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자징(梁子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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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23년(중종 18)~1594년(선조 27) = 72세]. 조선 전기 선조(宣祖) 때의 문신. 거창현감(居昌縣監)과 석성현감(石城縣監) 등을 지냈다. 자는 중명(仲明)이고, 호는 고암(鼓巖)이다. 본관은 제주(濟州)이고, 거주지는 전라도 담양(潭陽)이다. 아버지는 소쇄옹(瀟灑翁)양산보(梁山甫)이고, 어머니 광산 김씨(光山金氏)는 호조 정랑(正郞)김후(金珝)의 딸이다. 김인후(金麟厚)의 문인이자 사위이다.

선조 시대의 활동

선조가 경외(京外)의 유일지사(遺逸之士)를 천거하라는 명을 내리자 고을 사람들에 의해 추천되었다. 전라감사(全羅監司)정종영(鄭宗榮)이 그를 제일 먼저 천거하였다. 여러 차례 재랑(齋郞)이 되었고, 의영고(義盈庫)직장(直長)이 되었으며, 그 뒤 의영고 주부(主簿)가 되었다. 강동현감(江東縣監)에 제수되었으나 선산[松楸]과 너무 멀어 부임하지 않으려고 하자 거창현감(居昌縣監)으로 바꾸어주었다.[『송자대전(宋子大全)』 권206 「고암양공행장(鼓巖梁公行狀)」 이하 「양자징 행장」] 이때 선조가 양자징(梁子澂)을 보고 다스리는 방법을 물으니, 양자징은 “학교를 일으켜 교화(敎化)를 힘쓰시기를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이처럼 양자징은 교육에 관심이 많았으므로 현감으로 부임할 때면 학도(學徒)들을 권면하여 『소학(小學)』을 익히게 하고, 삼강(三綱)의 행실을 경계하게 하며, 양로(養老)와 향사(鄕射)의 예(禮)를 거행하였다. 그러자 백성들이 흡족하게 여기며 따라 주어 칭송이 자자했다.[『죽음집(竹陰集)』 권16 「고현감양공묘갈명(故縣監梁公墓碣銘)」 이하 「양자징 묘갈명」]

한편 1589년(선조 22) <기축옥사(己丑獄死)>가 벌어지자 양자징의 큰 아들 양천경(梁千頃)과 둘째 아들 양천회(梁千會)가 정여립(鄭汝立)을 따르던 이들을 성토하는 소(疏)를 올렸다.[『선조실록(宣祖實錄)』선조 22년 10월 28일, 선조 22년 11월 3일, 「양자징 묘갈명」, 『기축록(己丑錄)』] 이들의 상소는 <정여립 모반 사건>을 단순한 역모 사건에서 서인(西人)의 동인(東人) 탄압으로 확대시켰다. 그러나 세자 책봉 문제로 1591년(선조 24) 정철(鄭澈)을 비롯한 서인이 실각하면서, 양천경과 양천회는 기축옥사와의 연관성으로 인하여 국문을 받았고 결국 장독(杖毒)으로 죽었다.[『선조실록』선조 24년 윤 3월 14일, 선조 24년 윤 3월 16일, 선조 24년 8월 13일] 이때 양자징은 아들 양천회의 옥바라지를 핑계로 관고(官庫)의 물품을 공공연하게 가지고 갔다는 이유로 석성현감(石城縣監)에서 파직되었다.[『선조실록』선조 24년 9월 16일]

이듬해인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양자징은 고경명(高敬命)과 김천일(金千鎰)이 향병(鄕兵)을 모아 창의토적(倡義討賊)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에 셋째 아들 양천운(梁千運)을 고경명에게 보내 따르게 하였고, 자신은 군량을 도왔다.[「양자징 행장」]

1594년(선조 27) 전라도 담양의 집에서 세상을 떠났는데, 향년 72세였다.[「양자징 묘갈명」] 그리고 100여 년이 지나 1697년(숙종 23)에 많은 선비들이 상소를 올려 김인후의 위패를 모신 필암서원(筆巖書院)에 양자징도 함께 모시게 해달라고 요청하였으나 보류되었다.[『여지도서(輿地圖書)』] 그러다가 1786년(정조 10) 전라도 진사 이경집(李敬緝) 등이 다시 상언(上言)하였고, 이때 학문과 그 효성을 인정받아 양자징은 필암서원에 배향되었다.[『정조실록(正祖實錄)』정조 10년 2월 26일]

성품과 일화

양자징은 효성이 하늘에서부터 타고나서 나이 6~7세 때 어머니 상(喪)을 당하자 상사를 봉행하기를 성인(成人)처럼 하였다. 슬픔으로 몸이 야위고 병에 걸리자 아버지 양산보가 새고기를 구워 약으로 먹이려 하였으나 좋아하지 않으므로 막대기를 들고 여러 가지 방법으로 꾸짖으며 달래고 권면하였지만 끝내 먹지 않았다. 심지어 자신의 수저를 주머니에 넣어 차고 다니며 다른 사람의 수저와 섞이지 않게 하자, 양산보도 그의 지극한 정성을 알고 그 뒤로는 억지로 시키지 않았다. 상제(喪制)를 마치고 또 조모의 상을 당하자 다른 사람들이 말하기를, “어린 나이에 소식(蔬食)을 하게 되면 틀림없이 죽을 것이다.” 하니, 말하기를, “우리 아버지가 상을 당하였는데 자식이 무슨 마음으로 맛있는 음식을 먹겠습니까?” 하며, 거처와 음식을 상제와 다름없이 하였다는 일화가 전해진다.[「양자징 묘갈명」]

한편 글을 읽을 때면 지도하여 가르치기를 번거롭게 하지 않고서 마음으로 이해하는 것이 많았다. 장성함에 이르러 김인후가 스스로 그의 아버지와 친구라 하여 사위로 골라서 그의 딸을 출가시켰으니, 그가 가정에서 일찍 알려진 것과 스승을 의뢰하여 크게 드러나 깊고 오묘한 경지를 탐색하고 헤쳐 나감에 꿰뚫지 않음이 없었다. 다른 사람과 말을 함에 겸손하여 부족한 듯하였으므로, 사람들이 이 때문에 더욱 그를 공경하였다. 아버지 양산보가 세상을 떠나자 동생 양자정(梁子渟)과 함께 묘소 아래에 여막을 짓고 보살피며 통곡하기를 바람이 부나 눈이 내려도 폐하지 않았고, 제전(祭奠)은 반드시 손수 조리하였다고 전한다.[「양자징 묘갈명」]

묘소와 후손

양자징의 묘소는 무등산(無等山) 중산동(中山洞)에 있다. 송시열(宋時烈)이 지은 행장(行狀)이 남아 있고, 조희일(趙希逸)이 지은 묘갈명(墓碣銘)이 남아 있다.[「양자징 행장」, 「양자징 묘갈명」]

첫째 부인 울산 김씨(蔚山金氏)는 김인후의 딸인데, 자식이 없었다. 둘째 부인 광주 김씨(光州金氏)는 김송명(金松命)의 딸인데, 자녀는 3남 3녀를 낳았다. 장남은 양천경이고, 차남은 양천회인데, 둘 다 1591년(선조 24)에 옥사로 죽었다. 3남은 양천운으로, 사섬시(司贍寺)주부(主簿)를 지냈다. 장녀는 오급(吳岌)에게 시집갔는데,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적을 만나 남편과 함께 물에 빠져 죽었다. 차녀는 안영(安瑛)에게 시집갔는데, 안영은 고경명을 따라 순절(殉節)하였다. 3녀는 서호갑(徐虎甲)에게 시집갔다.[「양자징 행장」]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정조실록(正祖實錄)』
  • 『일성록(日省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기축록(己丑錄)』
  • 『여지도서(輿地圖書)』
  • 『송자대전(宋子大全)』
  • 『죽음집(竹陰集)』
  • 『기년편고(紀年便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