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춘헌(迎春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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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경궁에 있던 왕의 서재.

개설

영춘헌(迎春軒)은 창경궁의 북쪽, 양화당(養和堂)의 동쪽에 있는 침전 건물이다. 언제 건립되었는지는 확인되지 않지만 정조대 이후 주로 왕의 서재로 사용되었으며, 양화당이 정무를 보는 편전으로 사용될 때는 그 부속채였다(『정조실록』 18년 12월 25일). 현존하는 영춘헌은 1834년(헌종 즉위)에 중건된 건물로 수리·보수되면서 이어져 내려 온 것이다.

위치 및 용도

창경궁의 북쪽에 있는 침전 건물로 정조 이후 왕들의 서재로 사용되었다.

변천 및 현황

영춘헌의 건립 시기는 정확하지 않지만 집복헌(集福軒)과 함께 숙종대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영춘헌을 가장 많이 이용한 인물은 정조이다. 정조는 동궁 시절에 창경궁의 구 홍문관(弘文館) 자리인 감인소(監印所)에서 즐겨 읽던 주자(朱子)의 글을 편집하여 『주서백선(朱書百選)』을 인쇄하였다. 정조는 영춘헌이 감인소에서 가까워 편리하다는 이유로 주로 이곳에 머물렀으며, 이때부터 영춘헌이 서재 기능을 하게 되었다(『정조실록』 18년 12월 25일). 이처럼 정조가 자주 머무는 공간인데도 건물이 격식을 갖추지 못하자 1796년(정조 20)에 정리당상(整理堂上)인 이시수(李時秀)가 개수할 것을 청했다. 이에 대하여 정조는 영춘헌이 옛 건물에 처마만 달아 쓰기 때문에 서까래의 경사가 낮아 빗물이 새는 것이니 고치지 말라며 도배도 간단히 하도록 했다(『정조실록』 20년 6월 16일).

영춘헌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던 정조는 이곳에서 승하하였다(『정조실록』 24년 6월 28일). 이에 당시 왕대비였던 정순왕후(貞純王后)가 영춘헌을 빈전(殯殿)으로 하라는 명을 내렸지만 원상(院相)이 비좁다고 하자 환경전(歡慶殿)으로 옮겨 빈전을 꾸미도록 하였다(『정조실록』 24년 6월 29일).

영춘헌은 1830년(순조 30) 8월 1일 오시(午時)에 환경전에서 발생한 화재로 다른 전각들과 함께 전소되었다가(『순조실록』 30년 8월 1일) 1834년에 창경궁의 내전을 복구하면서 중건되었다. 이때 현판은 봉조하(奉朝賀)남공철(南公轍)이 썼다.

재건된 영춘헌은 헌종의 사랑을 받았다. 정조를 닮고자 했던 헌종은 중건된 영춘헌을 정조처럼 서재로 활용했다. 소대(召對)와 야대(夜對)하며 경서 강독을 하는 건물로 활용했고, 몸이 좋지 않을 때도 영춘헌에 머물면서 치료를 받았다. 고종도 마찬가지로 영춘헌에서 대신(大臣) 및 과거에 합격한 유생들과 더불어 경서를 강독하였다.

형태

「동궐도(東闕圖)」에 그려진 영춘헌은 집복헌의 동남쪽에 있지만 전면 공간은 담장으로 구획되어 별개의 영역을 형성하였다. 넓은 대청 좌우에 온돌을 두고 뒤쪽으로 건물이 이어져 ㅁ자 형태였다. 그런데 1834년에 중건된 영춘헌은 이전과 달리 집복헌과 지붕이 이어져 ㅁ자 마당이 중첩되게 배치되었다. 현재는 주변 부속 건물이 모두 사라져 전면은 공터이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일성록(日省錄)』
  • 『궁궐지(宮闕志)』
  • 『내각일력(內閣日曆)』
  • 『홍재전서(弘齋全書)』「동궐도(東闕圖)」「동궐도형(東闕圖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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