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차산봉수(峨嵯山烽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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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제1봉수로 직봉 노선에 속한 내지봉수(內地烽燧)로, 아차산에 있다가 오늘날 서울특별시 중랑구의 봉화산(烽火山) 정상에 이건된 봉수.

개설

조선전기에는 가구산봉수(加仇山烽燧)라고도 불렀다. 함경도와 강원도, 경기도에서 한양에 오는 봉수가 양주 한이산(汗伊山)에 이르면 아차산봉수에서 그 신호를 받아 서쪽의 목멱산(木覓山) 제1봉수에 전달하였다.

설립 경위 및 목적

1423년(세종 5)에 한양 남산에 5개소의 봉수를 설치하면서, 그중 제1봉수에 대응하는 봉수로 설립하였다(『세종실록』 5년 2월 26일).

조직 및 역할

1871년(고종 8)에 간행된 『경기읍지(京畿邑誌)』「양주목읍지(陽州牧邑誌)」에 따르면, 양주 남쪽 망우리면(忘憂里面) 50리 지점에 있었다. 북쪽으로는 한이산봉수에, 서쪽으로는 남산봉수에 응하였다. 소속 인원에는 감관(監官) 1명, 군(軍) 25명, 보(保) 50명 등이 있었다. 경봉수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5명의 봉수군이 매달 6일씩 5교대로 번(番)을 섰으며, 보인은 봉수군 1명당 2명씩이었다.

변천

아차산봉수에 대한 최초의 기록인 『세종실록』「지리지」에는 봉수의 위치가 아차산이 아닌 가구산으로 되어 있다. 당시 이에 응했던 봉수는 양주 대이산봉수이다. 망우리에서 세거하던 동래 정씨 문중에서 1760년(영조 36)에 필사하여 만든 『망우동지(忘憂洞誌)』에 따르면 아차산봉수는 원래 아차산 뒤에 있었는데, 후에 강릉(康陵)봉수와 태릉(泰陵)봉수가 가깝다는 이유로 봉화산으로 옮겼으나 이름은 계속해서 아차산봉수로 불렀다고 한다. 이 기록은 강릉과 태릉에 봉수가 설치된 뒤에 아차산봉수가 봉화산으로 이설되었다는 사실을 전한다. 따라서 아차산봉수가 이전된 시기는 1575년(선조 8)에서 『망우동지』가 만들어진 1760년 사이로 추정할 수 있다.

1504년(연산군 10)에는 왕이 전교(傳敎)를 통해 함경도에서 오는 봉화를 아차산봉수에서는 올리지 못하도록 함에 따라 일시 철폐되었다(『연산군일기』 10년 8월 25일). 그러나 1506년 중종반정으로 복설되어, 이후 조선시대 전 기간 동안 운영되었다.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을 계기로 봉수제가 철폐되고, 이듬해에 군부의 주청(奏請)에 의해 각지의 봉대와 봉수군이 폐지됨에 따라 그 기능을 완전히 상실하였다(『고종실록』 32년 윤5월 9일).

오늘날 아차산봉수는 봉화산 정상부에 화강석 축대와 계단을 갖추고 장방형의 백색 화강암 석축으로 복원된 뒤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15호로 지정되었다. 전체 높이 298㎝가량의 이중 원형 형태로, 하단부에는 거화를 위한 장방형의 연조 시설 1기가 지표에서 25㎝가량 위에 동남쪽을 향하도록 마련되어 있다. 이는 조선시대 내지봉수의 일반적인 형태인 방호벽 내에 5기의 연조를 갖춘 모습과는 다르게 복원된 사례에 해당한다. P00012527 01.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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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경기읍지(京畿邑誌)』
  • 『망우동지(忘憂洞誌)』
  • 국립문화재연구소, 『韓國考古學專門用語辭典』, 국립문화재연구소,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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