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연(沈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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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87(선조 20)∼1646(인조 24) = 60세]. 조선 중기 광해군(光海君)~인조(仁祖) 때의 문신.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과 승정원(承政院)승지(承旨), 사간원(司諫院) 대사간(大詞諫) 등을 역임하였다. 자는 윤보(潤甫), 호는 규봉(圭峰)이다. 본관은 청송(靑松)이며,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진사(進士)를 지낸 심대형(沈大亨)이고, 어머니 청주 한씨(淸州韓氏)는 진사를 지낸 한중겸(韓重謙)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좌승지(左承旨)에 추증된 심륭(沈嶐)이고, 증조할아버지는 청천부원군(靑川府院君)심온(沈溫)이다.

광해군~인조 시대 활동

1612년(광해군 4) 식년시(式年試)에서 3등(三等)으로 급제했다.[『방목(榜目)』]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났을 때 심연(沈演)은 공주(公州)에서 인조를 호종하여 내시교관(內侍敎官)이 되었고, 1626년(인조 4)에는 헌릉(獻陵) 참봉(參奉)에 임명되었다.[『만랑집(漫浪集)』 권9 「관찰사심공묘갈명(觀察使沈公墓碣銘)」 이하 「관찰사심공묘갈명」으로 약칭] 그 해 가을에 실시된 별시(別試)에서 심연은 갑과(甲科) 장원으로 급제했으나 합격한 열 여섯명 가운데 고시관의 자제가 많아 논란이 일자 합격이 전원 취소되었고, 그러면서 심연 역시 장원 급제가 취소되었다.[『인조실록(仁祖實錄)』 4년 7월 26일, 인조 4년 8월 24일] 이듬해인 1627년(인조 5) <정묘호란(丁卯胡亂)>때 어가를 강화도로 호종하고서 조지서(造紙署)별제(別提)의금부(義禁府)도사(都事)를 지내다가 환도(還都)하자 벼슬을 그만두었다.[「관찰사심공묘갈명」] 한편 그해 9월 그는 정묘(丁卯) 식년시(式年試)에서 갑과(甲科) 2위로 급제하였다.[『방목』] 급제 후 관례대로 사섬시(司贍寺)직장(直長)이 되고 같은 해 10월에는 예조 좌랑(佐郞)이 되었으며, 이듬해인 1628년(인조 6) 1월에는 형조 좌랑이 되었다. 이어 그해 2월에 다시 예조 좌랑이 되었다가, 8월에 다시 형조좌랑으로 옮겼다.[「관찰사심공묘갈명」]

1630년(인조 8) 사헌부(司憲府)지평(持平)이 되었는데, 이듬해인 1631년(인조 9) 상소를 올려 “중문(重門)을 크게 열어 놓고 편전에 납시어, 날마다 대신과 삼사 및 비국의 제신들과 시무를 강구하여 일이 잘 되도록 계획하소서. 적을 방어할 계책과 나라를 살릴 꾀를 가진 자는 귀천을 막론하고 반드시 들어와 고하게 하소서. 식량을 적에게 주는 실책을 깊이 징계하고 와신상담(臥薪嘗膽)하는 뜻을 분발하여 속히 회답사를 보내는 일을 정지하고 적을 토벌하는 의논을 결정하소서”라고 변란에 대한 대책을 펼쳤다.[『인조실록』인조 8년 7월 15일, 인조 9년 6월 19일] 그리고 1632년(인조 10) 충청도와 전라도, 경상도 등 삼남(三南)에 어사를 나누어 파견하여 무재(武才)를 시험하게 하라는 인조의 명에 따라, 그는 경상도시재어사(慶尙道試才御史)가 되어 임금의 명을 수행하였다.[『인조실록』인조 9년 9월 10일, 인조 10년 1월 15일] 얼마 후 사간원 정언(正言)과 사간원 지평 등을 거쳐, 홍문관(弘文館)교리(校理)가 되었다.[『인조실록』인조 10년 2월 10일, 인조 10년 2월 27일, 인조 10년 5월 25일]

1633년(인조 11)에는 도청(都廳)에 임명되어 정묘호란으로 파괴된 창덕궁(昌德宮) 보수 공사를 총괄하였으며, 공사가 끝나자 능력을 인정받아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위계가 더해졌다. 이 해 9월, 당시 현(縣)으로 강등되어 다스리기 어려운 곳으로 알려졌던 광산(光山 : 지금의 광주)에 현감(縣監)으로 부임하였으나 이듬해에 주(州)로 격상되면서 목사(牧使)가 되었다.[「관찰사심공묘갈명」] 1635년(인조 13)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로 승진하여 부임하였는데 이듬해인 1636년(인조 14)에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휘하 군대를 이끌고 나섰다. <쌍령(雙嶺) 전투>에서 패배하고 문경에서 재기를 꾀하던 중 화의가 성립되자 패전의 책임을 지고 전라도 임피(臨陂)에 유배되었다.[『인조실록』인조 15년 6월 13일,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권30 「효종조고사본말(孝宗朝故事本末)」] 그러다가 1638년(인조 16) 최명길(崔鳴吉) 등이 올린 상소 덕분에 유배지에서 풀려나 사면된 후 제주목사(濟州牧使)로 부임하였고, 1640년(인조 18)에 당상관인 비변사(備邊司)가 되어 조정으로 돌아와 한성부우윤이 되었다.[『인조실록』인조 16년 2월 18일, 인조 16년 2월 21일, 인조 16년 3월 20일] 그리고 1641년(인조 19)에는 승정원 도승지(都承旨) 및 사간원 대사간을 역임하였다. [『인조실록』인조 19년 1월 11일, 인조 19년 3월 3일, 인조 19년 12월 20일, 「관찰사심공묘갈명」] 한편 이 해에 한인(漢人)의 배가 서해안으로 많이 들어오자 청(淸)나라 조정은 이러한 한인의 배를 적발하여 보고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에 서해안 순찰이 강화되었는데, 심연은 이 때 서도순찰사(西道巡察使)가 되어 서쪽 연안으로 들어오는 배를 감시하는 임무를 수행하기도 하였다.[『인조실록』인조 19년 9월 8일]

그러던 가운데 1642년(인조 20) 평안도관찰사(平安道觀察使)에 제수되었는데, 당시 청나라 조정에서 한인의 배가 서해에 출몰하는데도 금지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해당 지방의 감사와 지방관을 문책할 것을 요구하였다.[『인조실록』인조 20년 3월 10일, 인조 20년 10월 1일, 인조 20년 10월 12일] 심연은 이 일로 체포되어 청나라로 압송되었다가 돌아온 후 다시 유배를 갔다.[『인조실록』인조 20년 윤11월 29일, 「관찰사심공묘갈명」] 1643년(인조 21) 10월 청나라의 조칙(詔勅)에 따라 사면령이 내려지면서 사면되었고, 이 해에 경기도관찰사(京畿道觀察使)가 되었다가, 1644년(인조 22)에는 함경도관찰사(咸鏡道觀察使)로 전근되었다.[『인조실록』인조 21년 10월 10일, 인조 21년 12월 22일, 인조 22년 2월 13일] 그러다가 1646년(인조 24) 임지인 함경도에서 죽었으며, 서울로 운구하여 이 해 5월 22일에 용인의 선영인 산의골(山義谷) 동북향 언덕에 장사지냈다. 당시 나이 60세였다.[『인조실록』인조 24년 3월 3일, 「관찰사심공묘갈명」]

성품과 일화

심연의 성품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자질이 크고 준수하며 도량이 깊었다. 바위 같은 인상이어서 위엄이 있었으나 위엄을 일부러 세우고자 하지 않았고 영리도 돌보지 않았다고 한다. 대각(臺閣)에 있을 때는 세태에 따라 좋은 일에만 어울리지 않았고 인정상 지나친 행동은 하지 않았으며 오직 강상(綱常)을 지키며 풍채를 유지하였다고 한다. 또 경연(經筵)에 들어가서는 강론을 펼쳐 임금을 어질게 보필하고 세자를 마음을 다해 보도(輔導)하였으며, 임금 앞이라면 죽음을 무릅쓰고 충언을 하였다고 한다.[「관찰사심공묘갈명」]

다른 한편으로는 홍문관 교리에 임명되었을 때, “본시 벼슬 욕심이 많아 아첨하는 것으로써 일삼아 일찍이 혼조에서 급제도 하기 전에 권문(權門)에 나아가 붙자 지식인들이 그를 비루하게 여기었다”는 비판을 듣기도 하였다.[『인조실록』인조 10년 9월 28일]

묘소와 후손

심연의 묘소는 용인현(龍仁縣) 서쪽 산의곡(山義谷)에 있는데, 지금의 수원시 이의동이다.

첫 번째 부인 해주 오씨(海州吳氏)는 여주목사(驪州牧使)를 지낸 오윤해(吳允諧)의 딸로 1남 심서견(沈瑞肩)을 두었다. 두 번째 부인 전주 이씨(全州李氏)는 이사민(李師閔)의 딸로 후사가 없다.[「관찰사심공묘갈명」]

참고문헌

  • 『인조실록(仁祖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국조방목(國朝榜目)』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고봉집(高峯集)』
  • 『만랑집(漫浪集)』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청선고(淸選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