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의지(源義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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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실정막부(室町幕府) 4대 장군.

개설

족리의지(足利義持)이다. 대외 관계에서는 본성인 원(源)을 사용하여, 『조선왕조실록』 등에도 모두 원의지(源義持)로 나온다. 실정막부(室町幕府) 3대 장군 의만(義滿)의 적자로 1394년 의지가 아홉 살 때 의만이 양위해 장군직에 올랐다. 그러나 이후에도 의만이 실권을 쥐고 정무를 담당해 의지는 이름뿐인 장군직을 유지하였다. 의만의 만년에는 후계자 문제로 한때 지위가 불안하였던 시기도 있었지만, 1408년 의만이 사망한 뒤 관령(管領) 사파의장(斯波義將) 등의 지지를 얻어 지위를 확고히 하였다. 친정 이후 위험 세력을 제거하고 지방에서의 반란들도 조기에 진압하는 등 의지의 치세 20년간은 실정막부의 기간 중 가장 안정된 시기였다고 일컬어진다.

내용 및 특징

한편 부친의 주요 정책에 대해 반대·폐지의 입장을 취하여, 의만에게 주어졌던 상황(上皇)의 존호를 폐지하는 한편 명으로부터의 ‘일본국왕(日本國王)’ 책봉을 거부하고 명과의 국교를 단절하였다. 이 때문에 명과의 공식 무역인 감합무역이 중단되어 한동안 잠잠하였던 왜구가 다시 창궐하게 되는 원인을 낳기도 하였다.

1423년 적자인 의량(義量)에게 장군직을 양위하고 출가하였다. 그런데 1425년 의량이 급사하였는데, 의량에게는 아들이 없었고 의지에게도 다른 아들이 없어 출가한 채로 다시 정무를 통괄하게 되었다. 이후 의지의 사망 시까지 그는 실질적인 막부의 장군으로 인정되었다. 1428년 후계자가 명확히 정해지지 않은 상태에서 사망하여, 그 뒤 장군직은 의지의 이복동생인 의교(義敎)가 잇게 되었다.

활동 사항

족리의지의 부친인 족리의만은 조선과의 통교 시 ‘일본국왕’의 명의를 사용하였다. 일본국왕의 사신은 의지가 장군직에 오른 1394년 이후에도 계속되는데 이때 사신의 실질적인 파견 주체는 의만이었다. 『조선왕조실록』에 ‘의지’의 이름이 나타나는 것은 4회뿐인데, 그가 보내온 서계에는 ‘일본국원의지’로 적고 왕을 사용하지 않았다. 이것은 대명 관계와도 연계되며, 『조선왕조실록』에도 그러한 의지의 태도에 대하여 적고 있다(『세종실록』 1년 12월 17일). 이렇게 조선과의 통교에서 막부의 장군이 왕을 사용하지 않고 ‘일본국+장군명’의 형식으로 외교문서를 작성하는 형식은 후대 강호막부(江戶幕府)에서도 채용되었다.

그렇지만 이러한 의지의 태도와는 별도로 『조선왕조실록』에는 1411년(태종 11) 일본에서 코끼리를 보내왔을 때는 ‘일본국왕 원의지’라고 기록되어 있고(『태종실록』 11년 2월 22일), 그 외에도 의지의 통치 기간 중 막부 측이 보내온 사신에 대해 여전히 ‘일본국왕의 사신’이라는 용법이 사용되었다. 이때 일본에서 온 사신들에는 승려들이 많았고 또 이들은 종종 조선 측에 대장경을 요청하였다. 1428년(세종 10) 의지의 죽음을 전하며 대장경을 요구한 구주사절의 경우 의지에 대하여 ‘국왕전하(國王殿下)라는 호칭을 사용하고 있는데(『세종실록』 10년 8월 26일) 이를 통하여 의지가 조선 측에 보낸 세계에서와는 상관없이 조선으로 파견된 사절들은 그들의 목적 달성을 위하여 일본국왕의 명의를 사용하였다고도 추측할 수 있다.

참고문헌

  • 國史大辭典編集委員會, 『國史大辭典』, 吉川弘文館, 1999.
  • 伊藤喜良, 『人物叢書-足利義持』, 吉川弘文館, 2008.
  • 早島大祐, 『室町幕府論』, 講談社, 2010.
  • 민덕기,「실정막부시대의 대명(對明) 책봉관계의 성립과 변화」, 『청대사림』 6, 청주대학교사학회, 1994.
  • 한문종, 「조선전기 일본국왕사의 조선통교」, 『한일관계사연구』 21, 한일관계사학회,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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