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벌(申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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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23년(중종 18)∼1616년(광해군 8) = 94세.] 조선 중기 선조~광해군 때의 문신. 중추부(中樞府)동지사(同知事)를 지냈다. 자(字)는 제백(濟伯)이다. 본관은 고령(高靈)이다. 아버지는 가평 군수(加平郡守)신여주(申汝柱)이고, 어머니 전주 이씨(全州李氏)는 당해부수(唐海副守) 이명귀(李明龜)의 딸이다.

선조 시대의 활동

나이 30세에 효자의 아들이라 하여 사재감(司宰監)참봉(參奉)에 임명되고, 또 경기전(慶基殿) · 제용감(濟用監) · 준원전(濬源殿)으로 여러 번 바뀌었으며, 또 광흥창(廣興倉)봉사(奉事) · 장악원(掌樂院)직장(直長) · 종부시(宗簿寺)주부(主簿)로 전직되었다가 전생서(典牲署)로 옮겼다. 그러다가 직산 현감(稷山縣監)으로 선발 임명되었는데, 근무 평정이 최상으로 평가되었다. 임기가 만료되어 내직(內職)으로 들어와 조지서(造紙署)사지(司紙)가 되었으며, 개성부 도사(開城府都事)로 승진하였다가 전생서 주부로 복직하였다. 그러다가 안산 군수(安山郡守)로 임명되었으나 어머니 상(喪)을 당하여 관직에서 떠났다. 상복(喪服)을 벗자 신천 군수(信川郡守)에 임명되었고 3년 만에 체임되어 돌아왔다. 장례원(掌隷院) 사평(司評) · 종묘서(宗廟署)영(令)을 지내고 여산 군수(礪山郡守)가 되었다가 4년 만에 파면되었다. 오랜 기간을 지나 단양 군수(丹陽郡守)에 임명되었으나 3년 만에 병으로 사직하였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서 의주로 피난갔던 선조가 환도(還都)할 적에, 신벌은 황해도까지 나가 영접하였다. 황해도 신천(信川)의 아전과 주민들이 신벌을 보고 그의 아무런 탈이 없음을 기뻐하면서 재차 수령으로 빌려주기를 간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마침 온양(溫陽)에 있는 군사들의 충돌로 폐단이 극심하여 다스리기 어려웠으므로 병조에서 그를 추천하여 임명하게 하기를, “비록 늙기는 하지만 이 사람과 바꿀 사람은 없다.” 하였다. 이듬해에 병으로 체직되었으며, 얼마 있다가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 위솔(衛率)로 임명되었다가 사어(司禦)로 전직되었고, 다시 선공감(繕工監) 판관(判官)으로 옮겼으나 병으로 사직하고 향리(鄕里)로 돌아갔다.[『청음집(淸陰集)』 권31 「동지중추부사 신공 묘갈명(同知中樞府事申公墓碣銘)」]

앞서 온양에 있으면서 역적 송유진(宋儒眞)이 모반(謀叛)한 상황을 가장 분명하게 보고하자 조정에서 가상하게 여기며 미처 상을 내리지 못하였는데, 대신(大臣)이 임금에게 아뢰어 통례원(通禮院)상례(相禮)로 승진시켜 임명하니 사은(謝恩)하고 즉시 고향으로 돌아갔다.[『청음집』 권31 「동지중추부사 신공 묘갈명」] 이때 사간원에서 신벌이 연로하다고 체차를 청하자 선조는 연로한 자를 차출한 것은 이조의 잘못이라고 전교하였다.[『선조실록』선조 33년 12월 15일] 당시 그의 나이 70세가 넘었지만 근력(筋力)은 오히려 직무에 관한 일을 감당할 수 있었으나 스스로 나이가 많다는 것으로 다시는 벼슬할 생각을 갖지 않았다. 어떤 사람이 호조에 바야흐로 재용(財用)이 시급하니 80세를 바라보는 사람에게 재물을 바치도록 허락하고 관직을 얻을 수 있게 한다면 그것 또한 늘그막에 향리의 영광이 되기에 충분하다고 넌지시 권하였더니, 그가 얼굴빛을 바르게 하고 말하기를, “늙은이가 죽지 않은 것은 오히려 뒷날이 있어서인데 어찌 구구하게 굶이 여기에 이르는가?” 하면서, 끝내 그 사람의 말을 듣지 않았다.[『청음집』 권31 「동지중추부사 신공 묘갈명」]

뒤에 그의 나이 80세가 되어서 비로소 국법으로 당상관(堂上官)에 승진하였으며, 또 10년이 지나 나이 90세가 되자 2품(品)으로 승진하여 중추부 첨지사(僉知事)에서 특별히 중추부 동지사로 임명되고, 재차 한 자급(資級)을 더해주어 후하게 예우함을 보였으니 모두 특이한 예수(禮數)였다. 마침내 양대에 은혜를 미루어 미치게 하여 그의 조부에게는 좌승지(左承旨)를, 아버지에게는 이조 참판을, 어머니 완산 이씨(完山李氏)에게는 정부인(貞夫人)을 추증(追贈)하였다. 그러자 듣는 사람들이 그의 복(福)이 남들보다 뛰어났을 뿐만이 아니고 그의 몸가짐과 행실의 견실함이 늙어서도 쇠퇴하지 않은 것은 더욱 미치기 어렵다고 여겼다.[『청음집』 권31 「동지중추부사 신공 묘갈명」]

광해군 시대 활동

1612년(광해군 4) 양주 목사(楊州牧使)신응거(申應榘)가 상소하여 그의 아버지 신벌이 90세가 찼다고 하면서 은전(恩典)을 내려주기를 청하였다. 해조에서 임금에게 재가할 것을 의계하니, 광해군 전교하기를, “가자(加資)한 다음 실직(實職)을 제수해 노인을 우대하는 뜻을 보이라.”하였다. 이어 신벌을 가선대부(嘉善大夫)로 가자하였다.[『광해군일기』광해군 4년 1월 6일]

신벌은 당(唐) 백거이(白居易)의 향산 고사(香山故事)를 모방하여 구로회(九老會)를 만들었다. 어느 날 사중(社中)의 구로회의 여러 사람들은 불러다 모아놓고 말하기를, “정신과 기운이 날마다 줄어듦을 깨닫겠으니 사람의 일은 일정함이 없어 조용해지고 싶은 생각이 든다.” 하였다. 3일까지 기거와 동작이 조금도 변함이 없더니만 조금 있다가 잠이 들어 마치 깊은 잠에 빠진 듯하기에 흔들어 보니 이미 운명하였다. 1616년(광해군 8) 병진년(丙辰年) 7월 9일에 졸하니 향년 94세였다. 조야로 서로 전해지자 슬퍼하지 않는 이가 없었고 부음(訃音)이 알려지자 관원을 보내어 조문(弔問)하고 치제(致祭)하며 부의(賻儀)를 더 보태어 내렸다.[『청음집』 권31 「동지중추부사 신공 묘갈명」]

성품과 일화

신벌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청음집』 권31 「동지중추부사 신공 묘갈명」] 그의 사람 됨됨이는 관대하고 순후하며 공손하고 근신하여 온전하게 덕을 갖추었다. 젊어서부터 성실하고 믿음직스러우며 말과 행동을 어기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아끼고 사모하며 바라보고 가까이 하였으며, 친구와 동료 관원의 사이에서도 처음부터 끝까지 일치하지 않는 의견이 없었다. 그리고 집안에서의 행동이 순수하고 독실하여 슬픔으로 몸을 훼손하지 않아야 할 연세인데도 상(喪)을 당하여 앞서 상사(喪事) 때처럼 하였으며, 늙어서도 기일(忌日)을 만나면 반드시 몸소 전(奠)을 드렸는데 자제(子弟)가 섭행(攝行)하기를 청하면 말하기를, “제사를 어찌 남에게 대신하게 할 수 있는가?” 하였다. 이미 자신이 행사할 수 없게 되어서도 오히려 의관을 갖추고 바로 앉아서 의식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또 살고 있는 고을에 주민들의 일을 불쌍히 여기고 처리하기를 곡진하게 하지 않음이 없었으며, 모든 행정을 베푸는데도 사물의 성질이나 도리에 적합하도록 하면서 위엄(威嚴)을 숭상하지 않았고 근신하고 경계하며 아랫사람을 거느렸으므로 아랫사람이 감히 그르다고 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항상 겸손하게 물러나면서 스스로 그 능력을 드러내지 않았는데 이 때문에 추대하여 장자(長者)로 여겼다.

그가 직산(稷山)을 떠날 때에 고을의 주민들이 돌을 다듬어 비(碑)를 세우려고 한다는 말을 듣고 사람을 보내어 쳐서 깨뜨려 버리도록 하였다. 떠난 뒤에 주민들이 다시 다른 돌로 비를 세우면서 말하기를, “공은 비록 좋아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우리들은 받은 것이 많아 끝내 잊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앞뒤로 여섯 고을 열여덟 관직을 거치면서 녹봉 외에는 집안에 저축한 것이 없었다. 평생토록 의복이며 음식과 심신을 수양하는 공부를 일삼지 않았지만 욕심을 적게 하고 생각을 덜며 편안하게 여기고 이치에 순응하여 원기로 장수를 누릴 수 있었으니 어떻게 연유하는 바가 없겠는가?

묘소와 후손

묘소는 경기도 양주(楊州) 금촌리(金村里)에 있고, 김상헌(金尙憲)이 지은 묘갈명(墓碣銘)이 남아 있다.[『청음집(淸陰集)』 권31 「동지중추부사 신공 묘갈명(同知中樞府事申公墓碣銘)」]

정부인(貞夫人) 해평 윤씨(海平尹氏)는 선무랑(宣務郞)윤의형(尹義衡)의 딸이다. 1남 3녀를 낳았으니 장남은 신응구(申應榘)로 벼슬이 승지에 이르렀다. 장녀는 이양(李讓)에게, 다음은 군수민우경(閔宇慶)에게, 다음은 관찰사박동열(朴東說)에게 각각 출가하였다.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청음집(淸陰集)』
  • 『상촌고(象村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