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재역벽서지변(良才驛壁書之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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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7년(명종 2) 서울 양재역에서 발생한 벽서 사건.

개설

1545년(명종 즉위)에 소윤으로 일컬어진 윤원형(尹元衡)이 윤임(尹任) 중심의 대윤 일파를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하였으나, 여전히 대윤의 잔존 세력과 그들을 따르는 사림 세력이 정계에 남아 있었다. 이에 소윤 세력들은 이들 잔존 세력을 모두 제거하고자 하였는데, 그때 이들이 일으킨 것으로 추정되는 것이 양재역 벽서 사건이다.

역사적 배경

중종에게는 제1계비인 장경왕후(章敬王后) 윤씨(尹氏)가 낳은 아들(인종)과 제2계비인 문정왕후(文定王后) 윤씨가 낳은 경원대군(慶原大君)이 있었다. 인종은 외숙부인 윤임의 정치적 후원을 받고 있었고, 경원대군은 문정왕후의 동생인 윤원형의 비호를 받고 있었다. 윤원형은 경원대군을 세자로 책봉하고자 했으나 윤임의 견제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서로 대립하는 형세가 되었다. 그리하여 윤임 계열을 대윤이라 하고 윤원형 일파를 소윤으로 칭하였다. 왕위 계승과 관련되어 대윤과 소윤의 입장이 갈리자 조정의 신하들도 이들을 중심으로 양분되었다.

중종 사후 세자로 책봉되어 있던 인종이 왕위를 계승하여 자연스럽게 윤임 일파가 정권을 장악하였다. 인종은 이언적(李彦迪) 등 사림의 명사를 신임하고 적극 등용하여 조정은 기묘사화 이후 다시 사림 세력들이 중앙 정계에 진출하는 형세가 갖추어졌다. 정권을 장악한 대윤들은 윤원형의 형인 윤원로(尹元老)를 탄핵하여 귀양 보내는 것을 시작으로 소윤 계열에 대한 정지 작업에 착수하였다.

그러나 인종이 병을 얻어 재위한 지 8개월 만에 죽자 정국은 급변하였다. 인종의 동생이었던 경원대군이 당시 12세의 나이로 왕위에 오르고 모든 정국의 중심은 자연스럽게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게 된 문정왕후에게 집중되었다. 결국 대윤의 소윤에 대한 공세도 멈추게 됨과 동시에 상황이 역전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윤원형은 윤임·유관(柳灌)·유인숙(柳仁淑)에게 원한을 가지고 있던 정순붕(鄭順朋)·이기(李芑)·임백령(林百齡) 등을 동원하여 계책을 꾸미고, 동시에 자신의 첩 난정을 문정왕후에게 보내 대윤 일파가 역모를 꾀하고 있다고 무고하였다. 이로 인해 1545년 8월 하순 을사사화(乙巳士禍)의 대옥사가 발생하여 윤임·유관·유인숙·이휘(李輝)·이덕응(李德應) 등 수십 명이 죽고, 이들을 따르던 많은 사림 세력들이 유배를 당했다. 이후 소윤 일파는 위사공신(衛社功臣) 28명, 원종공신(原從功臣) 1,400명이 책록되면서 공신의 주축에 있었던 외척 윤원형과 이기를 중심으로 하는 정국 운영 체제의 기반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소윤 세력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을사사화 때 살아남은 대윤 일부 세력과 사림 세력들을 모두 척결하여 자신들의 안정된 정권을 만들기 위해 양재역 벽서 사건을 일으켰다.

발단

1547년(명종 2) 9월 양재역 벽서 사건이 발생하였다. 척신 계열의 부제학정언각(鄭彦慤)은 시집가는 딸을 전송하기 위해 한강 건너 양재역까지 나왔다가 양재역의 역관(驛館) 벽에 붉은 글씨로 붙은 벽서를 보고 이를 봉투에 넣어 봉하여 곧바로 명종에게 올렸다. 익명서는 발견 즉시 불사르고 전파해서는 안 된다고 규정되어 있으나 그가 이를 어기고 명종에게 익명서를 그대로 올린 것은 국가에 관계된 내용이며 인심이 이와 같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라고 하였다. 벽서에는 "여주(女主)가 위에서 정권을 잡고 이기 등이 아래에서 권세를 농간하고 있으니 나라가 장차 망할 것을 서서 기다리게 되었다. 어찌 한심하지 않은가. 중추월 그믐날."이라고 적혀 있었다(『명종실록』 2년 9월 18일). 이 글에서 여주는 물론 문정왕후를 가리키는 것이며, 위사공신 이기 등의 정권 농단에 대하여 비난하면서 나라가 망할 것이라고 언급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경과

벽서가 명종에게 보고된 이후 윤원형·윤인경·이기·정순붕 등은 벽서의 진위나 주모자에 대한 체포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들은 조정에서 "요즈음 훈신(勳臣)을 가리켜 공이 없는 자들이라 하고, 오히려 죄인들이 억울한 죽음을 당했다는 사악한 여론이 떠돌고 있다"(『명종실록』 2년 9월 18일) (『명종실록』 2년 9월 19일)고 하면서 을사사화의 남은 죄인들을 엄히 다스릴 것을 요구하였다. 이는 양재역 벽서 사건을 매개로 하여 을사사화 때 남은 사림들과 윤임 세력을 완전히 제거하고자 한 것이다. 이것은 사회 여론을 왕에게 알린다는 명분으로 벽서를 공개했으나 실질적으로는 정치 여론을 형성하기 위한 목적에서 계획적으로 추진된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그 결과 중종의 아들인 봉성군(鳳城君) 이완(李岏)을 비롯하여 송인수(宋麟壽)·이약빙(李若氷)·임정수(林亨秀) 등을 사사(賜死)하고 이언적 등 30여 명을 유배형 이상에 처하였다(『명종실록』 2년 9월 18일) (『명종실록』 2년 9월 19일). 결국 정언각은 양재역에 나붙은 벽서를 명종에게 올려 나라의 인심이 이와 같으니 을사사화의 남은 잔당들을 모두 제거해야 왜곡된 여론이 떠돌지 않을 것이라고 하면서 그가 당초 목적했던 방향으로 논지를 이끌어 간 것이다(『명종실록』 2년 9월 19일).

이 사건에 대하여 조정에서는 양재역찰방 배수광(裵繡光)이 역관 근처에서 배회하던 몇 사람의 이름을 올리자 그들을 곧 추문하는 자세를 취하였다. 그러나 대부분이 글도 모르는 사람들이라 놓아주었을 뿐(『명종실록』 2년 9월 20일) 주모자 체포를 위한 또 다른 조치는 취하지 않았다. 조정의 관리들도 주모자 체포를 주장하는 사람이 없었으며, 오직 을사사화로 인해 죄를 받은 사람들에게 형벌을 더 가중할 것만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정황으로 볼 때 양재역의 익명서는 이기 등이 을사사화의 잔당들을 제거하고, 자신들의 정치 기반을 보다 확고히 하기 위하여 일으킨 사건으로 추정된다. 익명서 사건의 처리 과정과 결과가 이와 같은 방향에서 추진되고 맺어진 것을 통해서도 추론이 가능하다. 더 나아가 당시의 사람들 가운데서는 익명서가 그것을 발견하여 중앙에 보고한 장본인인 정언각 자신이 지은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던 것으로 보아(『명종실록』 11년 8월 23일) 을사사화를 일으킨 주도 세력인 소윤 일파의 소행일 가능성이 더욱 많다고 할 것이다.

참고문헌

  • 이상배, 『한국중근세정치사회사』, 경인문화사, 2003.
  • 이상배, 「조선시대 정치커뮤니케이션으로서의 익명서」, 『문화와 소통의 사회사』, 한국사회사학회,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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