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서도(迎曙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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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경기도 양주·고양·파주·장단·개성·덕풍 지역에 설치된 역을 관할하던 역도.

개설

영서도(迎曙道)는 조선시대에 도원도(桃源道)·중림도(重林道)·양재도(良才道)·경안도(慶安道)·평구도(平丘道)와 함께 경기도에 설치된 역도(驛道) 가운데 하나였다. 고려시대의 산예도(狻猊道)와 청교도(靑郊道)에 속한 일부 역, 그리고 그 외에 벽제역(碧蹄驛)·중련역(中連驛)·초현역(招賢驛)이 세종대에 경기우도 정역찰방(程驛察訪)으로 개편되었고, 세조대에는 세 차례의 개편을 거치면서 영서도가 설치되고 여기에 기존의 초현역이 빠지면서 총 7개 역이 영서도 관할이 되었다. 본역은 양주 영서역으로, 종6품의 찰방이 파견되어 역무를 관할하였다.

내용 및 특징

조선전기 세종대에 전국적으로 역로를 조직하면서 고려시대 산예도의 산예역(狻猊驛), 청교도의 영서역(迎曙驛)·청교역(靑郊驛)·통파역(通坡驛)·마산역(馬山驛), 그리고 그밖에 벽제역·중련역·초현역이 경기우도정역찰방으로 개편되었는데, 경기우도정역찰방은 세조대에 이르러 대폭적인 역제 개편이 단행되면서 영서도로 계승되었다. 이때 장단의 초현역이 빠지면서 총 7개 역이 영서도 관할이 되었다. 황해도의 금교도(金郊道), 평안도의 대동도(大同道)로 이어지는 의주로(義州路)에 속하는 역도로, 영서도의 관할 범위는 한양에서 고양-파주-장단-개성-풍덕으로 이어졌다. 영서도 소속 역 중 영서·벽제·마산·동파·청교·산예역은 대로(大路), 중련역은 소로(小路)에 해당되었다.

영서도는 양재도·평구도와 더불어 전국의 모든 길이 모이는 요로(要路)이기 때문에 찰방을 임명하는 데도 신중을 기하고 경직(京職)을 겸차(兼差)하게 하는 등 관등(官等)이 높고 사무를 잘하는 인원을 택하여 보냈다(『성종실록』 3년 12월 3일) (『성종실록』 10년 윤10월 18일) (『성종실록』 10년 윤10월 22일).

변천

조선후기의 실학자인 유형원(柳馨遠)은 1670년(현종 11)에 완성한 『반계수록(磻溪隧錄)』에서, 역의 설치 기준에 따른 역의 이설과 개편 방향과 함께 역졸의 왕래나 사신 및 여행객의 접대를 위해 역 사이의 거리를 참고하여 찰방의 증감을 조정할 것을 제안하였다. 경기도의 경우에는 영서도를 폐지하여 벽제도(碧蹄道)를 신설하고 도원도를 폐지하여 그 소속 역은 벽제도와 신설한 녹양도(綠楊道)에 분속시키며, 평구도 속역의 녹양(綠楊)·안기(安奇)·양문역(梁文驛)을 신설한 녹양도에, 양재도 속역인 동화(同化)·해문역(海門驛)은 중림도로 이속하고, 중림도에 인덕역(仁德驛)을 새로 설치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영서도 폐지안은 실제로 이행되지는 못하였다.

1864년(고종 1)에 편찬된 『대동지지(大東地志)』에는 영서도에 속한 산예역과 중련역은 이미 혁파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1896년(건양 1) 1월에 대한제국 칙령 제9호 ‘각 역 찰방 및 역속 폐지에 관한 건’에 따라 폐지되었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경국대전(經國大典)』
  • 『대전회통(大典會通)』
  • 『대동지지(大東地志)』
  • 조병로, 『한국근세 역제사연구』, 국학자료원,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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