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방목(司馬榜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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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과거 시험 중 하나인 생원진사시의 합격자 명부.

개설

사마방목(司馬榜目)은 생원진사시를 사마시라고도 한 데서 연유하였다. 연방(蓮榜)이라 불리기도 하였으나, 흔히 쓰이지는 않았다. 사마방목에는 합격자 개인의 신상에 관한 정보와 시험에 관한 다양한 정보가 수록되었다. 조선시대에 설행된 생원진사시는 모두 230회이나 현재 전해지는 사마방목의 수는 188회분 정도였다. 문과방목의 경우는 시험이 행해질 때마다 만들어지는 단회방목과 이를 집성한 종합방목이 전해지나 사마방목은 집성되지는 않아 단회방목의 형태로만 전해졌다.

편찬/발간 경위

방목은 시관들에 의해서 작성되었다. 시험이 끝나면 시관들은 답안지인 시권(試券)에 점수를 내어 합격자를 정하였다. 정해진 합격자 명단을 왕에게 보고하여 최종 합격자를 확정하였다. 최종 합격자가 정해지면 방목을 작성하였다.

생원진사시는 초시·복시 두 단계로 이루어져 초시방목과 복시방목이 작성되었지만 일반적으로 사마방목이라 함은 최종 시험 합격자 명단인 복시방목을 말하였다. 초시방목은 4부를 작성하여 1부는 감영에, 3부는 예조·사헌부·사관(四館)에 나누어 보냈다.

합격자 발표 후에 교서관에서 합격자의 명단과 인적 사항에 관한 내용을 정리하여 사마방목을 발간하였다. 국가기관 이외에 합격자 개인이나 그 후손에 의하여 간행된 경우도 있었다. 같은 시험의 합격자들이 서로 재원을 마련하여 찍어서 나누어 갖거나 집안에 선대의 방목이 전해지지 않아 후손에 의하여 중간(重刊)되는 경우였다.

사마방목은 한 회분의 합격자에 관한 내용이 정리되는 단회방목의 형태로 각 도서관에 산재해 있기 때문에 자료 이용에 어려움이 많았다. 흩어져 있는 사마방목을 모은 것이 1991년 국학자료원의 영인본 『사마방목』이었다. 이 영인본은 1684년부터 1894년 사이의 96회분의 사마방목을 수록하여 당시까지 알려진 사마방목을 망라하지는 못하였다.

1997년 한국정신문화연구원(현 한국학중앙연구원) 역사연구실에서 186회분의 사마방목을 전산화하여 『CD-ROM 사마방목』을 간행하였다.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는 이를 기초로 방목 자료를 추가로 수집 보완하여 데이터베이스화한 내용을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시스템’을 통하여 온라인 서비스하고 있다.

서지 사항

조선시대에 설행된 생원진사시는 모두 230회이었다. 시험이 행해질 때마다 방목이 만들어졌을 것으로 보이나 사마방목이 간행된 회수는 정확히 알 수 없었다. 문과방목이 집성되어 종합방목의 형태로 전해지는 것과는 달리 사마방목은 단회방목의 형태로 전해졌다. 현전하는 방목도 전국 도서관에 산재해 있으며 후손들이 소장하고 있는 경우도 있어 정확한 회수는 파악하기 어렵다.

사마방목의 간행 형태는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는 국가에서 간행한 것으로 대부분 현전 방목이 이에 속하였다. 주로 교서관(校書館)에서 간행한 것이고 간혹 지방 관아에서 간행한 것도 있었다. 둘째는 개인 문집에 교우록(交友錄)·사우록(師友錄)의 형태로 수록된 것으로 주로 15세기 방목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셋째는 중간된 경우로 후손에 의하여 필사 또는 간행된 것으로 주로 16세기 전반기의 방목에 많이 보였다. 대체로 이른 시기의 방목은 문집이나 중간본(重刊本) 형태를 띠는 것이 많고 17세기 말 이후의 방목은 교서관에서 간행한 원본이 많이 전해지고 있다.

구성/내용

사마방목은 은문(恩門)과 원방(原榜), 권말 부록으로 구성되었다. 권수(卷首)의 은문에는 시험 장소인 1소와 2소, 각 시소 시험관의 직책과 이름을 밝혔다. 시험관은 각 소마다 종2품 이하 2명, 정3품 이하 3명의 시관과 감찰 1명을 감시관으로 두었다.

원방은 생원방·진사방의 순서로 이루어졌다. 1등 5명, 2등 25명, 3등 70명으로 등제되었다. 원방의 내용은 합격자 본인에 관한 사항과 가족 사항으로 나누어졌다. 합격자에 관해서는 본인의 전력(前歷)·이름·자(字)·생년간지·본관·거주지가 기재되어 있었다. 가족에 관한 사항으로는 아버지의 관직과 이름, 부모 및 조부모의 생존 여부, 안항(雁行)이라 하여 형제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양자로 간 경우에는 생부의 관직과 이름, 생가 부모의 생존 여부가 함께 기재되었다. 17세기 초부터는 형제의 이름을 적서(嫡庶) 형제로 구분하여 기재하였다. 18세기 중반부터 개인별로 일시(一詩)·이부(二賦)의 형식으로 시험 장소와 시험 과목을 표기하기 시작하였다.

부록에는 시험에 관한 다양한 정보가 담겨 있었다. 합격자와 관련된 것으로 양시(兩試)·연벽(聯璧)·경외입격자수(京外入格者數) 등 통계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다. 양시는 생원시와 진사시에 동시에 합격한 사람을 말하였다. 쌍중(雙中)·구중(俱中)이라고도 하였다. 양시 합격은 생원시와 진사시가 하루걸러 치러지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양시 합격자는 16세기에는 한 회 평균 15.5명 정도로 많았으나, 17세기에는 8.5명, 18세기에는 5.8명, 19세기에는 1.7명으로 후기로 갈수록 줄었다.

연벽은 형제가 한 해에 합격한 경우를 말하는데 연중(聯中)·쌍연(雙聯)이라고도 하였다. 연벽자는 형제의 이름을 나란히 적어 놓았다. 17세기 중엽 이후의 사마방목에는 거의 빠짐없이 기재되어 있었다.

경외입격자수는 서울과 도별로 합격자 수를 기재하였는데 개성부(開城府)는 처음부터 별도로 기재하였고, 18세기 이후에는 강화부·광주부·수원부도 별도로 취급하였다. 도별 합격자의 통계는 대체로 정확하였다. 처음에는 생원, 진사의 구별이 없었으나 18세기 후반 이후에는 빠짐없이 생원·진사를 나누어 입격자의 수를 기재하였다.

양시와 연벽은 15세기 후반부터 보이기 시작하여 17세기 중반 이후 거의 빠짐없이 기재되었고, 경외입격자의 수는 16세기 후반부터 기재되기 시작하여 17세기를 거쳐 18세기에 이르면 거의 빠짐없이 기재되었다.

16세기 후반에 가면 방회(榜會)와 관련된 내용이 기재되기 시작하여 일정하지는 않으나 18세기 중반까지 지속되었다. 방회는 동방(同榜)들의 모임으로 역할에 따라 방중색장(榜中色掌)·은문색장(恩門色掌)·수권색장(收卷色掌)·공포색장(貢布色掌)·제마수(齊馬首) 등으로 구분되었다. 각 색장별로 생원·진사로 구분하여 이름을 적어 놓았다.

권말 부록은 후기로 갈수록 풍부해져 1·2소의 시험문제, 초시와 복시의 시험 일자, 출방일, 방방 일자와 장소 및 시간이 기재되었다. 18세기 이후에는 초시의 시험관과 시험 장소, 도별(道別) 장원이 기재되었다. 초시에 해당되는 승보(陞補)·합제(合製)로 직부(直赴)된 사람의 명단 등 시험의 운영에 관한 많은 정보가 담겨 있었다. 19세기 말에 가서는 합격한 지 60년이 된 회방인(回榜人)의 이름도 기록하였다.

이와 같이 풍부한 방목의 내용은 초기 방목에서부터 모두 갖추어 기재되는 것은 아니었다. 이른 시기의 방목 중에는 필사본이나 문집에 수록되어 전해지는 것들이 있는데 이 경우 가장 기본이 되는 은문·전력·본관·거주지 등이 빠져 있는 경우도 있었다. 일반적으로 후대로 갈수록 기재 사항이 많아지며 특히 권말 부록이 풍부해졌다.

참고문헌

  • 최진옥, 『조선시대 생원진사연구』, 집문당, 1998.
  •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한국학중앙연구원, http://people.aks.ac.kr/index.a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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