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가치(源家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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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일본 강호막부의 10대 장군.

개설

1737년 5월 22일에 9대 장군인 덕천가중(德川家重), 종2위전권중납언(從二位前權中納言) 매계통조(梅溪通條)의 딸인 어행방(お幸の方, 至心院)의 장남으로 강호성(江戶城)의 서쪽 성(西ノ丸)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덕천가중의 측실이었다. 1740년에 가치(家治)로 개명하였다. 시호는 준명원전(浚明院殿)이다. 1741년 8월 12일에 관례를 치르고, 종2위권대납언(從二位權大納言)이 되었다. 1760년 4월 1일 가중으로부터 대권을 이양받았으며, 5월 13일 강호본성(江戶本城)으로 옮겨 그해 9월 2일에 정식으로 장군선하(將軍宣下)의 대례를 거행하여 제10대 장군직을 계승하고 정2위내대신(正二位內大臣)에 올랐다.

가계

조부는 8대 장군 덕천길종(德川吉宗)이며, 아버지는 9대 장군인 덕천가중(德川家重)이다. 동생은 덕천중호(徳川重好)이며, 덕천가기(德川家基)·정차랑(貞次郞)이라는 두 아들을 두었는데 모두 요절하여 덕천치제(德川治濟)의 장남인 덕천가제(德川家齊)를 양자로 삼아 장군직을 승계하였다.

활동 사항

일본 강호시대 중기에는 상업자본, 고리대 등이 발달하여 쌀을 중심으로 하는 중농주의적 정책에서 중상주의적(重商主義的) 정책으로 전환되던 시기였다. 덕천가치는 아버지인 가중의 유언에 따라 전소의차(田沼意次)를 중용하여 상업자본을 중시하는 중상주의적 정책을 추진하였기 때문에 덕천가치의 치세는 ‘전소(田沼)시대’라고 불리었다.

전소시대의 주요한 경제정책으로는 동업조합인 주중간(株中間)을 장려하고, 진유좌(真鍮座) 등의 특권을 부여하여 보호하고, 운상금(運上金)·명가금(冥加金)을 세금으로 징수하였다. 또한 재정지출의 보전을 위하여 오문은(五匁銀)·남료이주인(南鐐二朱銀)이라는 새로운 화폐를 주조하여 화폐를 통일함으로써 지금까지 불안정하였던 통화제도를 안정시켰다. 또한 산업을 진흥시키는 방안으로 상업자본의 출자에 의한 인번소(印旛沼)와 수하소(手賀沼)의 개척과 농지개발을 하였다. 신사와 사원·농민·상인들에게 자금을 출자하도록 하여 곤궁한 번에 대부하고, 후에 이자를 붙여 갚도록 하는 정책을 취하였는데, 이러한 정책은 반발에 의하여 좌절되었다.

한편 해외무역으로 눈을 돌려 장기(長崎) 무역을 장려하고, 수출품인 동(銅)이나 표물(俵物) 즉, 대 중국 무역에서 사용되었던 건해삼·건전복·상어지느러미 등의 상품작물을 육성하고 해외 산업과 신기술 도입을 도모하였다. 그리고 『적하이풍설고(赤蝦夷風說考)』를 지은 공등평조(工藤平助) 등의 의견을 들어 아이누인의 거주지인 에조치([蝦夷地]: 현 북해도)의 직할을 계획하고, 막부의 북방 탐사단을 파견하고 러시아와의 교역도 기획하였다.

문화면에서는 부영중기(富永仲基), 석천매암(石田梅岩), 병정천류(柄井川柳), 상전추성(上田秋成) 등 다채로운 사상가와 문학가를 배출하였다. 그러나 이 시기는 천간산(淺間山)의 분화나 소빙기에 의한 기아 문제가 발생하여 민란과 폭동이 빈발하는 등 결코 안정된 시대는 아니었다. 그는 1786년 8월 8일에 사망하고, 양자인 덕천가제(德川家齊)가 장군직을 이어받았다(『정조실록』 10년 10월 6일).

1764년 갑신통신사

대마번(對馬藩)에서는 1760년부터 손위참판사(遜位參判使)를 조선에 파견하여 장군의 교체를 전하였다. 조선이 덕천가중의 퇴임에 관한 연락을 받은 것은 1760년 12월이었다. 조정에서는 곧바로 가치의 장군 취임을 축하하는 통신사 파견에 필요한 예단을 준비는 논의가 이루어지고, 다음 해인 1월 8일에는 동래부가 홍명한(洪名漢)이 장계를 받고 덕천가치의 취임 확인과 곧 건너올 신관백승습고경대차왜(新關白承襲告慶大差倭)에 대비하여 경접위관의 파견을 고려하였다. 통신사의 파견을 정식으로 요청하기 위한 신사청래차왜(信使請來差倭)의 도착이 동래부사에 의하여 보고되고, 경접위관(京接慰官)과 차비역관(差備譯官)의 파견이 허가된 것은 1762년 4월 6일이었다. 이후 8월에 정사에 서명응(徐命膺)을 비롯하여 3사(使)가 임명되었는데, 준비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하면서 정사에는 조엄(趙曮), 부사에는 이인배(李仁培), 종사관에는 김상익(金相翊)으로 삼사의 최종적인 편성은 출발 직전인 2개월 전에야 정해졌다. 통신사는 1763년 8월 3일 한양을 출발하여 이듬해인 2월 16일에 강호(江戶)에 도착하였다(『영조실록』 39년 7월 24일).

막부 장군에게 조선 왕의 국서를 전하는 전명의식(傳命儀式)은 2월 27일에 있었으며, 그해 7월 8일에 한양으로 돌아와서 영조에게 복명하였다(『영조실록』 40년 7월 8일). 1764년 갑신통신사는 강호를 방문한 마지막 통신사이며, 정사조엄은 대마도에서 고구마를 들여왔다.

묘소

현 동경도(東京都) 대동구(台東區)의 관영사(寬永寺).

참고문헌

  • 이원식, 『조선통신사』, 민음사, 1991.
  • 國史大辭典編集委員會, 『國史大辭典』, 吉川弘文館, 1989.
  • 三宅英利, 『近世日朝關係史の硏究』, 文獻出版, 1987.
  • 辻善之助, 『田沼時代』, 岩波文庫, 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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