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롱귀(小弄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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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서여진 울라인으로, 누르하치에게 귀부한 인물.

개설

소롱귀는 본래 해서여진의 울라(홀라온)부 사람이다. 선조대 말 울라[烏喇]부의 버일러 부잔타이([布占泰], bujantai)가 두만강 유역의 번호(藩胡)들을 공략할 때 조선과 충돌이 벌어졌는데, 이때 울라의 대표로서 조선과의 교섭을 담당하였던 인물이다. 그는 광해군대 초반까지 조선과의 교섭을 중재하였지만 1613년 1월 건주여진(建州女眞)의 누르하치([奴兒哈赤], nurhaci)가 울라를 병합한 뒤에는 그에게 귀부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소롱귀는 누르하치에게 귀부한 이후에는 건주여진의 대표로서 계속해서 조선과의 교섭을 담당하였다. 그를 소롱이(小弄耳)라고도 하는데, 이(耳)라는 것은 ‘귀’라는 발음을 훈독한 것이다. 앞의 소(小)에 오랑캐 혹은 여진인을 의미하는 호(胡)를 붙인 소호(小胡)라는 표현으로도 자주 등장하였다.

활동 사항

1603년 8월경부터 홀라온(울라)의 군대가 조선의 육진(六鎭)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1605년 3월에는 종성(鍾城)의 동관진(潼關鎭)을 함락시키고 이때 첨절제사전백옥(全伯玉)이 전사하였다. 조선은 이해 5월 건퇴(件退)에 주둔하고 있던 한 무리의 홀라온군을 공격하였으나 대패하였다. 조선에서는 홀라온군이 건주여진과 연합한 것으로 판단하여, 직첩의 제수를 통한 강화를 추진하였다. 이로 인하여 홀라온에서 파견한 사절들이 조선을 왕래하기 시작하였는데, 이때 가장 빈번히 조선을 방문하였던 인물이 소롱귀였다.

소롱귀는 1605년 8월 직첩을 받기 위하여 조선의 사절 손문효와 교섭하였는데 이때 북병사이시언은 종성부사유비에게 두만강변에서 그에게 술을 대접하라고 지시하였다(『선조실록』 38년 8월 19일). 같은 해 11월 조선은 홀라온에 대한 공격을 늦추고 그 동정을 정탐하기 위한 목적으로 이난을 소롱귀와 함께 홀라온으로 들어가 직첩 문제를 논의하도록 하였다(『선조실록』 38년 11월 22일). 1606년 5월 조선은 정충신을 홀라온에 파견하여 100장의 직첩을 전달하였고, 총 105명의 포로를 송환하는 데 성공하였다. 당시 홀라온의 버일러 부잔타이는 배반한 조선의 번호 가운데 일부를 송환하기로 약속하였는데, 비변사에서는 소롱귀로 하여금 그 약속을 이행하도록 조치할 것을 강조하기도 하였다(『선조실록』 39년 5월 9일).

소롱귀는 광해군대에도 홀라온의 대표로서 조선과 교섭하였다. 1610년에 부잔타이는 소롱귀를 종성에 보내어 100장의 직첩에 대한 관복을 지급해 달라고 요청하였고, 시장의 개설도 논의하였다(『광해군일기』 2년 2월 14일). 그는 1611년과 1612년에도 홀라온의 사절로서 조선을 방문하였으나(『광해군일기』 3년 3월 9일)(『광해군일기』 4년 8월 8일) 1619년에는 누르하치의 사절로서 조선을 방문하여 초피 500장을 올렸다(『광해군일기』 11년 2월 24일). 이로 보아 1613년 누르하치가 홀라온을 병합하였을 때 그에게 귀부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소롱귀는 심하(사르후[薩爾滸]) 전투 이후 조선과 후금의 교섭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는 조선을 직접 방문하여 교섭을 벌이기도 하였고, 당시 후금의 포로가 되었던 강홍립 등 조선군 지휘부와도 왕래하였다.

조선에서도 비교적 익숙한 소롱귀를 우대하면서 교섭의 국면을 유리하게 조성하려고 노력하였다. 1619년 12월 소롱귀가 만포로 도착하였을 때 조선에서는 그에게 잔치를 베풀어 주면서 후금의 사절이 만포가 아닌 함경도의 회령으로 왕래하도록 유도하여 명나라의 감시를 피하고자 하였다(『광해군일기』 11년 12월 17일)(『광해군일기』 11년 12월 28일)(『광해군일기』 12년 3월 24일).

1621년에 이르면 소롱귀는 ‘조선에 자주 왕래하여 익숙한 인물’로 여겨졌고, 조선은 그를 통하여 후금에 요구 사항을 전달하였다. 이때 조선에서는 비교적 친숙하고 우호적인 소롱귀를 통하여 국서와 차관의 파견 문제를 논의하거나 홍타이지가 조선에 대한 강경론을 펼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통하여 침략 의사를 거두도록 해 줄 것을 요구하기도 하였다(『광해군일기』 13년 2월 11일)(『광해군일기』 13년 9월 9일).

그러나 소롱귀는 만포나 회령이 아닌 의주의 대안까지 와서 조선과 교섭을 요구하였고, 누르하치의 편지와 함께 강홍립의 장계를 가져오기도 하였다(『광해군일기』 13년 6월 2일)(『광해군일기』 13년 6월 3일)(『광해군일기』 13년 6월 23일). 조선에서는 소롱귀가 홀라온에 있던 시기에 그곳을 방문하였던 정충신을 재차 파견하여 그와 교섭하도록 하였다(『광해군일기』 13년 6월 19일)(『광해군일기』 13년 9월 10일). 조선에서는 소롱귀와의 교섭을 별도로 기록하여 이를 후금의 동태와 정세를 파악하는 자료로서 활용하기도 하였다(『광해군일기』 13년 8월 28일).

참고문헌

  • 『책중일록(柵中日錄)』
  • 박정민, 『조선시대 여진인 내조 연구』, 경인문화사, 2015.
  • 장정수, 「선조대 대여진(對女眞) 방어전략의 변화 과정과 의미」, 『조선시대사학보』 67, 조선시대사학회,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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