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정빈(吳廷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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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663년(현종 4)~1710년(숙종 36) = 48세]. 조선 후기 숙종(肅宗) 때의 문신. 예조 좌랑(佐郞)과 만경현감(萬頃縣令) 등을 역임하였다. 자는 흥숙(興叔)이고, 본관은 해주(海州)이며, 거주지는 제주도이다. 아버지는 오현(吳晛)이고, 어머니 제주 고씨(濟州高氏)는 성균관(成均館)전적(典籍)고홍진(高弘進)의 딸이다. 신임(申銋)의 문인이다.

숙종 시대 활동

1687년(숙종 13)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고, 1706년(숙종 32)에 조정에서 암행어사를 파견하여 문무(文武)를 시사(試士)할 때, 오정빈(吳廷賓)이 부(賦)를 지어 바친 것이 뽑혀 별시(別試)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을 받았다.[『숙종실록(肅宗實錄)』숙종 32년 9월 16일, 숙종 33년 1월 21일,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그리고 이듬해인 1707년(숙종 33) 별시(別試)에 응시하여 병과(丙科)에 급제하였다.[『방목(榜目)』] 이어 성균관에 배속되었다가 학유(學諭)학록(學錄), 학정(學正), 저작(著作), 박사(博士) 등을 두루 거쳤다. 승정원(承政院)가주서(假注書)를 겸임하기도 하였는데, 기주(記注)를 함에 있어 어휘가 풍부하고 기록이 민첩하여 주변인들의 칭찬을 받았다. 1709년(숙종 35) 성균관 전적과 승의랑(承義郎)에 오르고 예조 좌랑으로 옮겼다가 춘추관(春秋館)기사관(記事官)을 겸임하였다.[『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1710년(숙종 36) 만경현감으로 나아갔으나, 그 해 겨울에 병이 들어 관사에서 사망하였으니, 향년 48세였다.[『국조인물고』]

성품과 일화

오정빈의 성품과 자질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해진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행동거지와 놀이를 함에 있어 비범함을 보였다. 후에 오정빈의 묘표를 쓴 신임은 아버지 신명규(申命圭)가 영릉(寧陵)의 석역(石役) 감독을 소홀히 하였다는 이유로 1674년(헌종 15) 제주도에 유배되자, 1675년(숙종 1) 아버지를 따라 제주도에 갔다.[『현종실록(顯宗實錄)』현종 14년 11월 3일, 현종 5월 11일, 『국조인물고』] 그리고 제주도 대정현(大靜縣)의 촌사(村舍)에 세들어 살았는데, 하루는 어떤 객(客)이 한 아이를 데리고 동쪽으로부터 와서 ‘정의현의 오모(吳某)’라는 작은 명함을 주었다. 그래서 신임이 불러들여 이야기를 나누어보았는데, 그가 “제 자식 아무개인데, 나이 이제 13세 먹은 아이로서 경사(經史)의 전적을 배우는 데 조금 능합니다. 그러나 남쪽 바다 끝의 황폐한 곳에 살고 있어 견문이 좁고 학식이 천박하니, 인도하고 도와주어 재목을 만들어 주시길 바랍니다.”라고 청하였다. 그 말이 매우 간절하고 지극하여 신임이 이를 거절할 수가 없어 제주에서 사는 동안 그 아이를 가르쳤고, 그 아이가 바로 오정빈이었다.[『국조인물고』]

한편 그가 문과에 급제하자, 그가 살던 정의현에서는 일찍이 과거에 급제한 사람이 없었으므로, 고을 사람들이 그를 매우 자랑스럽게 여겼다.[『국조인물고』]

묘소와 후손

그를 선산에 모셨다는 기록은 있으나 선산의 위치는 현재 알 수 없으며, 신임이 쓴 묘표가 전해진다.

부인은 대정현(大靜縣) 사람 강두현(姜斗炫)의 딸이며, 자식이 없어 동생 오정신(吳廷臣)의 아들을 데려다 후사로 삼았다. 측실(側室)에게서 유복(遺腹)의 딸이 있었으나 태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요절하고 말았다.[『국조인물고』]

참고문헌

  • 『현종실록(顯宗實錄)』
  • 『숙종실록(肅宗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사마방목(司馬榜目)』
  • 『북헌집(北軒集)』
  • 고창석, 「조선후기 만경현감을 지낸 제주인 오정빈」, 『한국인물사연구』12, 한국인물사연구소,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