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해부(寧海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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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 지역을 중심으로 편성되었던 조선시대의 관청이자 행정구역.

개설

영해부(寧海府)는 삼국시대의 우시군(于尸郡)에서 기원한다. 신라 경덕왕 때 유린군(有隣郡)으로 개명하여 한 곳의 영현(領縣)을 거느렸다. 고려시대에는 예주(禮州)로 개명하고 방어사(防禦使)가 파견되었다. 이후 덕원소도호부(德原小都護府)와 예주 등으로 개칭되었다가, 1310년(고려 충선왕 2)에 영해부가 되었다. 조선시대에도 영해부로 이어졌으며, 1413년(태종 13)에 영해도호부가 되었다. 1683년(숙종 9)에는 영양현(英陽縣)이 분리·독립했으며, 1895년(고종 32)에 영해군이 되었고, 1914년에 영덕군에 병합되었다. 조선시대에 영해부는 현재의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 지역을 중심으로 편성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영해부는 삼국시대의 우시군에서 기원한다. 신라 경덕왕 때 유린군으로 개명하였고, 고려초기에 예주가 되었다. 1018년(고려 현종 9)부터 방어사를 파견하기 시작하였다. 1259년(고려 고종 46)에 덕원소도호부로 승격하였다가 이후에 예주목이 되었다. 1310년(고려 충선왕 2)에 영해부가 되어 조선시대로 이어졌다. 1397년(태조 6)에 처음으로 진(鎭)을 두고 병마사(兵馬使)가 영해부사를 겸임하였다. 1413년에는 영해부를 영해도호부로 고치고 도호부사(都護府使)가 파견되었다.

조직 및 역할

영해부는 신라 경덕왕 때 9주 중 명주(溟州) 경내의 유린군으로 편성되어 해아현(海阿縣: 현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청하면)을 영현으로 거느렸다. 당시 유린군에는 지방관으로 군태수(郡太守)가 파견되었다. 고려시대에 영해부는 여러 차례 읍격(邑格)의 변화가 있었다. 1018년에 예주방어사, 1259년(고려 고종 46)에 덕원소도호부, 이후 예주목, 1310년에 영해부 등으로 변동이 있었지만, 모두 지방관이 파견되었다. 『고려사(高麗史)』「지리지」에는 영해부에 6개의 고을이 소속된 것으로 기록되었다. 고려시대 영해부에는 읍사(邑司)가 설치되어 토착의 향리(鄕吏)들이 자치적으로 지방 행정업무를 수행하였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들어서 향리의 권한과 지위는 약화되고 영해부사에게 모든 권한이 집중되었다.

『경국대전(經國大典)』과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영해부에는 종3품의 도호부사와 종6품의 교수(敎授)가 파견되었다. 18세기에 편찬된 지리서인 『여지도서(輿地圖書)』에 의하면 영해부에는 3품의 문관(文官)이 도호부사로 임명되며, 좌수(座首) 1명, 별감(別監) 2명, 군관(軍官) 11명, 인리(人吏) 31명, 지인(知印) 16명, 사령(使令) 17명, 관노(官奴) 21명, 관비(官婢) 16명이 편성되었다. 『대전회통(大典會通)』에도 영해에는 종3품의 도호부사가 임명된다는 내용이 있다.

변천

1413년에 영해도호부로 개편한 이후 한동안 영해부와 관련하여 연혁에서 별다른 변동은 없다. 1676년(숙종 2)에 영해의 소속이던 영양이 분리되어 별도의 고을이 되었으나(『숙종실록』 1년 9월 23일), 1677년(숙종 3)에 영양을 폐지하고 다시 영해에 소속시켰다(『숙종실록』 3년 4월 9일). 하지만 1683년에 영양현은 다시 영해에서 분리되었다(『숙종실록』 7년 7월 17일) (『숙종실록』 8년 1월 15일). 1895년에 전국을 23부로 나누었을 때 영해군이 되어 안동부(安東府)의 관할에 속했다. 1896년(고종 33)에 13도제가 실시되면서 영해군은 경상북도 관할의 4등군으로 편제되었다. 그러나 영해군은 1914년에 일제가 지방 행정구역을 개편할 때 영덕군에 병합되었다. 조선시대에 영해부의 관아는 현재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 성내리에 위치하였다.

참고문헌

  • 『삼국사기(三國史記)』
  • 『고려사(高麗史)』
  • 『경국대전(經國大典)』
  • 『대전회통(大典會通)』
  • 『경상도지리지(慶尙道地理志)』
  • 『대동지지(大東地志)』
  • 『신구대조조선전도부군면리동명칭일람(新舊對照朝鮮全道府郡面里洞名稱一覽)』
  • 『여지도서(輿地圖書)』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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