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원시(生員試)

sillok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사서오경(四書五經)을 시험 보는 과거로 합격자를 생원이라 함.

개설

문무과와 달리 생원시는 관직에 진출하기 위한 시험이 아니어서 합격한다 해도 실제 관리에 임용되는 것이 아니었다. 생원시에 합격하면 성균관에 입학할 자격을 주었고 성균관에 입학하여 원점(圓點) 300점을 따면 문과에 응시할 수 있었다.

생원시는 식년시(式年試)와 증광시(增廣試)로 구분되며, 초시(初試)와 복시(覆試) 두 차례의 시험으로 합격자를 선발하였다. 식년시와 증광시는 시험 시기에서 차이가 날 뿐 시험의 절차와 방법 등은 모두 같았다. 합격자에게는 생원이라는 칭호를 부여하였다.

제정 경위 및 목적

1392년(태조 1)에 태조는 즉위교서에서 진사시에 해당하는 감시(監試)를 폐지하였다. 고려말 사장(詞章)을 중시한 데서 오는 폐단을 없애기 위하여 사장을 시험하는 진사시를 없앤 것이다. 대신 주자학에서 중시하는 경학 중심의 유학을 장려하기 위하여 1395년(태조 4) 경서(經書)를 강(講)하는 생원시(生員試)를 설치하고(『태조실록』 4년 12월 7일), 의(疑)·의(義) 각각 한 가지씩 질문하여 100명을 뽑아 후생들의 향학심을 권장하도록 하였다(『태조실록』 5년 5월 6일).

내용

생원시에는 3년마다 정기적으로 실시하는 식년시와 왕의 즉위와 같이 나라에 큰 경사가 있을 때 실시하는 증광시가 있었다. 식년시는 자(子)·오(午)·묘(卯)·유년(酉年)에 해당하는 해에 정기적으로 실시하였다. 식년시를 설행하지 못한 경우는 심한 가뭄과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인한 5회뿐이었다.

태종 즉위 기념으로 처음 실시한 증광시는 선조 이전까지 새 왕이 즉위하였을 때만 시행하였다. 선조대부터 나라에 크고 작은 경사가 생기면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증광시를 설행하기 시작하였는데 후기로 가면서 설행 명분이 늘어났고 자주 설행하게 되었다. 즉, 존호(尊號)를 올리거나 태자의 탄생과 왕비·왕세자의 책봉, 세자의 입학·가례(嘉禮), 원자(元子)·원손(元孫)의 탄생 등 국가의 경사를 치를 때마다 증광시를 실시하였으며, 경사가 합쳐질 때는 대증광을 설행하여 인원을 늘려 뽑았다. 조선조 500여 년간 식년시 163회, 증광시 67회로 모두 230회의 생원시를 설행하였다.

생원시는 초시와 복시의 두 단계로 이루어졌다. 1차 시험인 초시는 서울과 각 도에서 실시하였다. 서울에서 치르는 시험을 한성시(漢城試)라고 하고 지방에서 치르는 시험을 향시(鄕試)라고 하였다. 초시에 합격하면 2차 시험이자 최종 시험인 복시에 응시하였다. 복시는 서울에서 치르며 회시(會試)라고도 하였다.

합격 정원은 법적으로 정해졌는데 초시의 정원은 지역별로 차등을 두었다. 한성시에는 200명, 각 도별로 실시하는 향시에는 경기도 60명, 충청도 90명, 전라도 90명, 경상도 100명, 강원도 45명, 평안도 45명, 황해도 35명, 함경도에 35명이 배정되어 모두 700명을 뽑았다. 초시에서는 지역차를 감안하여 정원에 차등을 두었지만 복시에서는 그런 고려를 하지 않았다. 복시 정원이 100명이지만 복시에 응시할 때 이미 출신도별 인원에서 차이가 났다.

실제 합격자들의 거주지를 보면 서울 거주자의 비율이 33%로 압도적으로 높았다. 이어서 경상도 17%, 충청도 15%, 전라도 11%, 경기도 10%, 평안도 4%, 강원도 4%, 황해도 4%, 함경도 2%의 분포를 보였다. 이 같은 지역 간 격차는 시험별 또는 시대적으로 차이가 있었다. 대체로 조선전기에는 서울 출신이 반 정도를 차지하는 경우가 많고 후대로 갈수록 지방 출신자들의 합격 비율이 높아졌다.

복시 합격 정원 100명은 19세기 중엽 철종 이전까지는 잘 지켜졌다. 1859년(철종 10) 증광생원시에서 113명을 합격시키면서부터 100명을 초과하여 뽑기 시작하였고, 고종 연간에는 합격 정원을 거의 매번 초과하였다.

시험 장소는 1소와 2소로 나누어 시행하는데 시험 운영의 편의뿐 아니라 응시자가 시관(試官)과 상피관계(相避關係)에 있거나 아버지와 아들이 같은 장소에서 보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대체로 1소는 예조, 2소는 성균관인 경우가 많았다.

생원시의 시험 과목은 유교 경전에 관한 지식을 시험하기 위한 것으로 오경의(五經義) 1편과 사서의(四書疑) 1편을 제술하도록 하였다. 초시와 복시의 과목이 같았다. 오경의는 『시경(詩經)』·『서경(書經)』·『주역(周易)』·『예기(禮記)』·『춘추(春秋)』의 한 구절을 제시하고 그 대의를 묻는 시험이며, 사서의는 『논어(論語)』·『맹자(孟子)』·『대학(大學)』·『중용(中庸)』 중 한 문제를 내어 논문을 짓게 하는 것이다.

1783년(정조 7)에 반포된 『대전통편』에서는 춘추의(春秋義)를 빼고 사경의(四經義)만 시험 보았다. 2편 중 자신 있는 문제를 먼저 쓴 다음 다른 문제의 답안을 쓰게 되어 있는데 먼저 작성한 것을 상편(上編), 나중에 작성한 것을 하편(下編)이라고 하였다. 수험생 수가 많아져 채점에 어려움이 생기자 시관들이 상편만 채점하게 되면서 하편은 형식적으로 작성하는 경향이 생겼다. 이런 경향은 점점 심해져 숙종 대에 이르면 사경의와 사서의 각 1편씩을 보았지만 실제로는 양자택일하는 양상이 생겼다.

최종 합격자 100명은 1등 5명, 2등 25명, 3등 70명의 세 등급으로 나누어 합격시켰다. 19세기 후반 합격 인원이 늘어난 경우에 1등·2등은 변화가 없었고 늘어난 인원은 모두 3등에 포함시켰다.

합격자를 발표하는 것을 출방(出榜)이라고 하는데 출방 후에는 왕이 합격자에게 합격증서인 백패를 수여하는 방방의(放榜儀)라는 의식이 행해졌다.

방방의가 끝나면 다음 날 합격자들은 왕에게 사은(謝恩)하고, 그다음 날에는 성균관에 가서 알성(謁聖)의 예를 올렸다. 방방이 끝나면 악공·광대·재인을 동반하고 3일 동안 시내를 돌아다니는데 이를 유가(遊街)라고 하였다.

변천

조선초에는 생원시 합격을 선망하여 이미 관직에 나간 사람들도 생원시에 응시하는 경우가 많았다. 15세기에 생원시 합격자의 22% 정도가 관직 또는 관품을 가지고 있을 정도였다. 이는 생원시 설치의 본래 목적에서 벗어난 것이었다. 성종대에 관리들의 응시 제한 조처로 통덕랑 이하만 응시할 수 있도록 하였고 『경국대전(經國大典)』에서 법제화하였다.

법적으로 생원시에는 죄를 범하여 영구히 임용할 수 없게 된 자, 장리(贓吏)의 아들, 재가(再嫁)한 여자와 실행한 여자의 아들과 손자·서얼 자손은 응시할 수 없었다. 이중 서얼 자손에게는 응시가 허용되었는데, 1583년(선조 16)에 납미허통(納米許通)의 조건으로 허용하였고, 1696년(숙종 22)에는 허통의 절차 없이 응시할 수 있게 하였다. 처음에는 업유(業儒)를 칭하고 유학이라는 명칭을 함부로 쓰지 못하게 하였으나 1708년(숙종 34)에는 아들대부터는 유학을 칭할 수 있도록 완화하였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이성무, 『한국의 과거제도』, 집문당, 1994.
  • 최진옥, 『조선시대 생원진사연구』, 집문당, 1998.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