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품진열소(商品陳列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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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기에 주로 일본 상품의 판매를 촉진하기 위해 상설로 진열하였던 곳.

개설

상품진열소는 통감부 시기 주로 일본 상품의 소비를 촉진하도록 마련되었다. 상품진열소는 일정한 기간 동안 상품들을 한자리에 모아 전시하고 소개하는 박람회와 더불어 그 역할이 더욱 활성화되었다. 부산에서는 상품진열소에서 1906년 일한상품박람회가 개최되었으며, 서울에서는 상품진열소를 중심으로 1907년 경성박람회가 개최되었다. 상품진열소에 진열되는 상품의 대다수는 일본 수입상품이었으며, 한국에서 생산된 상품도 일부 전시되었다. 그러나 상품진열소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일본인들이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상품진열소는 상품의 상설 진열과 판매 촉진을 위해 마련되었으며 이는 특히 박람회 개최와 함께 이루어졌다. 부산의 상품진열소에는 부산상공회의소 안에 위치해 있었으며 1906년 4월 부산에서 일한상품박람회가 개최되었다. 일한상품박람회는 대한제국에서는 처음 열리는 박람회였으며, 일본 상품 시장의 개척에 무역항으로서 부산의 역할이 커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마련한 것이었다. 일한상품박람회는 부산 광복동에 상품진열관을 설치하여 한국 상품은 거의 없었고, 일본 상품 30여 만 점을 전시하였다. 이 박람회는 상인들에게 다양한 물품을 관람할 기회를 제공하고, 상업 운영의 지혜를 얻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는 명목을 내세웠지만, 속내는 일본 상품의 한국 소비를 촉진하게 하려는 목적에서 마련된 것이었다. 박람회 기간에 설치된 상품진열관은 박람회 이후 상설 상품진열소가 되었다.

경성에서는 1905년부터 상업회의소 내에 상품진열소를 창립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있었으나 실제로 설치된 것은 1907년 경성박람회를 개최하면서였다. 1907년 경성박람회는 동대문과 남대문을 상품진열소로 수용하기도 하였다. 경성박람회 역시 상품 생산과 판매를 촉진한다는 명목을 내세웠으나 일본 상품의 판매 활성화를 목적으로 한 것이었다.

조직 및 역할

부산의 일한상품박람회는 부산에서 정치 경제 분야를 대표하는 인물들을 중심으로 위원회를 구성하였으나, 실질적으로 박람회를 운영한 것은 일본인 상업회의소 회원인 수출 무역상들이었다. 박람회의 협찬회는 이시하라 한우에몬[石原半右衛門] 일본 거류민단장을 협찬회장으로 하였으며, 조선인들도 함께 협력한다는 취지를 보여줄 수 있도록 조선인 협찬회도 조직하였다. 상품진열소에서는 일본인뿐 아니라 한국인에게도 진열 상품이 친숙하게 보일 수 있도록 여러 가지 주의와 설명을 한자와 한글로 병기하고, 한국인들을 고용하여 편의를 제공하기도 하였다.

경성박람회는 통감부 총무장관인 쓰루하라 사다기치[鶴原定吉]가 회장을 맡고, 농상공부와 탁지부, 통감부가 후원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졌다. 박람회의 대표격인 총대(總代)를 의친왕(義親王)으로 내세웠지만, 회장부터 평의원은 전부 일본인 상인과 실업가들이 도맡아 하였다.

변천

순종은 1909년 1월 7일부터 13일까지 대구, 마산, 부산, 창원을 순행하는 기간 동안 1월 9일 부산에서 부산 상품진열소를 방문하였다(『순종실록』 2년 1월 9일). 순종은 남서 순행 시 지역의 상인 및 인사들과 접견하였으며 하사금을 내렸다. 황해도에서는 황해관찰도청에서 설치한 상품진열소를 순종의 하사금으로 내부 확장 공사를 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부산과 경성의 상품진열소 설치 이후 지방에도 상품진열소가 설치되어 일제강점기에도 일본 상품의 판매와 한국 내 일본인들의 상품 판매를 촉진하는 역할을 했다.

참고문헌

  • 『남순행일기(南巡幸日記)』
  • 『주한일본공사관기록(駐韓日本公使館記錄)』
  • 『기안(起案)』
  • 『통감부문서(統監府文書)』
  • 『황성신문(皇城新聞)』
  • 이왕무, 「대한제국기 순종의 남순행 연구」, 『정신문화연구』107, 2007.
  • 차철욱, 「1906년 ‘일한상품박람회’와 수입무역의 동향」, 『지역과 역사』21, 2007.
  • 한규무, 「1907년 경성박람회의 개최와 성격」, 『역사학연구』38,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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