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씨향약언해(呂氏鄕約諺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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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8년(중종 13) 주자(朱子)가 첨삭 및 주석을 한 『여씨향약(呂氏鄕約)』을 김안국(金安國)이 언해와 증손(增損)하여 간행한 책으로, 원래 서명은 『주자증손여씨향약언해(朱子增損呂氏鄕約諺解)』.

개설

『여씨향약언해(呂氏鄕約諺解)』는 신진사류의 한 사람인 김안국이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로 있을 때, 도민의 교화 및 향속(鄕俗)을 바르게 하기 위한 목적으로 간행하였다. 이 책은 『정속언해(正俗諺解)』와 마찬가지로 원전의 한문에 차자(借字)로 구결(口訣)을 달고, 한글로 언해하는 구성을 가지고 있다.

편찬/발간 경위

1517년(중종 12) 경상도관찰사로 파견된 김안국은 각 향교에 백성의 교화 및 향속을 바르게 하고자 『소학(小學)』을 적극 권장하였다. 이 과정에서 『농서언해(農書諺解)』·『잠서언해(蠶書諺解)』·『이륜행실도언해(二倫行實圖諺解)』·『정속언해』 등과 함께 『여씨향약언해』를 언해서로 편찬하여 널리 보급하였으며, 향약을 시행하도록 하여 교화사업에 힘썼다.(『중종실록』 13년 6월 19일)

서지 사항

총 1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세로 31.4cm, 가로 20.3cm이다. 지질은 한지이다.

국립중앙도서관, 서울대학교 도서관, 고려대학교 화산문고, 일본 존경각문고, 세종대왕기념사업회 등에 소장되어 있다.

『여씨향약언해』 현재 많은 이본이 전하는데, 원간본으로 추정되는 책은 일본 동경의 손케이문고본[尊經閣文庫本]이다. 이 책은 1책으로 된 목판본으로 후쇄본(後刷本)인데, 판식과 언해의 정서법과 어휘 등으로 보아서 가장 오랜 책이다.

이보다 늦은 이본은 간행년 미상의 을해자본(乙亥字本)인 고려대학교 화산문고본(華山文庫本)과 서울대학교 도서관 일석문고본인 1574년(선조 7) 간행의 을해자본과 그 복각본들이다. 이들은 언해는 물론이고 원전의 한자까지도 차이를 보인다.

구성/내용

『여씨향약』은 송(宋)나라 학자 여대충(呂大忠) 등 여씨(呂氏) 형제가 쓴 것으로 전해지는데, 『여씨향약언해』에서는 여대충의 막냇동생인 여대림(呂大臨)의 저작이라고 주석하고 있다. 본시 여대충은 여대방(呂大防)·여대균(呂大鈞)·여대림과 함께 4형제였는데, 모두 장재(張載)와 정이(程頤)에게 배워 도학으로 이름이 높았다. 특히 여대림은 정문 4선생(程門四先生)의 하나로 일컬어질 정도였다. 『여씨향약』은 어느 한 사람이 아니라, 4형제가 다 저작에 관여하였다고 할 것이다. 저작연대는 미상이나, 그들의 생존연대인 11세기 후반기에 이루어졌다.

한편 향약은 남송(南宋)에서 널리 시행되었는데, 이는 주희(朱熹)가 본문에 손질을 하고 주석을 붙인 『주자증손여씨향약』의 영향 때문으로 전해진다. 이 책이 우리나라에 전래된 시기는 고려말·조선초 주자학이 유입되면서 『주자대전(朱子大全)』이 들어오게 되었을 때이다. 그 뒤에 『주자대전』이 우리나라에서 간행되었기 때문에 꽤 알려졌을 것인데, 그것이 높이 평가되고 널리 보급된 것은 중종(中宗) 때 조광조(趙光祖)를 비롯한 신진사류가 그것을 전국적으로 철저히 시행시키고, 또 그 언해서가 그 때 간행되면서였다.

김안국은 조선시대 문신이며 학자로서 조광조·기준(奇遵) 등과 함께 김굉필(金宏弼)의 문인으로 도학에 통달하며 지치주의(至治主義) 사림파의 선도자로 부각되었다. 1503년(연산군 9)에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에 등용되었으며, 이어 박사(博士)·부수찬(副修撰)·부교리(副校理) 등을 역임하였으며, 1507년(중종 2)에는 문과중시에 병과로 급제, 지평(持平)·장령(掌令)·예조 참의(參議)·대사간(大司諫)·공조 판서(判書) 등을 지냈다가, 1517년 경상도관찰사로 파견되었다.

중종 대에 조광조 등이 처음 시행한 향약은 훈구 대신의 비리를 시정하기 위해 그들과 연결된 지방 토호들의 향권을 빼앗아 정치 이상을 실현하고자 하는 데 목적을 두고 있었다. 조선 시대 유교 윤리가 민간에 널리 보급된 것은 향약에 힘입은 바가 컸지만, 지방 사림들의 지위를 강화하여 백성들의 삶을 구속한 것 또한 향약이었다. 지방의 유력한 사림은 향약의 간부인 약정(約正) 등에 임명되었고, 일반 농민들은 이에 어쩔 수 없이 자동적으로 구성원에 포함되었다. 그 결과 사림들은 농민에 대하여 중앙에서 임명된 지방관보다도 더 강한 지배력을 행사하면서 그들의 사회적 기반을 굳혀 갔다.

김안국이 붕우유신(朋友有信)과 장유유서(長幼有序)를 강조하는 『이륜행실(二倫行實)』을 널리 보급한 것도 향촌 질서의 안정을 목표로 한 것이었다. 16세기 후반에 향약이 정착됨에 따라 관과 민으로 구분되던 이전까지의 계급관계는 사족과 하인(평민과 노비)이 대응하는 새로운 계급질서를 고착화시키는 계기를 만들었다. 이는 경제적으로 볼 때 지주와 소작인의 관계가 정착되어가는 추세와 서로 맞물려 있었다. 원래 예로부터 죽은 사람의 장례를 서로 도와주고, 종교적 축제를 같이 하며 농사일을 도와주는 공동체 조직을 두고, 이를 ‘두레’, ‘향도’, ‘사’, 혹은 ‘계’라고 했다. 향약은 그 공동체의 규모를 줄이고, 삼강오륜의 도덕규범을 따르지 않는 자를 재판해서 벌을 주거나, 마을에서 쫓아내기도 해 축제적 성격보다는 교화와 통제의 성격을 강하게 띠었다.

이런 상황에서 간행된 『여씨향약언해』는 원전에 충실하지만, 간혹 본문과 주석을 뒤섞거나 중복된 원전을 줄인 부분도 있다. 또 원전에도 없는 협주를 많이 달았다. 원전을 정확히 익히기 위한 경서언해와는 달리, 원전의 내용을 쉽게 이해시켜 향약을 정착시키는 것에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책은 방점과 ‘ㅿ, ㆁ’ 등이 모두 나타나는 중세어자료로서, 또 구결표기의 차자로서 국어사연구에 가치가 있다. 특히 원간본이 지방에서 이루어진 점과 임진란 이전에 적어도 두 번 중간된 점에서 이들을 비교하여 중세어 말기에 일어난 정서법과 어휘의 변천을 볼 수 있으므로 그 가치는 크다. 한편 우리나라 향약의 시행에 이바지한 점에서 향약연구에도 귀중한 자료가 된다.

현재 많은 이본이 전하는데, 이들은 언해는 물론이고 원전의 한자까지도 차이를 보인다. 가령 손케이문고본은 모음으로 시작하는 조사 앞 명사의 말자음을 '사믈', '문늬' 등과 같이 이중으로 표기한 데 대하여 다른 이본은 한 번만 적은 것 등이다. 원전인 한문도 손케이문고본과 1574년판이 크게 다르고 화산문고본이 중간 위치에 있다. 한문의 차이를 보면 1574년판이 가장 세심한 교정을 거쳐 이루어진 것으로 난상에 주석까지 달아놓았다. 그러므로 손케이문고본, 화산문고본, 1574년판과 그 복각본의 순으로 간행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참고문헌

  • 『중종실록(中宗實錄)』
  • 박종국, 『한국어 발달사』, 세종학연구원, 1996.
  • 방종현, 「주자증손여씨향약(朱子增損呂氏鄕約)」, 『일사국어학논집』, 민중서관, 1963.
  • 안병희, 「여씨향약언해(呂氏鄕約諺解)의 원간본(原刊本)에 대하여」, 『학술원논문집』14, 인문사회과학편, 학술원, 1975.
  • 최현배, 『한글갈』, 정음사, 19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