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빈김씨(淑嬪金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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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 = ?]. 조선 3대 왕인 태종(太祖)의 1자 양녕대군(讓寧大君)의 부인. 본관은 광산(光山)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좌의정에 추증된 김한로(金漢老)이며, 어머니 선경택주(善慶宅主)정선 전씨(旌善全氏)는 대제학(大提學)전분(全賁)의 아들이자 조선이 창업되자 고려에 대한 절개를 지켜 두문동으로 들어간 전오륜(全五倫)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된 김자빈(金子贇)이다. 여동생은 노경린(盧慶麟)의 처로 이이(李珥)의 장모이다. 남편인 양녕대군이 세자에서 폐위되자 김숙빈도 폐위되었다가 세종(世宗) 때 삼한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이 되었다.

양녕대군의 부인

김숙빈(金淑嬪)은 태종의 장남인 양녕대군이제(李禔)가 왕세자일 때 왕세자빈으로 간택되었다.(『태종실록(太宗實錄)』 7년 7월 13일) 세자빈 김씨는 숙빈에 봉해졌고, 김숙빈의 아버지인 김한로는 좌군동지총제(左軍同知摠制)에, 어머니 정선 전씨는 선경택주로 삼았다.(『태종실록』 7년 7월 15일)

태종은 김숙빈의 어머니 선경택주가 세상을 떠나자 부의(賻儀)로 쌀과 콩 1백 석을 내려주었고, 양녕대군에게 명하여 본조(本朝)의 장인과 장모 예(例)에 따라 30일 동안 상복(喪服)을 입게 하였다.(『태종실록』 11년 2월 7일) 한편 김숙빈의 외삼촌인 대호군(大護軍)전맹겸(全孟謙)이 저자 사람의 생선을 빼앗고 횡포를 부리자, 태종은 김숙빈을 생각하여 전맹겸을 용서하였으나, 전맹겸이 뉘우치는 마음이 없자 순금사(巡禁司)에게 명하여 태(笞) 40대를 때리게 하였다.(『태종실록』 12년 6월 1일)

양녕대군의 폐위와 출궁

태종은 주색에 빠져있는 세자 양녕대군이 걱정이었는데, 결국 사건이 일어났다. 1416년(태종 16) 선공감(繕工監) 부정(副正)구종수(具宗秀)와 악공(樂工) 이오방(李五方)이 주색과 사냥을 좋아하는 세자 양녕대군에게 여색(女色)과 매를 바쳤다고 하여 의금부에 갇혔다.(『태종실록(太宗實錄)』 16년 9월 24일) 그리고 이듬해인 1417년(태종 17)에는 곽선(郭璇)의 첩인 어리(於里)와 세자 양녕대군이 간통했다는 사실이 발각되었다.(『태종실록』 17년 2월 15일) 태종은 화가 나서 양녕대군을 장인인 김한로의 집으로 보냈는데,(『태종실록』 17년 2월 17일) 양녕대군은 자신의 지난 행실에 대한 반성과 앞으로의 다짐을 종묘에 고하는 글로 써서 태종에게 올렸다.(『태종실록』 17년 2월 22일) 이에 태종은 허물을 뉘우친 양녕대군을 용서하며 궁으로 다시 돌아오게 하였다.(『태종실록』 17년 2월 22일)

그러나 그 다음해인 1418년(태종 18) 양녕대군은 어리를 다시 궁으로 불러들였을 뿐만 아니라, 어리가 아이를 가지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태종은 양녕대군을 구전(舊殿)에 거처하게 하고, 나와서 알현하지 못하도록 하였다.(『태종실록』 18년 5월 10일) 또한 태종은 양녕대군의 부인인 김숙빈을 지난번에 이어 이번에도 양녕대군의 잘못을 말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친정으로 내쫓았는데,(『태종실록』 18년 5월 10일) 이 때 김숙빈은 양녕대군의 아이를 가진 상태였다.(『태종실록』 18년 5월 30일) 양녕대군은 태종이 내린 처벌이 부당하다며 직접 글을 써서 태종에게 올렸다. 글을 읽은 후 태종은 양녕대군의 불효를 항상 덮어주었음에도 오히려 아버지인 자신을 원망한다며 더 이상 양녕대군의 잘못을 숨길 수 없다고 하였다.(『태종실록』 18년 5월 30일)

이어 신료들이 세자를 폐위해야한다는 상소를 올리자,(『태종실록』 18년 6월 2일) 태종은 결국 세자 양녕대군을 폐하여 광주(廣州)로 추방하고, 셋째아들 충녕대군(忠寧大君)을 세자로 삼았다.(『태종실록』 18년 6월 3일) 폐세자 이제는 양녕대군으로 강봉(降封)되었고, 김숙빈은 삼한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이 되었다.(『태종실록』 18년 6월 5일) 그리고 태종은 내관(內官) 이촌(李村)에게 명하여 양녕대군과 김숙빈의 관교(官敎)를 광주로 보냈다.(『태종실록』 18년 6월 5일)

이후 1432년(세종 14) 국대부인이 부부인으로 개칭되면서, 김숙빈은 수성부부인(隨城府夫人)이 되었다.

묘소와 후손

김숙빈의 무덤은 서울특별시 동작구 상도동 산65-42에 있는데, 1972년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1호로 지정되어 재단법인 지덕사(至德祠)에서 관리하고 있다. 지덕사는 양녕대군의 사당으로 원래 서울역 앞 남묘 부근에 있었는데, 1912년에 관악산맥 국사봉 밑에 있는 대군의 묘소 앞으로 옮겨왔다. 이곳에는 사당과 서고(書庫), 제기고(祭器庫) 등 3동의 건물이 있고, 사당의 후면에 양녕대군과 김숙빈을 합장한 묘소가 자리하고 있다.

김숙빈은 양녕대군과의 사이에서 3남 5녀를 두었는데, 딸 한 명은 일찍 세상을 떠났다.(『세종실록』 26년 12월 27일) 1남은 순성군(順成君)희안공(僖安公)이개(李豈)이며, 2남은 함양군(咸陽君)이안공(夷安公)이포(李布)이고, 3남은 서산군((瑞山君)이혜(李譿)이다. 그리고 1녀 영천군주(永川郡主)는 이번(李蕃)에게 출가하였고, 2녀 현주(縣主)는 이번(李蕃)에게 3녀 영평현주(永平縣主)는 김철균(金哲勻)에게 출가하였다. 그리고 4녀 현주(縣主)는 박수종(朴壽宗), 5녀 재령군주(載寧郡主)는 이자(李孜)와 각각 결혼하였다.

참고문헌

  • 『태종실록(太宗實錄)』
  • 『세종실록(世宗實錄)』
  • 지두환, 『태종대왕과 친인척』, 역사문화,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