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국사(무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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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적상산사고(赤裳山史庫)를 관리하던 사찰로, 전라북도 무주군 적상면 북창리에 위치한 절.

개설

안국사(安國寺)는 고려후기에 창건되었으나 자세한 사정은 알 수 없고, 조선후기에 적상산(赤裳山)에 사고(史庫)가 건립되면서 국가의 지원과 보호를 받았다. 사고를 관리하는 관서가 있었지만 실제 관리는 절이 전담하였다. 국가에서 여러 차례 공명첩(空名帖)을 지급하거나 지방 관청을 통해 절의 중건을 지원하도록 하였다. 사고의 수호사찰로서 절은 고역을 맡았지만 이로 인해 억불의 사회에서 절을 유지할 수 있었다. 1910년 사고가 폐지된 후 일부 건물을 절로 옮겼다. 1989년 산중에 양수발전소가 건립되면서 원래의 자리는 수몰되었고, 남쪽으로 1㎞ 거리인 지금의 자리로 이전하였다.

내용 및 변천

(1) 창건

고려후기인 1277년(고려 충렬왕 3)에 월인(月印)이 창건하였다. 하지만 그때의 사세나 역사에 대해서는 전하는 바가 없다.

(2) 조선시대

조선초에 무학(無學) 대사(大師)가 태조의 명에 따라 국가의 만년지계를 도모할 복지(卜地)로 삼아 중창하였다고 전한다. 절이 위치한 적상산에는 고려말 최영(崔瑩)이 외적의 침입을 대비해 쌓은 적상산성이 있어 이러한 창건설을 뒷받침해준다.

절의 역사는 적상산사고(赤裳山史庫)와 맥락을 같이한다. 1614년(광해군 6) 산성 안에 실록전(實錄殿)을 건립하여 국가의 사서를 보관하는 적상산사고를 두었다. 원래 묘향산사고(妙香山史庫)에서 사서를 보관하였으나 후금(後金)의 위협 등으로 도서가 망실(亡失)될 우려가 있었다. 이에 1618년(광해군 10)부터 1633년(인조 11)까지 묘향산사고의 실록을 모두 이전하였다. 이때부터 절은 사고 수호사찰이 되었고, 주지 덕웅(德雄)이 의승을 모집하여 산성을 보수하면서 사고를 지켰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때는 사고를 지킬 사람이 없자 상훈(尙訓)이 사서를 모두 성 밖의 안전한 석굴로 옮겼다가 전쟁이 끝나자 다시 제자리로 돌려놓았다.

1728년(영조 4)에는 조선후기의 대표적 화승 의겸(義謙) 등이 괘불(보물 제1267호)을 조성하였다. 1758년(영조 34) 감로탱화를 조성하였고, 1772년(영조 48)에는 극락전에 후불탱화를 봉안하였다. 1817년(순조 17)에는 절의 중수 방안을 모색하라는 왕명이 있었다. 당시 절은 사고의 장서를 관리하는 제반 작업을 모두 전담하는 관청과도 같은 기능을 맡고 있었다. 그런데 사찰 전각이 낡아 무너질 지경에 처하자 지방 관청에 명하여 중수 대책과 절의 잡역을 감면해줄 방안을 찾으라고 하였다. 1850년(철종 1)에도 공명첩 300장을 내려 절의 중수를 돕도록 하였다. 1864년(고종 1)에는 이면광(李冕光)이 절의 중수를 왕실에 건의하였다. 이에 대왕대비가 공명첩 300장을 관청에 보내 경비를 모아 중수하도록 하였다. 이때의 사실을 「안국사중수기」라는 현판에 남겼다. 이후 1872년(고종 9)과 1902년에도 중수가 이어졌다.

일제강점기에는 극락전을 중심으로 명부전과 산신각, 청하루(淸霞樓), 승방 등이 있었다. 1910년 적상산사고의 장서가 서울 장서각으로 옮겨갔다. 당시 장서는 4,066책이었으나(『순종실록부록』 4년 6월 19일), 안타깝게도 한국전쟁의 와중에서 모두 분실되고 말았다. 사고에 남아 있던 선원각(璿源閣)을 비롯한 빈 건물은 주지 이철허(李澈虛)가 경내로 옮겼다.

(3)현대

현대에 들어 1968년 주지 유정환(柳正煥)이 선원각에 천불상을 봉안하였고, 퇴락한 청하루를 해체하였다. 1989년 산내에 무주 양수발전소가 건립되면서 절이 수몰 지구에 포함되었다. 부득이 남쪽으로 1㎞ 떨어진 호국사(護國寺)로 옮기게 되었다. 호국사는 빈터만 남아 있었는데 이곳에 극락전, 천불전, 호국당 등 대부분의 전각을 이전·복원하였다.

참고문헌

  • 박대길, 「적상산사고의 설치운영과 무주의 변화」, 『전라문화총서』27, 전북대학교 전라문화연구소, 2008.
  • 사찰문화연구원 편집부, 『전통사찰총서 8, 전북의 전통사찰Ⅰ』, 사찰문화연구원,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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