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시범(宋時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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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79년(선조12)∼1623년(인조1) = 45세]. 조선 중기 광해군~인조 때 활동한 무신. 자는 희문(希文)이다. 본관은 여산(礪山)이고, 경기도 장단(長湍) 출신이다. 송정(宋珽)의 아들인데, 친구 이서(李曙)와 함께 인조의 잠저(潛邸) 때 최측근으로서 <인조반정(仁祖反正)>과 <이괄(李适)의 반란> 때 큰 역할을 담당하였다. 정사공신(靖社功臣) 3등에 책훈되고 호산군(壺山君)에 봉해졌다.

선조~광해군 시대 활동

처음에 어버이를 위해 사마시에 합격하고 여러 번 과거(대과)를 보았으나 급제하지 못하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자, 과거에 응시하지 않고, 힘써 농사를 지어서 어머니를 공양(供養)하였다. 그는 힘이 남달리 뛰어나서 1608년(선조41) 무과(武科)에 급제하였다. 미처 벼슬에 나아가기도 전에 모친상을 당하여 상례를 마치고, 1611년(광해군3) 처음으로 선전관(宣傳官)에 임명되었다. 이때 북방에서 누르하치가 만주의 여진족을 통일하고 후금(後金)을 세우면서 조선과 잦은 충돌을 일으켰다. 그리하여 조선은 북쪽 변경에 대비하여 문무(文武)를 갖춘 젊은 인재를 선발하였는데, 상국(相國)이항복(李恒福)이 그를 추천하니, 광해군(光海君)이 특별히 궁시(弓矢)를 내려주고 병법(兵法)을 익히라고 격려하였다. 비변사(備邊司)낭청(郎廳)에 임명되었으나, 광해군의 정사가 점차 어지러워지는 것을 보고 벼슬을 버리고, 고향 장단(長湍)으로 돌아가서 은거(隱居)하였다. 대신이 그의 현능(賢能)을 알고 훈련원(訓練院) 부정(副正) 등에 임명하였으나, 끝내 벼슬에 나아가지 아니하였다.

인조의 최측근 심복

인조(仁祖)가 잠저(潛邸)에 있을 때에 그를 만나보고 평생의 지인(知人)을 만난 것처럼 크게 기뻐하였다고 한다. 이서(李曙)에게 “이 사람은 지용(智勇)이 뛰어나 큰일을 맡길 만하다.”는 글을 써 보냈다. 이서는 이미 송시범과 친한 사이였으므로, 인조를 만났던 것은 이서의 소개였던 것 같다. 이때부터 두 사람은 인조를 도와서 반정(反正)을 추진하였다. 1623년(인조1) 3월 <인조반정(仁祖反正)>의 거사가 있을 때, 그는 갑옷 입은 병졸들을 거느리고 앞장서서 가장 많은 공훈을 세웠으므로, 인조가 신임하여 특별히 별장(別將)으로 삼아 금중(禁中) 숙직(宿直)을 맡겼다. 그해 윤10월 인조가 김류(金瑬) · 이귀(李貴)를 불러 대신들과 함께 빈청(賓廳)에 모여서 정사공훈(靖社功勳)을 감정(勘定)하여 53명을 녹훈(錄勳)하였는데, 이괄(李适)은 2등 공신이 되고, 송시범은 3등 공신이 되었다.

공신 책봉에 불만을 품은 이괄은 평안도병마사(平安道兵馬使) 겸 부원수(副元帥)로서 평안도 영변(寧邊)에 있었다. 인조는 송시범을 평안도 곽산군수(郭山郡守)로 삼았다가, 다시 운산군수(雲山郡守)로 옮기게 하고, 특별히 종2품하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진시켜서,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게 하였다. 부원수이괄이 음밀히 모반할 뜻을 가졌다고 의심한 인조는 암행어사를 보내어 송시범에게 밀서(密書)를 전달하였는데, 그는 그 글을 받고 즉시 단기(單騎)로 평안도병마사이괄의 군중(軍中)을 찾아갔다. 여기에 유숙하며 이괄을 만나려고 하였으나 끝내 이괄을 만나지 못하고 돌아왔는데, 인조가 이괄을 설득하려고 그를 보냈던 것 같다. 그는 돌아오다가 11월 18일 평안도 희천(熙川)에 이르러 갑자기 죽었는데, 나이가 45세였다. 그의 갑작스런 죽음도 그 원인을 알 수 없는데, 이괄이 사람을 뒤따라 보내어 그를 죽인 것이 아닌가 의심된다.

성품과 일화

송시범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힘이 호랑이처럼 세고 용맹이 큰 곰처럼 우직하였다. 뜻이 활달하고 대범하여, 명예 따위에 마음을 쓰지 않았다. 성질이 돈후하고 신중하여 전혀 남에게 거만하게 구는 일이 없었고, 남의 위급한 것을 즐겨 도와주었으며 의(義)를 사모하는 마음이 끝이 없었다.

8세 때에 이미 경서(經書)를 읽고, 또 글씨를 잘 썼다. 글씨를 써달라고 하는 손님이 있었는데, 그는 특별히 “효 · 제 · 충 · 신(孝悌忠信)”이라고 크게 썼으므로, 손님이 시험하여 보려고, “너는 다른 학문을 잘 하는 것이 없어서, 이 네 글자만을 주로 쓰는 것이냐?” 하였다. 그러자 송시범이 대답하기를, “임금을 섬기고 사람과 물건에 혜택이 미치는 일이 모두 이 네 가지에 있습니다.” 하니, 손님이 감탄하며 그를 특이하게 여겼다.

묘소와 추모

묘소는 경기도 양주(楊州) 묘적산(妙寂山) 아래의 선영(先塋)에 있는데, 부인이 부장(祔葬)되었다. 미수(眉叟)허목(許穆)이 지은 비명(碑銘)이 남아 있다.(『미수기언(眉叟記言)』 권20) 그의 부음(訃音)을 듣고, 인조가 크게 놀라며 슬퍼하여 예관(禮官)을 보내어 사제(賜祭)하고 특별히 그 상구(喪柩)를 서울로 호송케 하였다. 송시범에게 아들이 없었는데, 인조가 입후(立後)하여 제사가 끊기는 일이 없게 하라고 엄명하여, 동생의 아들 송유경(宋孺敬)을 양자로 삼았다. 1624년(인조2) 분충 찬모 정사공신(奮忠贊謨靖社功臣)의 칭호와 병조 판서의 벼슬을 추증하고, 호산군(壺山君)에 봉하였다. 그 아내 최씨(崔氏)는 정부인(貞夫人)으로 삼고 월름(月廩)을 후하게 내려주었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인조실록(仁祖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계해정사록(癸亥靖社錄)』
  • 『미수기언(眉叟記言)』
  • 『송자대전(宋子大典)』
  • 『경정집(敬亭集)』
  • 『월봉집(月峯集)』
  • 『암서집(巖棲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