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도(盛京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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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문신 남구만이 조선의 북방 변경과 청나라의 성경을 중심으로 한 만주의 경계를 그림으로 그려 숙종에게 보고한 지도.

개설

성경도(盛京圖)는 남구만이 청나라의 『성경지(盛京誌)』를 모본으로 해서 그린 만주와 그 주변의 지도이다. 성경(盛京)은 심양(瀋陽)의 옛 이름이다. 1625년 청 태조가 요양(遼陽)에서 이곳으로 도읍을 옮겼고, 청 태종 때에 성경이라고 명하였다. 청 세조가 중원을 통일하고 북경으로 천도한 뒤 봉천부(奉天府)를 설치하고, 유도(留都)로 삼았다. 이후 조선말기까지 성경은 만주의 행정, 군사 중심지로 존재하였다. 따라서 「성경도」는 심양을 중심으로 만주의 주요 부분과 조선 변경을 묘사한 지도이다.

편찬/발간 경위

숙종 때 조선과 청국 변경에서 잦은 분쟁이 발생했고 심지어 살인 사건까지 발생하여 양국 간의 외교 문제로 비화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1712년(숙종 38) 청국의 요청에 따라 백두산정계비가 세워져 변경에 대한 양국의 관심이 고조되었다. 특히 청나라가 명나라 재건 세력에게 패할 경우 관서 지방을 경유해서 백두산 방향으로 가로지른다는 영고탑(寧古塔) 회귀설까지 유행하여 변경 방어에 대한 관심이 높아갔다. 변경에 대한 관심은 관방(關防)의 중요성과 지도 제작으로 이어졌다. 1673년(현종 14) 함경감사이던 남구만이 「성경도」를 제작하였다. 남구만은 함경감사로 재직시 백두산 주변에 무산(茂山) 등 세 곳에 진보(鎭堡)를 설치하고 서쪽에는 후주(厚州)를 설치하는 등 변방 방어에 힘썼으므로 지도 제작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병조 판서로 있으면서 4군을 다시 설치하기도 하였다.

「성경도」 후에도 1696년(숙종 22) 이징명의 「해서오성지도(海西五城地圖)」와 1706년(숙종 32) 이이명이 제작한 「요계관방도(遼薊關防圖)」가 있다. 남구만이 「성경도」를 제작한 배경에서 주목할 만한 대목은 조선의 건국과 한반도 고대사를 언급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변경 지역이 태조의 선대인 목조·익조가 탄생한 곳이며, 두만강 북쪽인 알동(斡東) 지역이 왕실 선조의 활동 지역임을 강조하였다. 또 요좌(遼左) 지역이 기자(箕子)가 봉지(封地)로 받은 지역이며, 개원현(開原縣)은 부여국(扶餘國)이고, 고구려의 시조 주몽(朱蒙)이 나라를 세운 곳이라고 강조하였다. 다만 남구만은 압록강과 두만강의 근원이 모두 백두산 꼭대기에서 출발하여 동서로 나뉘어 흘러 바다로 들어가는데, 이것이 바로 조선의 계한(界限)이라며 두 강을 조선의 북방 경계선으로 보았다. 결국 간도 내지는 만주에 대한 소유권을 방기하는 입장이었다. 그럼에도 남구만은 변방의 개척과 활용을 강조하여 조정 내에서 선지적인 시각을 보였다. 반면 남구만이 「성경도」를 올릴 때 영의정유상운과 사관(史官)들은 변경의 개척이 오히려 분쟁을 야기하고 방어상 약점을 만든다는 이유로 사군육진 지역의 방기를 주장하여 시대착오적 입장을 보이기도 하였다.

서지 사항

「성경도」는 『성경지』를 모본으로 했으나 10리마다 정(井)자 형의 모눈을 그리고 거리를 계산하는 방식으로 새롭게 제작한 지도이다.

구성/내용

남구만은 1697년 5월 숙종에게 「성경도」를 바치면서 지도 제작의 배경과 목적을 기술하였다. 그는 청 황실이 중원에서 패하고 만주의 근원지로 돌아갈 때 조선의 서북 변경을 거칠 것이라고 보았다. 특히 1691년(숙종 17) 청에서 백두산 그림을 그려간 것이 그 배경이라고 보았다. 이에 따라 청나라를 방어하기 위한 준비의 하나로 지도를 작성하였다고 한다.

「성경도」는 청국의 지리지를 저본으로 작성하였다. 남구만은 연행사에게 『성경지』를 얻어 그 안의 지도를 모본으로 하여, 그것을 넓혀서 큰 폭으로 만들어 거기에 이수(里數)를 긋고 주요 산, 강 등 자연지형과 고을, 역참 등을 표시하였으며, 그림 하단에 역대의 연혁과 당시 설치된 관청을 기록하여 두루마리 본으로 만들었다.

참고문헌

  • 『성경통지(盛京通志)』
  • 『약천집(藥泉集)』
  • 김선민, 「옹정제의 성경(盛京)지역 통치」, 『명청사연구』34,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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