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복당(永福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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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궁 함녕전의 동편에 있는 침전이자 황귀비 엄씨의 처소.

개설

영복당(永福堂)은 삼축당(三祝堂), 복녕당(福寧堂), 광화당(光華堂) 등과 함께 고종의 후궁이 거처하는 건물이었다. 후궁 처소 가운데 영복당의 규모가 가장 컸다. 덕수궁의 정침으로 건립된 함녕전(咸寧殿)에는 고종이 거처하였으며, 함녕전 동쪽에 가까이 자리 잡은 영복당은 황귀비(皇貴妃) 엄씨(嚴氏)를 위한 공간이었다. 함녕전의 동행각에는 응춘문(凝春門)을 두어 영복당으로 통하도록 하였다.

1904년(광무 8)에 함녕전에 일어난 화재로 인하여 즉조당(卽阼堂)과 석어당(昔御堂)을 비롯하여 경운궁의 많은 전각이 불탔다(『고종실록』 41년 4월 15일). 이때 영복당도 소실되었으나, 다른 전각들과 함께 재건되었다. 이때의 건축 기록은 『경운궁중건도감의궤(慶運宮重建都監儀軌)』를 통해 남겨졌으며, 영복당의 건축 과정을 알 수 있다. 1904년 12월에 터 닦는 공사를 시작하여 1905년(광무 9) 7월 10일에 현판을 달아 공사를 마쳤다.

위치 및 용도

영복당은 함녕전의 동쪽에 있으며 남향하였다. 영복당의 북쪽에는 삼축당이 있으며, 동쪽에는 경선당(慶善堂)과 복녕당이 있다. 이들은 모두 고종의 후궁을 위한 처소로 사용되었다.

변천 및 현황

1897년(고종 34) 2월에 고종이 경운궁에 임어하였다. 러시아 공사관에서부터 고종을 모시던 엄씨는 1897년 10월 20일에 왕자 이은(李垠)을 낳고 귀인으로 책봉되었다. 이때부터 영복당은 귀비엄씨를 위한 공간이 되었다. 이후 귀비엄씨는 1900년(광무 4)에 순빈(淳嬪)이 되고, 1901년(광무 5)에 비(妃)가 되었으며, 1903년(광무 7)에 황귀비로 책봉되었다. 황후의 자리가 비어 있는 상황에서 황귀비의 위치는 매우 중요했다. 1904년에 화재 이후 영복당을 재건할 때도 황귀비의 거처이므로 다른 후궁의 처소보다 규모 있게 조성되었다.

1911년 7월 20일에 순헌귀비(純獻貴妃) 엄씨가 즉조당에서 훙거하여 흥덕전(興德殿)을 빈궁(殯宮)으로 삼고, 1911년 8월 2일에 영복당을 혼궁(魂宮)으로 정하고 궁호를 덕안궁(德安宮)이라 했으며, 순헌귀비 엄씨의 신주를 봉안하였다(『순종실록부록』 4년 7월 27일). 1932년에 덕수궁을 개방하여 공원으로 계획하기 시작하였으며, 이 무렵에 영복당이 철거되었다.

형태

『경운궁중건도감의궤』에 영복당의 도설이 있다. 영복당은 정면 7칸, 측면 3칸 규모이며 뒤로 2칸이 달려 있다. 정면 3칸에 마루를 두고, 동쪽 1칸이 온돌방이고, 서쪽에는 2칸 온돌에 반 칸의 퇴가 붙어 있다. 정면의 형태가 비대칭적이며, 마루 가운데 칸에 영복당의 현판이 걸렸다.

건물의 구조는 1고주 5량가이며 기둥 상부에는 익공을 형성하였다. 지붕은 팔작지붕으로 구성하고 겹처마를 두었다.

참고문헌

  • 『경운궁중건도감의궤(慶運宮重建都監儀軌)』
  • 『순헌귀비빈궁혼궁의궤(純獻貴妃殯宮魂宮儀軌)』「경운궁중건배치도(慶運宮重建配置圖)」「덕수궁지도(德壽宮地圖)」
  • 문화재청, 『덕수궁복원정비기본계획』, 문화재청,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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