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사사(藥師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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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나라현의 법상종 사찰.

개설

일본에 있는 약사사(藥師寺)는 680년경 황후의 병이 완쾌되기를 기원하며 약사여래상의 조성과 함께 나라에 건립되었다. 하지만 710년에 수도를 평성경(平城京)으로 옮기면서 약사사를 현재의 나라시[奈良市]로 옮겨지었다. 1468년(예종 즉위) 일본의 사신인 융원(融圓)·종례(宗禮)가 세조를 알현하여 약사사의 재건에 도움을 요청하였고, 조선에서는 면포(綿布)와 마포(麻布) 등을 비롯하여 ‘약사사(藥師寺)’라고 적은 액자(額字)를 하사하였다.

내용 및 특징

(1) 절의 연혁

약사사는 일본 나라현[奈良縣] 나라시[奈良市]에 있는 사찰이다. 680년경 천무천황(天武天皇)은 황후 제야찬량(鵜野讚良)의 병이 완쾌되기를 기원하며 약사여래상(藥師如來像)의 조성과 약사사의 건립을 발원하였다. 그러나 절이 완성되기 전에 천황이 세상을 떠났고, 죽은 천황의 유지를 지통천황(持統天皇)이 이어받았다. 마침내 697년에 약사사의 본존인 약사여래상을 안치함으로써 나라에 사찰이 완공되었다. 하지만 710년에 원명천황(元明天皇)이 수도를 평성경(平城京)으로 옮김에 따라 약사사도 당시의 수도였던 지금의 나라시로 옮겨지었다.

794년에 평안경(平安京)으로 도읍을 옮긴 이후에도 약사사는 칠대사(七大寺)나 십대사(十大寺)에 속하며 국가의 중요한 관사(官寺)로서 중시되었다. 그러나 973년에 발생한 화재로 인해 큰 피해를 입었다. 당시의 화재로 인해 동탑(東塔)과 서탑(西塔) 및 서원(西院) 등 몇 개의 당우(堂宇)만 남기고 다 소실되었다. 이때 원융천황(円融天皇)이 조서를 내려 약사사를 재건하였다. 하지만 977년에 다시 화재가 나서 보장(寶藏)이 소실되었고, 989년에는 큰 바람이 불어 금당(金堂)의 상층이 날아갔으며, 1096년에는 대지진으로 회랑(回廊)이 무너졌다.

1192년에 들어선 겸창막부(鎌倉幕府) 시대 이후에는 왕실의 지원이 줄어 화재나 지진 등에 의한 피해를 제대로 복구하지 못하였다. 결국 1460년에 약사사 승려 심존(尋尊)은 금당을 재건하기 위해 스스로 기금을 모으거나 시주자를 구하여 경제적 원조를 요청하기도 하였다.

15세기 중반 전국(戰國)시대에 병화와 지진으로 약사사는 황폐해졌지만 강호(江戶)막부가 성립된 이후부터 막부의 보호를 받아 가람을 수리할 수 있었다. 그러나 명치유신(明治維新) 때 약사사는 300석의 토지를 잃고, 가람의 황폐화가 급속히 진행되기도 하였다. 1882년에 흥복사(興福寺)와 법륭사(法隆寺)와 함께 진언종(眞言宗)으로부터 독립하여 법상종(法相宗)의 삼대본산(三大本山) 중 하나가 되었다. 이후 약사사는 국가 문화재 보호 정책 하에 국가로부터 경제적인 원조를 받게 되었고, 1998년에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록되었다.

(2) 조선과의 관계

1468년(세조 14) 일본의 사신인 융원(融圓)·종례(宗禮)가 세조를 알현하여 약사사의 재건에 도움을 요청하였다(『세조실록』 14년 3월 15일). 왕이 조연(助緣)을 허락하였으나 처음에 일본에 보낼 물건에 대해 신하들의 의견이 일치하지 못하였다(『세조실록』 14년 3월 20일). 결국 면포(綿布)·마포(麻布) 각각 2,000필과 면주(綿紬) 500필, 그리고 ‘약사사(藥師寺)’라고 적은 액자를 하사하였다(『세조실록』 14년 3월 27일).

참고문헌

  • 한문종, 「조선전기 일본의 대장경구청과 한일간의 문화교류」, 『한일관계사연구』17, 2002.
  • 近畿日本鐵道創立五十周年記念出版編集所 編, 『藥師寺』, 大阪市: 近畿日本鐵道株式會社, 1965.
  • 田村圓澄; 久野健 著, 『藥師寺·唐招提寺』, 東京: 集英社, 1984.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