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이대(伐伊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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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함경도 회령에 거주한 여진족 추장.

개설

벌이대는 선조대에 회령부(會寧府)에 소속되어 있던 번호(藩胡) 추장이었다. 임진왜란 이후 상당수의 번호가 조선에 반항하던 것과 달리 벌이대는 반호(叛胡)의 활동을 조선에 미리 알려 주며 협력하였다. 1605년(선조 38)에 오랍(烏拉)의 포점태(布占泰)가 두만강 유역의 육진 지역을 공격할 때, 맞서 싸웠다.

변천

1588년(선조 21) 3월에 증보된 『제승방략』에 의하면, 벌이대는 회령부 서쪽으로 3식(息)(60리, 약 23.6㎞) 떨어져 있고, 80호(戶)가 사는 보여로(甫如老) 부락(部落)의 추장이었다. 그러나 벌이대는 1602년(선조 35) 이후부터 회령부 경내로 이주하여 조선의 보호를 받았다. 임진왜란이 발발하면서 상당수의 두만강 유역의 번호가 조선에 반항하였다. 조선은 이들에 대하여 강경책과 회유책을 구사하며 안정을 추구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선에 협력한 번호 중 한 명이 벌이대였다. 예를 들어, 그는 1602년 7월에 적호(賊胡) 노토(老土)의 아들 아로(阿老) 등 100여 명이 고령(高嶺)의 독소(篤所) 부락 및 회령부 경계 강 건너 15리쯤(약 5.9㎞)에 있는 사이이동(沙伊耳洞)의 번호 왕주(往主) 부락을 함께 포위한다고 보고하였다. 그리고 이 내용은 사실로 밝혀졌다(『선조실록』 35년 7월 10일).

이후 기록은 없지만, 벌이대는 조선에 우호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1605년에 포점태가 벌이대를 공격하자 조선군이 구원해 주었기 때문이다. 1603년에 두만강 유역을 공격하였던 포점태는 1605년에 다시 군사를 보냈다. 즉, 같은 해 4월 15일에 포점태의 기병 500여 기가 회령 지역의 연대(烟臺) 근처에 거주하는 벌이대의 부락을 포위하여 공격하였다. 이때 벌이대는 포점태군에게 맞서 싸웠고, 회령의 판관이 포수와 사수를 거느리고 구원하였다. 조선군은 적 5명을 사살하고, 2명을 생포, 말 8필과 갑주(甲冑) 총 7부(部)를 가져오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벌이대의 부락은 크게 피해를 입어 우마(牛馬)와 재축(財畜)을 남김없이 약탈당하였다(『선조실록』 38년 4월 25일)(『선조실록』 38년 4월 26일).

참고문헌

  • 『제승방략(制勝方略)』
  • 박정민, 『조선시대 여진인 내조 연구』, 경인문화사, 2015.
  • 한성주, 「임진왜란 전후 女眞 藩胡의 朝鮮 침구 양상과 조선의 대응 분석 」, 『동양사학연구』 132,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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