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호(鹽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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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말, 소금 전매제 하에서 신역으로 소금 생산에 종사했던 이나 조선후기 소금 생산에 종사하는 이를 통칭하던 말.

개설

고려시대의 염호는 충선왕대 소금 전매제 시행 이후 국가에서 차정하여 소금 생산을 신역으로 담당하던 자들이었다. 이들은 조선건국 이후 염간으로 호칭이 바뀌었다. 이후 소금 생산이 신역제와 별개로 운영되면서, 염호라는 호칭은 소금을 생산하는 사람들에 대한 통칭으로 사용되었다.

내용 및 특징

고려 충선왕 이전에는 전국 각 도에 산재한 염분을 국가에서 장악하지 못하고 염업에 종사하는 일부에게 일정한 액수의 세금을 거두었다. 당시 염분은 권세가나 사찰에서 대부분 소유하고 있었다. 그런데 1308년(충선왕 1) 소금에 대한 국가의 전매권을 확립하여 개인이 소유한 염분을 모두 국유화하고, 소금의 교환 비율을 정하여 국가에서 소금 판매도 관할하였다. 그리고 사사로이 염분을 설치하거나 소금을 거래하는 자를 엄하게 다스렸다. 이와 함께 각 군현에서 소금 생산을 신역으로 하는 염호를 차정하였다. 이들 염호에는 정원이 있었고, 이들이 생산하여 국가에 납부해야 하는 소금의 양도 정해져 있었다. 그리고 염호로 지정된 경우 그 역은 대대로 세습되었다.

변천

하나의 신역으로 소금 생산에 종사하던 염호들은 조선건국 이후 염간(鹽干)으로 명칭이 바뀌어 계속 존재하였다. 염간은 신량역천(身良役賤)의 하나였다. 따라서 염간도 염호와 마찬가지로 그 역을 세습하였으며, 또 신분상으로는 양인이었지만 천역을 부담하였기 때문에 벼슬길에 나아갈 수 없었다. 특히 염간이 생산하여 납부하는 소금이 국가 재정에 차지하는 비중이 컸기 때문에, 대부분의 신량역천인이 일반 양인과 구분이 없어진 태종대 이후에도 염간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그러다가 세조대 이후에는 일반 양인과 구별이 거의 없어지면서 염간이라는 명칭이 염부(鹽夫)로 바뀌었다. 이후 염호는 소금을 생산하여 일정액의 소금을 납부하는 신역을 지닌 자라는 개념은 사라졌고, 소금을 생산하는 자들에 대한 통칭으로 사용되었다.

참고문헌

  • 유승원, 『조선초기신분제연구』, 을유문화사, 1987.
  • 강순길, 「충선왕의 염법 개혁과 염호」, 『한국사연구』 48, 한국사연구회, 1985.
  • 권영국, 「14세기 각염제의 성립과 운용」, 『한국사론』 13, 한국사학회,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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