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돈방(査頓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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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0년(광해 2) 시관들이 부정을 저지른 경술별시를 비아냥거리는 말.

개설

1610년에 실시한 경술별시에서 시관들이 사적인 관계를 이용하여 부정적 방법으로 아들·사위·동생·조카·사돈을 합격시켰다. 이를 비아냥거려 사돈방이라 불렀다.

내용 및 특징

1610년(광해 2) 10월 22일에 시행된 별시(別試)는 선조(宣祖)의 위패를 태묘(太廟)에 봉안한 것과 세자의 책봉·입학·관례의 4경을 축하하기 위한 과거였다. 문과에서 신광업(辛光業)을 장원으로 하여 20명이 급제하였다(『광해군일기』 2년 10월 22일).

전시(殿試)의 시관은 좌의정이항복(李恒福), 이조 판서이정구(李廷龜), 형조 판서박승종(朴承宗), 호군조탁(曺倬)·허균(許筠)·홍서봉(洪瑞鳳)·이이첨(李爾瞻), 승지이덕형(李德泂)이었다. 시관들이 제멋대로 사사로운 관계를 따른 결과, 박승종은 아들 자흥(自興)을 뽑고, 조탁은 동생 길(佶)을 뽑고, 허균은 형의 아들 보(寶)와 형의 사위 박홍도(朴弘道)를 뽑고, 이이첨은 사위의 아버지 이창후(李昌後)와 이웃 친구 정준(鄭遵)을 뽑았는데, 박자흥이 또한 그의 사위였다. 이를 두고 당시 사람들이 ‘아들 사위 동생 조카 사돈의 합격자 명단[子壻弟姪査頓榜]’이라고 비아냥거렸다(『광해군일기』 2년 11월 3일).

최종 시험인 전시뿐 아니라 1차 시험인 초시에서도 부정행위가 있었다. 문과 2소에서 김극임(金克任)이 차비관(差備官)과 내통하여 시권에 주필(朱筆)로 고쳐 쓴 곳이 여러 글자가 있었고(『광해군일기』 2년 10월 8일), 3소에서 서리 등이 답안지를 옮겨 역서(易書)하는 하인이 왕래할 때에 응시자들이 절취한 것으로 오인하고 시관에게 와서 모욕을 가하면서 파장(罷場)해야 한다는 주장을 내놓기까지 하였다(『광해군일기』 2년 10월 9일).

조정의 비난은 대독관(對讀官)허균에게 집중되었고(『광해군일기』 2년 11월 13일), 사간원이 과거 합격을 취소하고 시관과 승지를 모두 파직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광해군일기』 2년 11월 19일). 수차에 걸친 대간들의 요청 끝에 허보(許寶)와 변헌(卞獻)을 합격자 명단인 방목에서 삭제하고(『광해군일기』 2년 12월 1일), 허균은 함열현(咸悅縣)으로 귀양 보내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광해군일기』 2년 12월 2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