안에 포함되므로 두단병은 기신제(忌辰祭) 때 사용하는 유병으로 바꾸어 쓰면 사의(事宜)에 합당하다고 하였다. 여기서 유병은 유백병과 음식으로 추정된다.

김장생(金長生)의 『사계전서(沙溪全書)』「의례문해(疑禮問解)」 제례(祭禮)에 기록된 내용에 의하면, “기름으로 볶은 음식물을 쓰는 것도 역시 온당치 않다고 하는데, 과연 모두 근거가 있는 것입니까?”라는 물음에 “기름으로 볶은 음식물을 쓰지 않는 것은 『의례(儀禮)』에서 나왔네. 지금 세속에서 반드시 밀과(蜜果)와 유병을 써서 제사 지내는데, 이것은 고례에는 맞지 않는 듯하네.”라고 답하였다. 『의례』 사상례(士喪禮)의 기(記)에는 “기름으로 볶으면 무례하고 공경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쓰여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약천집(藥泉集)』에 실린 영의정충정(忠貞)오공(吳公)의 묘지명(墓誌銘)에 죽기 며칠 전에 자제들에게 당부하기를 “상을 치를 적에 검소함을 따르고 문수(文繡)로 상여를 꾸미지 말라. 만장(輓章)은 예가 아니니, 남에게 시구(詩句)를 빌려 망인(亡人)의 재주와 덕행을 찬양해서 영구(靈柩) 앞에 세우는 것이 어찌 부끄럽지 않겠는가. 초종(初終)에 간략히 전(奠)만 올리고 제사하지 않는 것이 예인데 지금 밀과와 유병을 많이 진설하여 며칠 동안 치우지 않아서 먼지가 시커멓게 끼니, 절대로 이러한 것을 본받지 말라.”고 한 것으로 보아, 제례 시 여전히 쓰이고 있고 그에 따른 폐단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한수재집(寒水齋集)』에는 사계(沙溪)김장생(金長生)이 이르기를 “기름에 튀긴 음식물을 쓰지 않는다는 말이 『의례』에서 나왔다.”고 하였으니, “그렇다면 밀과나 유병도 의당 제사에 쓰지 않아야겠습니까?”라는 물음에 “만일 기름에 튀긴 음식물을 쓰지 않는다면 밀과나 유병뿐만 아니라, 어(魚)·채(菜)에도 기름을 쓴 것들은 또한 폐해야 할 것이니, 이는 매우 실행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일찍이 두 분 송 선생[二宋先生] 댁에서 제사 지낸 것을 보니 거기도 다 밀과를 썼습니다.”라고 하였다. 『의례』에 기록된 내용과는 반대로, 세속에서는 기름을 이용하여 나물을 무치고 생선을 굽고, 떡을 지져서 제수를 마련하는 것에 정당성을 찾으려 한 것으로 보인다.

『성호사설(星湖僿說)』 「만물문(萬物門)」에서 김장생은 “무릇 미숫가루는 기름에 튀겨서 먹지 않는다[凡糗不煎].”는 말을 인용하여, “제사에 밀과와 유병을 쓰는 것은 예가 아니다.”고 하였다. 그러나 “예의 본의로는 미숫가루를 기름에 튀기는 것은 너무 상없는 것이지만, 딴 물품은 옛날부터 기름에 튀기지 않는 것이 없다. 변두(籩豆)에 담는 물품인 이사(酏食)와 삼사(糝食) 같은 것도 모두 쌀가루에 고기를 섞어서 기름에 튀기는 것이다. 또 반찬에서도 사시(四時)로 공궤하는 것이 철을 따라 각각 다른데, 만약 기름으로 튀겨서 만들지 않는다면 장차 무엇으로 맛있게 할 것인가?”라며 기름을 사용하여 조리하는 것에 대한 명분을 확실히 하였다. 그래서인지 조선후기에 유장원(柳長源)이 상례, 변례에 관한 제설을 기록한 『상변통고(常變通攷)』에서 제사 음식 중 떡류는 박병(薄餠)·유병(油餠)·호병(胡餠)·증병(蒸餠)·조고(棗餻)·환병(環餠)·염두(捻頭)·박탁(餺飥) 등이라 설명하고 있다.

유백병은 대체로 일본이나 중국을 다녀온 사신들의 기록에 많다.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경사편 풍속(風俗)에도 「오랑캐의 풍속이 도리어 간편한 데 대한 변증설[夷裔之俗反省便辨證說]」에 오랑캐들의 생활양식 중 장점으로 아침식사의 간편성을 들었다. “우리나라처럼 아침저녁으로 하인들이 식사하라고 전갈하는 예가 없다. 배가 고프면 경우에 따라서는 몇 닢의 동전으로 유병 한 조각, 혹은 군고구마 두서너 개를 사서 요기한다.”라고 하였다.

참고문헌

  • 『일성록(日省錄)』
  • 『사계전서(沙溪全書)』
  • 『상변통고(常變通攷)』
  • 『성호사설(星湖僿說)』
  • 『약천집(藥泉集)』
  •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 『임원십육지(林園十六志)』
  • 『한수재집(寒水齋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