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시문과초시(別試文科初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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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시문과의 1단계 시험.

개설

별시는 태종대부터 설행되기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시험 과목이나 방법, 선발 인원 등에 일정한 규정이 없었으나 영조대 『속대전』에서 규정이 정비되었다. 별시초시는 서울에서만 보는 경우와 서울과 지방에 나누어 보는 경우가 있었다.

내용 및 특징

별시는 중시(重試)의 대거(大擧)로 실시되거나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 경과로 설행되었다. 초시와 전시 두 단계의 시험으로 진행되었다. 『속대전』에 의하면 별시문과초시는 서울에서 보고 시험장은 2개소로 나누어 보았다. 시관은 종2품 이상 관원 3명, 정3품 이하 관원 4명으로 구성되었다. 초시의 정원은 일정하지 않았다. 300명 또는 600명으로 하고 그때마다 왕에게 아뢰어 결정하였다. 시험은 초장, 종장 두 단계로 실시되었다. 초장에서는 논(論) 1편과 표(表)·전(箋) 중 1편, 부(賦) 1편으로 하고 윤번으로 2가지 문제를 냈다. 종장은 대책(對策) 1편과 강경을 시험 보게 하되, 강경은 사서(四書) 가운데 한 책을 뽑아 시험 보게 하고, 삼경(三經) 중에서 본인이 원하는 한 책을 배송하게 하였다.

초시에서 600명을 뽑는 경우 서울은 2곳으로 나누어 각기 150명을 뽑고, 경기는 40명을 뽑되 서울 인원에 합하였다. 나머지 260명은 전라도와 충청도는 각 50명, 경상도는 60명을, 강원도와 평안도는 각 30명을, 함경도와 황해도는 각 20명을 뽑도록 하였다(『현종실록』 13년 1월 20일).

변천

처음에 별시는 1회의 제술시험으로 당락을 결정하였으나 명종대에 와서 강경이 정례화되고 초시와 전시의 절차를 갖추게 되었다. 별시는 정해진 법규가 없어 시험이 있을 때마다 시험 방법이나 과목, 인원 등을 결정하였다가 『속대전』에서 정비되었다.

참고문헌

  • 『속대전(續大典)』
  • 원창애, 『조선시대 문과급제자 연구』,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학대학원 박사학위논문,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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