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거관(愼居寬)

sillok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총론

[1498년(연산군 4)∼1564년(명종 19) = 67세]. 조선 전기 중종~명종 때의 문신. 도승지(都承旨)와 호조 판서를 지냈고, 시호는 공간(恭簡)이다. 자는 율이(栗而)이고 호는 독재(獨齋)다. 본관은 거창(居昌)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직장(直長)신극정(申克正)이고, 어머니 한양 조씨(漢陽趙氏)는 성균관(成均館)사예(司藝)조충손(趙衷孫)의 딸이다. 상주 목사(尙州牧使)신극성(愼克成)의 조카이고, 강원도 관찰사신자건(愼自健)의 종손자(宗孫子)다.

중종 시대 활동

1522년(중종 17) 사마시(司馬試) 생원과(生員科)에 합격하고, 3년 뒤에 1525년(중종 20) 식년시(式年試) 문과(文科) 을과(乙科)로 급제하였는데, 그때 나이가 28세였다.[『방목』] 과거에 급제하여 처음에 성균관 학유(學諭)에 보임되었다가, 예문관(藝文館) 검열(檢閱)이 되었다.[『인재집(忍齋集)』 권2 「유명조선국 자헌대부 호조판서 겸지의금부사 동지경연성균관사 오위도총부도총관 증시공간 신공 신도비명(有明朝鮮國資憲大夫 戶曹判書 兼知義禁府事 同知經筵成均館事 五衛都摠府都摠管 贈諡恭簡 愼公神道碑銘)」 이하 「신거관 신도비명」이라 약칭] 1527년(중종 22) 봉상시(奉常寺)봉사(奉事)에 임명되었는데, 그가 성실하고 부지런하게 근무하면서 나라의 제사에 쓸 제물(祭物)을 정갈하게 마련하였으므로, 도제조(都提調)정광필(鄭光弼)이 그에게 봉상시(奉常寺)의 업무를 오랫동안 맡겨서 봉상시 직장으로 승진하였다.[『인재집』 권2 「신거관 신도비명」] 이때 영의정정광필은 신거관의 성실과 근면을 높이 평가하여 그 뒤에도 그를 청요직(淸要職)에 천거해 주었다. 신거관은 수부(守夫) 정광필의 훌륭한 인품에 감화를 받아 그를 추종하였다. 정광필은 중종 때 사림파(士林派)와 훈구파(勳舊派)가 싸울 때 항상 중립을 지키려고 노력하였는데, 신거관은 인종 · 명종 때 대윤(大尹)과 소윤(少尹)이 싸울 때 중립을 지키려고 노력하다가, 오히려 양파로부터 공격을 당하여 말년이 불운하였다.

1531년(중종 26) 봄에 호조 좌랑(佐郞)으로 승진되었는데, 금전의 출납과 곡식의 수량을 정확하게 장부에 기록하게 하여 서리와 아전이 농간을 막았다. 겨울에 사간원(司諫院)정언(正言)에 임명되었고, 1532년(중종 27) 예조 · 호조 · 형조 · 공조의 정랑(正郞)을 역임하였고, 1533년(중종 28) 사헌부(司憲府)지평(持平)이 되었다가 사간원 헌납(獻納)으로 옮겼다.(『중종실록(中宗實錄)』 중종 28년 4월 28일, 『중종실록(中宗實錄)』 중종 29년 8월 5일) 1534년(중종 29) 이조 정랑에 임명되어서, 인사 행정을 공정하게 시행하려고 하다가. 당시 정권을 잡고 전횡하던 김안로(金安老) 일파와 충돌이 잦았다. 우의정김안로는 동궁(東宮: 인종)을 보호하고 문정왕후(文定王后)의 세력을 견제하였는데, 자기와 뜻이 다른 신거관이 이조 정랑의 자리에 있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1537년(중종 32) 종부시(宗簿寺)첨정(僉正)으로 좌천되었다가, 여름에 사헌부 집의(執義)로 승진되었으며, 의정부 검상(檢詳)을 거쳐 사인(舍人)으로 승진되었다. 이때 김안로가 명종을 낳은 문정왕후를 제거하려고 꾀하다가 도리어 실각을 당하였다. 그는 홍문관(弘文館)에 들어가서 응교(應敎) · 전한(典翰)으로 차례로 승진되었으며, 얼마 안 되어 중종이 특별히 승정원 동부승지(同副承旨)로 발탁하였다.[『인재집』 권2 「신거관 신도비명」] 사간원에서 아뢰기를, “동부승지신거관은 인물이 비록 쓸 만하다고 하더라도, 4품이 된 지 오래되지 않아서 갑자기 3품으로 올리고, 또 3품이 된 지 오래되지 않아서 당상관(堂上官)으로 올려서 임명하는데, 그의 관작이 너무 외람되니, 개정하소서.” 하니, 중종이 전교하기를, “신거관은 종4품 조산대부(朝散大夫)로서 정3품 승지에 임명되었으니, 갑자기 올려서 임명한 사실을 내가 모르는 바가 아니다. 당하관(堂下官) 정3품은 승지가 될 수 없지만, 신거관이 종3품 집의(執義)를 역임하였으므로 임명하였던 것이다. 체직하지 않더라도 괜찮을 것이다.” 하였다.(『중종실록(中宗實錄)』 중종 32년 9월 3일)

1539년(중종 34) 대사간(大司諫)에 임명되었다가, 다시 승정원 좌부승지에 임명되어, 우승지 · 좌승지를 거쳐 도승지(都承旨)로 영전되었다. 이때 정승 정광필은 죽었으나, 신거관은 이조 정랑과 도승지의 가장 중요한 요직을 역임하여, 장차 정승이 될 만한 경력을 갖추었다. 1540년(중종 35) 특별히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에 임명되었고,(『중종실록』 중종 35년 10월 20일)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도총관(都摠管)을 겸임하였다. 1541년(중종 36) 예조 참판에 임명되었다가, 겨울에 경기도 관찰사觀察使)로 나갔다. 그때 거듭 기근이 들어서 굶어죽는 백성들이 많았는데, 그 중에서 경기도가 특히 심하였다. 1542년(중종 37) 경기도 관찰사신거관이 경창(京倉)의 곡식을 풀어서 기근이 심한 파주(坡州) 등 7~8 고을에 구제해 주도록 건의하여, 중종의 허락을 받았다.[『중종실록』중종 37년 5월 6일] 그가 황정(荒政)을 강구하여 구휼(救恤) 사업을 실행하였으므로, 경기도에서 굶어죽는 백성이 없었다.[『인재집』 권2 「신거관 신도비명」]

1543년(중종 38) 이조 참판에 임명되었다가, 대사헌(大司憲)으로 옮겼다.(『중종실록』 중종 38년 11월 11일) 이조 참판으로 있을 때 이조의 당상관들이 모여서 소윤(少尹) 윤원형(尹元衡)을 3품 요직(要職)의 후보자 곧 3망(三望)에 올리는 문제를 논의하였는데, 그는 윤원형이 외척이라고 하여 반대하여, 윤원형을 3망에서 제외하였다. 제도상 3품 이상의 관직을 임명할 때 이조에서 3망을 올리면, 임금이 그 중의 한 명에게 낙점(落點)하였다. 소윤의 영수 윤원형은 문정왕후(文定王后)의 동생이었을 뿐만 아니라, 윤원형의 첩 정난정(鄭蘭貞)은 신거관의 첩의 동생이었다. 1544년(중종 39) 형조 참판에 임명되었다가, 병조 참판으로 옮겼다.[『중종실록』중종 39년 1월 3일] 사간원이 아뢰기를, “신거관이 전에 대사헌으로 있을 때 논박을 받아 체직되었는데, 곧 정조(政曹: 이조와 병조)의 당상관에 임명되었으므로 여러 사람들의 의견이 온당하지 못하다고 시끄러우니, 체직시키소서.” 하니, 중종이 그를 체직시켜서 성균관 동지사(同知事)에 임명하여 성균관으로 내보냈다.[『중종실록』중종 39년 10월 18일]

인종 시대 활동

1544년 11월 중종이 승하하자 중종의 장례를 치르기 위하여 산릉도감(山陵都監)이 설치되었는데, 이조 판서신거관은 공조 판서유인숙(柳仁淑) · 중추부(中樞府)지사(知事)황헌(黃憲) 등과 함께 그 제조(提調)를 맡았다.(『중종실록』 중종 39년 11월 15일) 이어 인종이 즉위하자, 인종의 외삼촌 대윤(大尹)윤임(尹任)이 정권을 잡았고 1545년(명종 1) 신거관을 다시 이조 참판에 임명하였다.[『인종실록(仁宗實錄)』인종 1년 3월 6일] 이조 판서신광한(申光漢)은 이조 참판신거관에게 옛날 유학자의 곧은 유풍(遺風)이 있다고 칭찬하고 경연(經筵)동지사(同知事)를 겸임하게 하였다.[『인재집』 권2 「신거관 신도비명」] 판서신광한은 중국 명(明)나라 칙사(勅使)를 영접하기 위하여 평안도 의주(義州)에 가서 몇 달 동안 있었는데, 그 사이에 이조 참판신거관이 인사 행정을 주관하면서,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숙청당한 사림파의 젊은 인재를 많이 등용하였다.

그때 병조 판서의 자리가 비게 되자, 의정부 3의정(議政)이 인종에게 아뢰기를, “병사(兵事)를 주관할 관리는 의당 무반(武班)의 일을 아는 중신에게 맡겨야 합니다.” 하고, 대윤의 영수 윤임을 추천하여 인종의 윤허를 얻어서 승지를 보내어 병조판서의 3망에 윤임의 이름을 올리라고 요청하였으나, 신거관은 외척에게 병권을 맡기는 것도 옳지 않다고 주장하여 끝내 윤임을 3망에서 제외하였다. 정권을 잡은 대윤 일파가 신거관을 몹시 핍박하였으나, 그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인재집』 권2 「신거관 신도비명」]

명종 시대 활동

1545년 7월 병약한 인종이 보위(寶位)에 오른 지 8개월만에 나이 30세에 승하하고, 12세의 명종이 즉위하자, 그 어머니 문정대비(文定大妃)가 수렴청정(垂簾聽政)하게 되었다. 명종의 외삼촌 윤원형이 문정대비의 밀명(密命)을 받고 <을사사화(乙巳士禍)>를 일으켜서 인종의 외삼촌 윤임과 좌의정유관(柳灌)과 이조 판서유인숙 3명을 먼저 죽이고, 이조 정랑노수신(盧守愼)과 홍문관 수찬유희춘(柳希春) 등 1백여 명을 유배하였다.[『문소만록(聞韶漫錄)』] 이때 이조 참판신거관은 신광한 · 이언적(李彦迪) · 홍언필(洪彦弼) 등과 함께 죄인을 국문(鞫問)하는 추국청(推鞫廳)의 당상관으로 참여하였는데, 그들은 대윤(大尹)과 소윤(少尹)의 어느 일파에도 속하지 아니하고 중립을 지켰기 때문이다.

1546년(명종 1) 여름에 호조 판서로 발탁되었다. 그가 중종 시대에 이조 참판으로 있을 때, 소윤의 영수 윤원형이 3품의 요직에 추천되었으나 이를 반대하여 무산시킨 적이 있었는데, 이때 소윤의 강경파 이기(李芑)의 조카 최보한(崔輔漢)이 그 사실을 눈치 채고 윤원형에게 고자질하였다. 최보한은 이조 참판신거관이 자기를 인종의 수릉관(守陵官)으로 삼은 것을 항상 원망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로 인하여 판서신거관은 대간(臺諫)의 탄핵을 받아서 삭탈관직(削奪官職)되었다. 대사헌윤원형이 그를 탄핵하기를, “호조 판서신거관은 본래 학식과 주견이 없는데, 겉으로는 근실한 체하면서 속으로 사악한 짓을 하고, 노론과 소론에 아첨하여 교묘하게 정변의 화(禍)를 벗어났습니다. 전번에 유인숙과 함께 전조(銓曹)에 들어가서 유인숙에게 아첨하여 빌붙은 사실이 없지 않았습니다. 그 마음가짐이 매우 음흉하니, 그의 관작을 삭탈하소서.” 하였다.(『명종실록(明宗實錄)』 명종 1년 8월 29일) 당시 대사헌윤원형이 신거관을 유인숙의 일당으로 몰아서 죽이려고 하였으나, 윤원형의 첩 정난정(鄭蘭貞)의 언니가 바로 신거관의 첩이었으므로, 정난정이 언니를 위하여 윤원형에게 간청하여 형부 신거관의 목숨을 살려 주었다. 그는 문외출송(門外出送) 곧 도성 바깥으로 추방하는 것을 당하여 도성에서 쫓겨나서 4촌 형 신거이(愼居易)의 광주(廣州) 농장에 나가서 임시로 거처하였다. 이때 가족은 도성 안에 남아 있었던 것 같다.

신거관은 어머니를 뵈려고 도성 안을 가끔 드나들면서 친구 구수담(具壽聃) · 허자(許磁) 등과 만났다. 문외출송은 원칙적으로 도성 안에 들어올 수 없었는데, 그가 도성에 드나들다가, 최보한 일당에게 발각되었다. 당시 송순(宋純)이 조정에 돌아와서 윤원형에 반대하는 이론을 전개하자, 소윤 최보한이 송순의 뒤에는 신거관 · 구수담 · 허자가 있다고 윤원형에게 밀고하였다. 1550년(명종 5) 대간에서 네 사람을 탄핵하여, 마침내 신거관을 강원도 평해군(平海郡)으로 유배하였다. 그때 신거관은 태연히 길을 떠나면서 오직 고령(高齡)의 어머니를 집에서 봉양할 사람이 없는 것만을 근심하였다.[『인재집』 권2 「신거관 신도비명」] 1551년(명종 6) 명종의 원자(元子)가 태어나는 경사를 맞아 사면령이 내려지자, 신거관은 집과 가까운 경기도 양주(楊州)로 이배(移配)되었다.[『인재집』 권2 「신거관 신도비명」] 1552년(명종 7) 4월 문정대비의 특명을 받아 유배지에서 방면되어 서울집으로 돌아왔다. 윤원형의 애첩 정난정이 대궐에 출입하면서 문정대비의 사랑을 받았는데, 신거관의 늙은 어머니가 상서(上書)하여 은혜를 청원하고, 정난정의 도움으로 유배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

그해에 어머니가 돌아갔는데, 그때 신거관은 나이가 이미 60여 세 가까이 되었으나, 어머니의 묘소에서 비바람을 맞으면서 3년 동안 여묘살이를 하였다. 마침 여막(廬幕)에서 노비 하나가 전염병에 걸려서 갑자기 죽었는데, 사람들이 감염될까 두려워하여 잠시 자리를 피할 것을 권하였으나, 그는 끝내 어머니 산소를 떠나지 않았다.[『인재집』 권2 「신거관 신도비명」]

1553년(명종 8) 명종이 전교하기를, “신거관에게 직첩(職帖)을 도로 주라.” 하여, 신거관은 작명(爵命)을 돌려받았다.(『명종실록』 명종 8년 윤3월 22일) 1555년(명종 10) 명종이 신거관에게 외직(外職)에 임명하도록 명하여, 여주 목사(驪州牧使)가 되었다. 그때 실록의 사평(史評)을 보면, “신거관은 청렴하고 강직하며 대범하고 검소하며, 법을 준수하면서 흔들리지 않았었다. 윤원형의 첩 정난정과 신거관의 첩은 형제간이었으나, 신거관은 윤원형에게 아부하려고 하지 않았으므로, 윤원형이 그를 몹시 미워하여 대간을 사주하여 그를 탄핵하여 귀양보냈다. 그는 귀양살이한 지 몇 해가 되었는데 이때에 와서 여주 목사에 서용(敍用)되었던 것이다.” 하였다.[『명종실록』명종 10년 12월 21일] 1557년(명종 12) 명종이 암행어사(暗行御史)를 보내어 여러 고을을 염찰(廉察)하게 하였는데, 여주의 신거관이 덕정(德政)을 베푼다고 보고하자, 명종이 특별히 표리(表裏) 한 벌을 내려주었다. 그때 신거관의 나이가 이미 많아서 근력이 점점 쇠약해졌으나, 세종대왕의 영릉(英陵)에 제사를 지낼 때 작헌례(酌祭禮) 곧 술잔을 올리고 제사지내는 예절을 행하면서 일절 자신의 병을 말하지 않았다. 명종 때 내관(內官) · 외관(外官) 중에서 훌륭한 관리를 꼽을 때 사람들은 모두 여주 목사신거관을 제일 으뜸으로 꼽았다. 그가 임기가 만료되어 돌아오자, 여주의 백성들이 송덕비(頌德碑)를 세워서 그의 덕을 칭송하였다.[『인재집』 권2 「신거관 신도비명」]

1560년(명종 15) 중추부 지사에 임명되어, 서반(西班)의 한직(閒職)에 있다가, 1564년(명종 19) 10월 10일 노병으로 서울집에서 세상을 떠났는데, 향년이 67세였다. 조야(朝野)에서 모두 말하기를, “훌륭한 분이 세상을 떠났다.” 하고, 아까워하였다.[『인재집』 권2 「신거관 신도비명」]

성품과 일화

신거관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성품이 소박하고 꾸밈이 없고, 행동이 성실하고 부지런하였다. 홍섬(洪暹)이 지은 그의 신도비명(神道碑銘)을 보면, “그는 온화하여 포용성이 있었고, 단정하여 남에게 거슬리는 말을 하지 않았다. 직무를 볼 때에는 절도가 있고 확고한 신조가 있었다. 집에 있을 때는 검소하였으나 관직에 있을 때에는 근면하였고, 집안일에는 사정이 어두웠으나 공무(公務)에는 정밀하였다. 친구에게 미덥게 행동하고 친구가 살았거나 죽었거나 간에 다른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하였다.[『인재집』 권2 「신거관 신도비명」] 또 『명종실록』의 「신거관 졸기(卒記)」를 보면, “집에 있을 때에는 일에 세세하지 않았으나 직무를 볼 때에는 일에 치밀하였다. 판서의 반열(班列)에 올랐으나, 옷은 비단옷을 즐겨 입지 않았고 음식은 맛있는 것을 구하지 않았으므로, 별다른 부귀한 모습이 없었다.” 하였다.[『명종실록』명종 19년 10월 10일]

그는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3형제가 홀어머니를 모시고 자랐으므로, 어머니에 대한 효도가 남달리 극진하였다. 아침마다 어머니가 세수할 때에는 반드시 몸소 세숫대야에 물을 떠다가 바쳤고, 어머니가 마루에 올라가면 손수 음식을 가져다가 밥상에 차리고, 종들에게 맡기지 않았다. 날마다 아들딸들과 함께 어머니 곁에 둘러앉아 어머니를 모시고 정담(情談)을 나누어서 그 마음을 기쁘게 해드렸다. 우애(友愛)도 지극하였는데, 형과 아우가 모두 그보다 먼저 죽자, 형제 집안의 살림살이를 돌보아주었을 뿐만 아니라 조카들의 혼례를 모두 뒷바라지해 주었다. 그는 화려한 것을 좋아하지 않아서 평생 무늬가 있는 비단옷은 입지 않았고 지나치게 맛있는 음식은 먹지 않았다. 다른 사람의 선행(善行)은 칭찬하여 널리 알렸으나, 다른 사람의 단점은 들추어 내어 말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집안 아이들의 잘못을 보면 바로 불러다가 야단치지 않고 하루종일 서로 마주앉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로써 마침내 본인 스스로 두려워하고 자복하거나, 뉘우치고 반성하게 만들었다.[『인재집』 권2 「신거관 신도비명」]

1527년(중종 22) 그가 젊어서 봉상 봉사에 임명되었는데, 봉상시는 나라의 제향(祭享)에 필요한 물품을 관장하는 곳이었으므로, 일에 서투른 신진 관료들은 으레 모든 일을 전례에 밝은 노복들에게 맡겼다. 그러나 신거관은 봉상시에 근무하면서 새벽에 출근하고 날이 저물어야 퇴청(退廳)하면서, 곡식을 빻고 갈며 제물을 삶고 익히는 미세한 일까지 모두 직접 감독하였으므로 제물이 지극히 정갈하게 마련되었다. 당시 영의정정광필이 도제조가 되어, 신거관이 봉상시를 떠나면 제물이 제대로 마련되지 못하게 될까봐 염려하여 봉상시의 일을 신거관에게 오랫동안 맡겼다. 이리하여 봉상시의 봉사를 장번(長番) 곧 오래 근무하는 제도로 근무하게 하는 것이 법제화되었다.[『인재집』 권2 「신거관 신도비명」] 이것이 신거관이 출세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 뒤에 영의정정광필이 신거관의 성실성을 높이 평가하여, 항상 신거관을 청요직에 천거해 주었기 때문이다.

1531년(중종 26) 그가 호조 좌랑이 되었을 때 전국에서 출납하는 금전과 곡식의 수량을 정확하게 회계 장부에 기록하게 하고 철저하게 검사하여 적은 양도 빠뜨리지 않았으므로 노회한 서리나 교활한 아전 중에 그 실상을 숨길 수 있는 자가 아무도 없었다. 그때 호조 판서신공제(申公濟)가 항상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뒷날 호조 판서가 될 사람이 이미 우리 낭중(郎中)에 있다.” 하였다.[『인재집』 권2 「신거관 신도비명」] 그 뒤에 인종 · 명종 교체 시기에 신거관은 마침내 호조 판서에 발탁되었는데, 신공제의 예언이 적중한 것은 신거관이 금전 출납에 남보다 밝았기 때문이다.

1546년(명종 1) 신거관이 호조 판서가 되었으나, 권력을 잡은 소윤 윤원형의 논박을 당하여 삭탈관직되고 문외출송 당하였다. 그때 사람들이 모두 미심쩍게 여겨서, “그처럼 근신하던 사람도 이 지경에 이른단 말인가.” 하였다. 신거관의 집안이 대대로 청빈하여 산업(産業)을 돌보지 않았는데, 그의 4촌 형님 신거이가 일찍이 전장(田庄)을 경영해 두어 뒷날을 계획하라고 권하였으나, 그는 즐겨 따르지 않았다, 그때 신거관이 파직되어 도성에서 갑자기 쫓겨났으나, 사방을 둘러봐도 갈 데가 없어서, 신거이의 광주에 있는 농사(農舍)에 가서 우거(寓居)하게 되었다. 신거이가 그를 나무라면서 말하기를, “일찍 내 말을 따랐더라면 어찌 이 지경에 이르렀겠는가?” 하였으나, 그는 오히려 뉘우치고 후회하는 기색이 없었다.[『인재집』 권2 「신거관 신도비명」]

윤원형은 소윤의 실력자 이기 등 여러 사람들이 죽자, 자기의 세력이 약화될까봐 염려하여, 귀양간 신거관도 자기 첩의 동서(同壻)라고 하여 높은 관직에 서용하여 자기편으로 만들려고 하였다. 윤원형이 두 번이나 신거관을 찾아와서 그의 빈한한 생활을 위로하고, 그가 입었던 갖옷을 벗어주고 갔다. 신거관은 바로 갓옷을 집어서 첩에게 주면서, “윤원형이 갖옷을 선물한 것은 순전히 너 때문이다. 이것을 집에 놔둘 수 없다.” 하고, 자기 첩에게 갓옷을 팔게 독촉하였다. 신거관은 윤원형에게 고마워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귀양에서 풀려났을 때에도 윤원형을 찾아가서 사례하지 않았다. 1553년(명종 8) 직첩을 되돌려 받은 뒤에 주변에서 그의 불우한 관운(官運)을 안타깝게 여겨서, 첩이 잘 주선하여 실권자 윤원형을 만나도록 권하였으나, 그는 조금도 굽히지 않고 말하기를, “모두 운명이다.” 하였는데, 그의 말과 얼굴빛에 누구를 원망하거나 탓하는 기색이 없었다. 1555년(명종 10) 신거관이 여주 목사에 임명되었을 때에는 윤원형이 그의 집에 없는 틈을 타서 그 집에 찾아가서 단지 명함만을 대문 안으로 던져 넣고 돌아와버렸다. 그러므로 신거관은 조정으로 돌아와서 벼슬자리를 회복하였으나, 다시 화려한 관직에 오르지 못하였다.[『명종실록』명종 19년 10월 10일 「신거관 졸기」]

만년에 중추부 지사의 한직(閑職)에 있으면서 후한 녹을 먹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서, 자제들에게 말하기를, “어찌 봉조청(奉朝請)에서 여생을 보낼 수 있겠는가?” 하였다.[『인재집』 권2 「신거관 신도비명」] 봉조청은 은퇴한 3품 이상 관원에게 주는 대우 관직이다. 세상의 온갖 풍파를 다 겪은 만년에 그는 일을 다시 해보려는 의욕도 끊어버린 채 언제나 송(宋)나라의 『자경편(自警編)』과 『명신언행록(名臣言行錄)』을 즐겨 읽었으며, 늙어서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인재집』 권2 「신거관 신도비명」] 그러므로 사관(史官)이 그를 평하기를, “신거관은 확고한 의지를 가지고 권세와 이익에 미혹되지 않은 사람이라고 이를 할 만하다. 다만 신거관은 지나치게 소박하고 노둔하여 고루한 단점을 면하지 못하였다.” 하였다.[『명종실록』명종 19년 10월 10일 「신거관 졸기」]

묘소와 후손

시호는 공간(恭簡)이다. 묘소는 경기도 광주(廣州) 장지리(長旨里)에 있는데, 인재(忍齋)홍섬(洪暹)이 지은 신도비명(神道碑銘)이 남아 있다.[『인재집(忍齋集)』 권2 「유명조선국 자헌대부 호조판서 겸지의금부사 동지경연성균관사 오위도총부도총관 증시공간 신공 신도비명(有明朝鮮國資憲大夫 戶曹判書 兼知義禁府事 同知經筵成均館事 五衛都摠府都摠管 贈諡恭簡 愼公神道碑銘)」]

부인 서산 정씨(瑞山鄭氏)는 사헌부 감찰(監察)정희(鄭熹)의 딸인데, 자녀는 2남 3녀를 낳았다. 장남 신숭선(愼崇善)은 장례원(掌隷院) 사의(司議)를 지냈고, 차남 신우선(愼友善)은 진사(進士)에 급제하였다. 장녀는 찰방(察訪)정응기(鄭應期)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찰방홍세훈(洪世勳)에게 시집갔고, 3녀는 참봉(參奉)안종경(安宗慶)에게 시집갔다.[『인재집』 권2 「신거관 신도비명」]

참고문헌

  • 『중종실록(中宗實錄)』
  • 『인종실록(仁宗實錄)』
  • 『명종실록(明宗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인재집(忍齋集)』
  • 『문소만록(聞韶漫錄)』
  • 『동각잡기(東閣雜記)』
  • 『순암집(順菴集)』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우계집(牛溪集)』
  • 『유천차기(柳川箚記)』
  • 『을사전문록(乙巳傳聞錄)』
  • 『잠곡유고(潛谷遺稿)』
  • 『포저집(浦渚集)』
  • 『해동역사(海東繹史)』
  • 『농암집(聾巖集)』
  • 『충재집(冲齋集)』
  • 『중봉집(重峰集)』
  • 『지퇴당집(知退堂集)』
  • 『월사집(月沙集)』
  • 『목재집(木齋集)』
  • 『야계집(倻溪集)』
  • 『우암집(寓庵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