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국영사관(佛國領事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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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고종 42) 을사조약 이후 한국과 프랑스의 외교 관계가 정지되면서 프랑스공사관이 격하된 명칭.

개설

영사관은 입국사증인 비자 발급을 주요 업무로 하는 곳으로, 국가 간 외교 업무나 정치적인 문제는 다루지 않는 곳이었다. 따라서 외교 관계를 맺은 국가 사이에 영사관만이 존재한다는 것은 상대 국가의 외교 능력이 없어졌거나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였다. 대한제국은 1905년 일본과 을사조약을 체결하면서 외교권을 강탈당하였다. 결국 대한제국 외부(外部)는 폐쇄되고 외국 주재 한국 공관들도 철수하였다. 동시에 대한제국에 주재하던 외국 공사관들도 점차적으로 철수하였다. 대신 한국의 외교권을 장악한 일본 외무성과 외교 업무를 진행하였다. 그런데 프랑스[法國]는 공사관을 폐쇄하지 않고 프랑스총영사관으로 바꾸어 자국의 경제적 이익 보호와 자국민의 영사 업무를 위하여 지속하였으며, 일제강점기에도 유지하였다.

설립 경위 및 목적

1905년(고종 42) 대한제국이 을사조약으로 외교권을 상실하자 당시 미국공사관을 비롯한 외국 공사관들은 철수하거나 폐쇄되었고 소수의 영사들이 주재하며 영사 업무만을 취급하였다. 그런데 프랑스는 기존의 공사관을 영사관으로 바꾸어 유지하면서 조선 체류 프랑스인을 위한 영사 업무와 프랑스 방문을 꾀하는 조선인이나 일본인을 위한 비자 발급 업무 등을 하였다.

조직 및 역할

1905년(고종 42) 을사조약 체결 이후 프랑스공사관은 총영사관이 되었다. 영사관은 독일인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하여 영사제도를 이어갔다. 순종이 영사관 직원들에게 훈장을 수여할 정도로 대한제국 정부와는 호의적인 관계를 유지하였다(『순종실록』 즉위년 12월 28일). 총영사관의 영사들은 외교 업무보다 프랑스의 경제적 이익과 한국과의 통상 업무 진행에 관한 업무를 보았다. 또한 영사에게는 영사재판권이 있어서 자국민의 소송이 발생하였을 때 해결해야 하는 의무가 있었다. 다만 1911년 일본과 외국과의 조약에서 최혜국 대우가 사라져 일제강점기에 영사들의 재판권은 없어졌다.

한편 고종과 순종 등 대한제국의 고위층과는 지속적인 왕래를 하였다. 신년 축하연이나 경축일에는 고종 등을 알현하였다. 식민지 시기인 1910년대에도 문안인사를 올리거나 이취임식, 경축일에는 어김없이 덕수궁과 창덕궁을 방문하였다.

참고문헌

  • 『매일신보(每日新報)』
  • 『주한일본공사관기록(駐韓日本公使館記錄)』
  • 국사편찬위원회, 『고종시대사』, 1967.
  • 국사편찬위원회, 『한불수교 120년사의 재조명』, 국사편찬위원회, 2007.
  • 김원모, 『근대한국외교사연표』, 단국대학교 출판부, 1984.
  • 김학준, 『서양인들이 관찰한 후기 조선』, 서강대학교 출판부, 2010.
  • 이순우, 『정동과 각국공사관』, 하늘재, 2012.
  • 임경석·김영수·이항준, 『한국근대외교사전』, 성균관대학교,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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