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봉(秘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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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권에 기재한 응시자의 신원 정보를 남이 보지 못하게 종이를 붙여서 봉하는 것.

개설

응시자는 시험 전에 시험지를 구입하여 시험지 우측 상단에 응시자의 직함·성명·본관·거주지·연령, 4조의 직함과 성명을 적은 뒤 보이지 않도록 그 위에 종이를 풀로 붙여서 봉하였다. 풀로 붙인 종이의 상·중·하 3곳에 근봉(謹封)이라고 수서하였다. 이를 비봉(秘封) 또는 피봉(皮封)이라고 하였다.

연원 및 변천

고시관이 응시자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비봉을 하게 한 것인데 근봉이라 쓴 두 글자가 누구의 답안인지 알리는 표적으로 이용되는 일이 있었다. 응시자 중에는 근봉을 스스로 쓰지 않고 복수(福手)라 하여 재상이나 명사로부터 차서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를 막기 위하여 1650년(효종 1)에는 근봉이라는 도장을 만들어 녹명 때 찍게 하였다. 1651년(효종 2)에는 피봉을 들여다볼 수 없도록 대나무 통처럼 좁게 만들게 하였다.

절차 및 내용

비봉의 작성 방법은 『전률통보(典律通補)』의 과거비봉식(科擧秘封式)에 자세히 기술되었다. 본인의 직함·성명·나이·본관·거주지, 아버지의 직함과 성명(양자로 간 응시자는 생부를 열서함), 할아버지의 직함과 성명, 증조부의 직함과 성명, 외조부의 직함과 성명·본관을 나란히 썼다. 본인과 사조(四祖)를 각각 1행씩 5행으로 열서하였다. 5행으로 사조를 적도록 한 시험은 식년·증광·별시문과의 초시·복시·전시, 정시문과의 복시, 식년·증광 소과의 초시·복시였다. 알성시·정시·춘당대시·절일제에서는 사조를 다 기재하지 않고 아버지만 기재하였다. 본인의 직함·성명·나이·본관·거주지와 아버지의 직함·이름을 2행으로 썼다. 응시자의 신원 정보를 모두 적은 뒤 그 위에 종이를 풀로 붙여 봉하였다. 풀로 붙인 종이의 상·중·하 3곳에 근봉이라고 스스로 쓰고 녹명 때 도장을 받았다. 이를 외타인(外打印)이라 하였다.

문과의 경우는 비봉 부분을 잘라 내고 다른 종이에 주서(朱書)로 역서(易書)하여 채점하는데 소과의 경우는 역서하지 않고 제출한 답안 그대로 채점하므로 근봉이라 쓴 필적이 누구의 답안인지를 알리는 표적이 되기 쉬웠다. 그러므로 응시자 중에는 근봉을 스스로 쓰지 않고 복손[福手]이라 하여 재상이나 명사에게 써 주기를 청하는 경우가 있었다. 이를 막기 위하여 1650년(효종 1) ‘근봉’이라는 글자를 새긴 도장을 만들어 찍게 하였다(『효종실록』 1년 6월 3일).

응시자 중에서 피봉을 일부러 넓고 크게 하여 들여다볼 수 있도록 하는 일이 있자 피봉 격식을 개정하여 피봉의 모양을 대나무 통처럼 좁게 만들어 엿보지 못하게 하였다. 이를 어길 경우 응시자는 물론 시험에 관여한 당상과 낭청도 같이 처벌하도록 하였다(『효종실록』 2년 3월 28일). 소과의 시지도 문과처럼 피봉을 잘라 내고 일련번호로 자호(字號)를 사용하게 하였다(『효종실록』 2년 7월 16일). 피봉을 잘라 내는 할거법(割去法)은 오래가지 못하였으나 도장을 찍어 주는 것은 계속되었다.

비봉의 격식에 맞지 않게 쓰면 합격자 명단에서 제외[拔去]시켰다가 나중에 복과(復科)시켜 주기도 하였다. 1725년(영조 1) 정시(庭試)에서 윤급(尹汲)이 비봉 가운데 나이와 거주지를 쓰지 않아 합격자 명단에서 제외시켰는데 예조(禮曹)의 등록(謄錄)에서 전례를 찾아본 후 복과시킨 일이 있었다(『영조실록』 1년 11월 2일)(『영조실록』 1년 11월 8일).

생원진사시의 합격자를 등제할 때 성적으로 장원을 정하지 않고 비봉을 엿본 뒤 문지가 있는 집안의 자손을 장원으로 삼았다(『영조실록』 41년 2월 4일).

참고문헌

  • 조좌호, 『한국과거제도사연구』, 범우사, 1996.
  • 김동석, 「조선시대 시권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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