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대립(宋大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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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42년(중종37)∼1583년(선조16) = 42세]. 조선 중기 선조 때 활동한 유일(遺逸). 자는 사강(士强), 호는 외암(畏庵)이다. 본관은 서산(瑞山)이고, 아버지는 청홍도우후(淸洪道虞候: 충청도우후)송옥청(宋玉淸)이고, 어머니 풍산홍씨(豊山洪氏)는 만호(萬戶)홍세신(洪世信)의 딸이다. 사암(思庵)박순(朴淳)의 문인이고, 율곡(栗谷)이이(李珥)와 우계(牛溪)성혼(成渾)과 가깝게 교유(交遊)하였다.

선조 시대 활동

1567년(명종22)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는데, 나이가 26세였다. 그 뒤에 과거 시험을 포기하고 학문에만 정진하여 이름난 선비가 되었다. 1573년(선조6) 성균관(成均館)의 추천으로 의금부(義禁府)도사(都事)에 임명되었다가, 장례원 사평(司評)으로 전임되었다. 선조 초기에 이탁(李鐸) · 박순 · 노수신(盧守愼)의 건의를 받아들여, 과거 출신이 아닌 남행(南行)이나 초야에 묻힌 유일(遺逸)을 발탁하여 대간(臺諫)의 관직에 임명하였다. 이때 송대립을 비롯하여 성혼 · 최영경(崔永慶) · 정인홍(鄭仁弘) · 홍가신(洪可臣) · 김천일(金千鎰) 등이 대간에 임명되었다. 송대립은 사헌부 감찰(監察)에 임명되었다가 호조 · 형조 · 공조 3조의 좌랑(佐郞)을 거쳐 정랑(正郞)으로 승진하였다. 이이가 이조의 인사 행정을 맡아볼 때 학행(學行)으로 추천되어 사헌부 지평(持平)에 발탁되었는데, 그는 글을 올려서 사양하다가 부임하였다. 동서 분당(分黨)이 격화되어 1576년(선조9) 이이가 벼슬에서 은퇴하기로 결정하자 그를 만류하기도 하였다. 어버이를 봉양하기 위하여 황해도 배천군수(白川郡守)로 자원하여 나갔다가, 1583년(선조16) 5월 병에 걸려서 사직하고 돌아오던 길에 개성(開城)에서 죽었는데, 나이가 겨우 42세였다.

성품과 일화

송대립의 자질과 성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배움을 알면서부터 박순에게 사사하니 그의 학문이 더욱 진전되었다. ‘애일당(愛日堂)’이란 현판(懸板)을 걸어놓은 작은 집에서 항상 엄숙하게 무릎을 꿇고 앉아서 책을 읽었다. 풍모(風貌)가 맑고 높아서 남들과 잘 어울리는 일은 적었으나, 한 시대의 선비들이 그를 추종하였고, 성혼과 이이가 가장 아끼는 후배 학자가 되었다.

묘소와 후손

묘소는 처음에 경기도 고양(高陽) 견달산(見達山)에 있었으나, 1616년(광해군8) 남양(南陽) 백학리(白鶴里)로 이장하였는데, 부인은 오른쪽에 묻혔다. 둘째 아들 친구 낙전당(樂全堂)신익성(申翊聖)이 지은 묘갈명(墓碣銘)이 남아 있다.(『낙전당집(樂全堂集)』 권12) 부인 광주이씨(廣州李氏)는 별좌(別坐)이곤(李琨)의 딸인데, 자녀는 4남 2녀를 두었다. 차남 송연(宋淵)은 중추부 경력(經歷)을 지냈고, 3남 송명(宋溟)은 훈련원(訓鍊院)정(正)을 지냈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낙전당집(樂全堂集)』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동각잡기(東閣雜記)』
  • 『문소만록(聞韶漫錄)』
  • 『석담일기(石潭日記)』
  • 『우계집(牛溪集)』
  • 『율곡전서(栗谷全書)』
  • 『혼정편록(混定編錄)』
  • 『은봉전서(隱峯全書)』
  • 『이암유고(頤庵遺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