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이창(宋爾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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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61년(명종16)∼1627년(인조5) = 67세]. 조선 중기 선조~인조 때의 문신. 자는 복여(福汝), 호는 정좌와(靜坐窩)이다. 본관은 은진(恩津)이고, 주거지는 충청도 회덕(懷德)이다. 임천군수(林川郡守)송응서(宋應瑞)의 아들이고, 송준길(宋浚吉)의 아버지이다. 어머니 광주이씨(廣州李氏)는 병조 판서이윤경(李潤慶)의 딸이다. 어려서 신응시(辛應時) · 김계휘(金繼輝)에게 배우고, 다시 이이(李珥) · 송익필(宋翼弼) · 서기(徐起)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선조 시대 활동

1590년(선조23)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는데, 나이가 30세였다. 음보(蔭補)로 1600년(선조33) 연원도찰방(連原道察訪)에 보임되었다가, 1603년(선조36) 경양도찰방(景陽道察訪)으로 전임되었다. 1604년(선조37) 선공감(繕工監)직장(直長)에 임명되었다가, 1606년(선조39) 전옥서(典獄署)주부(主簿)를 거쳐, 사헌부 감찰(監察)로 승진하였으며, 1607년(선조40) 진안현감(鎭安縣監)으로 나갔다. 그는 부임하여 가는 곳마다 직무를 잘 처리한다고 칭찬을 받았다.

광해군 시대 칠서 일당 사건

1608년(광해군즉위) 부친상을 당하고, 3년상을 마치자 1610년(광해군2) 사섬시(司贍寺)주부(主簿)에 임명되었다가 신녕현감(神寧縣監)으로 부임하였다. 1612년(광해군4) 서양갑(徐羊甲) · 박응서(朴應犀) 등 서자 출신 7명이 ‘강변칠우(江邊七友)’라고 하면서 작당하여 조령(鳥領)에서 은상인(銀商人)을 죽이고 은(銀)을 6, 7백 냥 정도 훔쳤다가 붙잡혔다. 주모자 서양갑의 아내가 송이창(宋爾昌)의 서출 누이였기 때문에 송이창도 1613년(광해군5) 사헌부의 탄핵을 받고 하옥되었다. 이이첨(李爾瞻)과 정인홍(鄭仁弘) 등의 대북파(大北派)가 박응서를 사주하여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왕으로 추대하기 위한 거사 자금을 마련하려고 은을 약탈하였다고 거짓 진술하도록 하였다. 이로써 <계축옥사(癸丑獄事)>가 일어나, 인목대비(仁穆大妃)는 유폐되고, 영창대군과 김제남(金悌南)은 죽었으며 서인(西人)들은 조정에서 축출되었다. 그때 서자 출신 7명을 ‘칠서일당(七庶一黨)’이라고도 불렀는데, 박응서 한 사람만 살아남고, 송이창의 서얼(庶孼) 매부 서양갑 등 6인은 모두 처형되었다. 옥에 갇혀서 추고(推考)를 당하던 송이창도 무고(誣告)를 당하였는데, 함께 연루된 자들이 옥사에서 벗어나려고 서로 함정에 빠뜨렸기 때문이다. 송이창은 온갖 고초를 겪다가 겨우 풀려났는데, 파직을 당하고 쫓겨나자 고향 회덕으로 돌아가서 은거하였다.

인조 시대 활동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일어나자, 곧바로 문의현령(文義縣令)에 임명되었고, 1625년(인조3) 군자감(軍資監) 판관(判官)으로 승진하였다. 1626년(인조4) 영천군수(榮川郡守)에 임명되었으나, 관찰사의 비위를 거슬러 파면되었다. 1627년(인조5) <정묘호란(丁卯胡亂)>이 일어나자, 김집(金集) · 김장생(金長生) 부자는 의병(義兵)을 일으켜서 후금(後金) 군사와 싸우기 위하여 막부(幕府)를 세우고 양호(兩湖)에 격문(檄文)을 띄웠다. 또 김장생은 장계를 지어서 인조에게 올린 다음에 전 부사(府使)송흥주(宋興周)를 뽑아서 부사(副使)로 삼고, 전 군수(郡守)송이창 등을 참모(參謀)로 삼았다. 그러나, 양국 사이에 화의(和議)가 성립되면서 의병도 해산하였다. 1627년(인조5) 5월 병으로 충청도 회덕의 집에서 죽으니, 향년 67세였다.

성품과 일화

송이창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의 성격은 돈후(敦厚)하고 겸손하고 신중하였으나, 정의를 보면 용감히 나갔고 화복(禍福)을 만나면 쉽게 마음이 움직이지 않았다. 일을 논할 때에는 곧잘 강개(慷慨)하고 시비(是非)가 명백하였다. 광해군 때 파직되어 고향 집으로 돌아와서, 냇가에 작은 정자를 짓고 날마다 시골의 친구들과 노소(老少) 친척을 불러서 술과 음식을 대접하였다. 그가 마음을 열고 흉금을 털어놓으니, 사람들이 모두 함께 이야기하기를 좋아하여, 문 앞에 신발이 항상 가득하였다. 그러나 청탁을 하거나 명예를 더럽히는 일 따위는 일체 화제(話題)에 올리지 않았다. 낙향한 다음 서울의 빈 집은 상경한 선비들의 공부방으로 내어 주기도 하였는데, 묵재(黙齋)이귀(李貴), 양천경(梁千頃), 강해(姜海) 등이 여기서 공부하였다.

그는 늙어서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바로 동춘당(東春堂)송준길이었다. 그는 어린 아들에게 항상 가르치기를, “사람으로서 『소학(小學)』과 『가례(家禮)』를 알지 못하거나, 그것을 알고도 실천하지 아니하면 사람이라고 할 수 없다.” 하였다. 임종(臨終)할 적에 자제들에게 몸을 부축하게 명하여, 앉아서 갓을 바로 쓰고 평일과 같이 근엄한 자세로 눈을 감았다.

묘소와 후손

묘소는 충청도 공주(公州) 유성현(儒城縣) 사한리(沙寒里) 오도산(五道山)의 선영에 있는데, 부인과 합장하였다. 동방(同榜) 친구 청음(淸陰)김상헌(金尙憲)이 지은 묘갈명(墓碣名)과 우복(愚伏)정경세(鄭經世)가 지은 묘지명이 남아 있다. 부인 광산김씨(光山金氏)는 중추부 첨지사김은휘(金殷輝)의 딸로, 자녀는 1남을 두었다. 아들 송준길(宋浚吉)은 이조 판서를 지냈는데, 그의 외손녀가 인현왕후(仁顯王后)이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청음집(淸陰集)』
  • 『우복집(愚伏集)』
  • 『계곡집(谿谷集)』
  • 『묵재일기(黙齋日記)』
  • 『사계전서(沙溪全書)』
  • 『상촌집(象村集)』
  • 『신독재전서(愼獨齋全書)』
  • 『혼정편록(混定編錄)』
  • 『송자대전(宋子大全)』
  • 『여헌집(旅軒集)』
  • 『구봉집(龜峯集)』
  • 『사우당집(四友堂集)』
  •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
  • 『율곡전서(栗谷全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