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산봉화(峯山烽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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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제2봉수로 간봉 제6노선의 내지봉수(內地烽燧)로, 오늘날 경상북도 창녕군 대합면 합리의 태백산 정상 부근에 위치.

개설

봉산봉화는 부산 가덕도 천성보(天城堡)에서 시작된 봉수신호의 연결을 담당하였다. 봉산봉화의 신호는 성주 각산(角山)의 봉수로 전달되었다. 천성보에서 봉산봉화를 거쳐 각산으로 연결되는 이 노선은 제2봉수로 제6노선 간봉 노선으로, 충주 마산에서 직봉(直烽)에 합쳐졌다. 이후 충청도와 경기도의 여러 봉수를 차례로 거친 다음 당일 초저녁에 광주의 천림산(天臨山)에 이르러 최종적으로 목멱산(木覓山)의 제2봉수에 연결되었다. 1425년(세종 7) 이전에 처음 설치되었으며, 1895년(고종 32)에 철폐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봉산봉화는 조선전기에 경상도 창녕현(昌寧縣)에 속하였으며, 이후 조선시대 전 기간 동안 운용되었다. 경상우도수군절도사가 봉산봉화를 관리하였는데, 경상도 남해안을 침범하는 왜구의 침입 여부를 한양의 경봉수(京烽燧)에 알리기 위한 목적으로 설치되었다.

변천

최초의 지지(地誌) 기록은 1425년(세종 7년)에 편찬된 『경상도지리지(慶尙道地理志)』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에 따르면 봉산봉화로 불리며 현의 북쪽 7리 지점에 위치하였는데, 남쪽으로는 영산 계성현의 여통봉화와 17리 182보, 북쪽으로는 현풍의 소이산봉화와 30리 거리에서 서로 신호를 주고받았다. 『경상도속찬지리지(慶尙道續撰地理誌)』에서는 명칭이 합산봉화(合山烽火)로 바뀌었으나, 대응하는 봉수는 동일하였다. 이후에 간행된 지지에서는 명칭이 합산봉수(合山烽燧)로 바뀌었으며, 1864년(고종 1)에 편찬된 『대동지지(大東地志)』부터는 다시 태백산봉수(太白山烽燧)로 명칭이 변화되어 오늘에 이른다.

『조선왕조실록』에는 1464년(세조 10)에 병조에서, 창원부(昌原府) 봉산(峯山)과 양산군(梁山郡) 계명산(鷄鳴山)의 봉수는 모두 다 낮고 작아서 먼 곳과는 서로 통하지 않으므로, 봉산봉화는 합산(合山)으로, 계명산의 봉수는 위천역(渭川驛) 북산(北山)으로 옮기자는 경상도관찰사의 관문(關文)에 의거해 이설(移設)을 추진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세조실록』 10년 2월 15일). 이 기록에 따르면 봉산봉화는 1464년 이후에 합산으로 이설되었기 때문에 1469년(예종 1)에 편찬된 『경상도속찬지리지』에 합산봉화로 기록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오늘날 봉산봉화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

봉산봉화는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을 계기로 봉수제가 철폐되고, 이듬해에 군부의 주청(奏請)에 의해 각지의 봉대와 봉수군이 폐지됨에 따라 그 기능을 다하게 되었다(『고종실록』 32년 윤5월 9일).

최근에는 문화재 전문 기관의 학술 조사를 통해 봉수의 규모와 현황 및 봉수가 운영되던 당시의 부속 시설 등이 확인되었다. P00012564 01.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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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경상도지리지(慶尙道地理志)』
  • 『경상도속찬지리지(慶尙道續撰地理誌)』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대동지지(大東地志)』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김성미, 『창녕 태백산 봉수대』, 우리문화재연구원, 2008.
  • 우리문화재연구원, 『창녕 태백산봉수대 문화재 정밀지표조사 결과보고서』, 우리문화재연구원, 2008.
  • 김성미, 「창녕지역의 봉수고찰」, 『한국성곽학보』제13집, 한국성곽학회,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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