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진남(白振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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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64년(명종19)~1618년(광해군10)= 55세]. 조선 중기 선조~광해군 때 서예가 · 문장가. 자는 선명(善鳴), 호는 송호(松湖)이다. 본관은 해미(海美)이고, 주거지는 전라도 영암(靈岩)이다. 아버지는 선조 때 ‘8대 문장가’이던 옥봉(玉峯)백광훈(白光勳)이다. 김상헌(金尙憲) · 조희일(趙希逸)과 절친한 사이였다.

선조~광해군 시대 활동

사학(四學)의 과시(科試)에서 시(詩) · 부(賦)가 뛰어나서 아버지의 친구인 이이(李珥)의 사랑을 받았다. 향시(鄕試)에 합격한 다음에 아버지를 모시고 서울 집에 우거하고 있었는데, 정여립(鄭汝立)이 찾아와서 백진남이 연소하고 영명(英明)한 것을 보고 그 아버지 백광훈에게 자기의 죽도(竹島) 서실(書室)에 아들을 데려가서 공부를 가르치겠다고 제의하였다. 그러나 백광훈은 전라도 진안(鎭安)의 죽도는 길이 멀어서 불편하다고 사절하여 후일 <정여립의 옥사>에 연루되지 않았다. 1582년(선조15) 아버지가 서울 집에서 돌아가서 고향으로 반장(返葬)하였는데, 장례 절차를 송강(松江)정철(鄭澈)에게 물어서 시행하여 조그마한 흠절(欠節)도 없었다. 그때 분상(奔喪)의 의례는 머리를 묶어 사각건(四角巾)을 썼다고 한다. 1590년(선조23) 진사시(進士試)에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27세였다. 그 뒤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지는 못하고, 조정의 고관(高官)과 전국의 명사(名士)들과 교유하면서 시(詩)와 서(書)로써 이름을 날렸다.

1597년(선조30)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왜인의 침략을 피하여 통제사(統制使)충무공(忠武公)이순신(李舜臣)의 진영(陣營)에 머물면서 글로써 도왔는데, 이순신이 그를 매우 아끼고 사랑하였다. 그때 통제사의 진영에는 중국 수군(水軍)을 이끌고 온 명(明)나라 장수들이 많았는데, 그 중에서 명나라 장수 계금(季金)은 백진남의 이름을 듣고 이순신에게 요청하여 만나보고 마치 평소에 교분이 있었던 것처럼 특별한 예(禮)로써 대우하였다. 그리고 유격장(遊擊將)피승덕(皮承德)은 백진남의 시와 글씨를 보고 크게 칭찬하였으며, 중국으로 돌아갈 때 그의 필적(筆跡)을 받아서 가지고 갔다. 1606년(선조39) 명나라 조사(詔使)주지번(朱之蕃)이 조선에 왔을 때, 접반사(接伴使)유근(柳根)의 천거로 백진남은 해남(海南)에 있다가 급히 차출되어 백의종사(白衣從事)하였다. 주지번은 당시 중국에서 문장과 필법으로 유명하였는데, 백진남의 묵적(墨蹟)을 보고 절찬하면서 소중히 간직하였다. 그때 주지번도 답례로 백진남에게 큰 글자로 ‘옥봉서실(玉峯書室) 옥동연하(玉洞煙霞)’를, 작은 글자로 「무이구곡시(武夷九曲詩)」를 써 주었다. 그 공으로 1606년 백진남은 의흥위(義興衛)대호군(大護軍)에 임명되었고, 조정에 들어가서 처음으로 선조를 알현하고 하례하였다. 1618년(광해군10) 12월 5일 병으로 고향집에서 죽으니, 나이가 55세였다.

『송호시고(松湖詩稿)』 1권이 유고(遺稿)로 남아 있다.

성품과 일화

도량이 크고 기개가 활달하였으며, 재주가 뛰어나고 뜻이 장대하였다. 그의 시(詩)는 아름답고 글씨는 절묘하였는데, 아버지 백광훈을 계승한 사장(詞章)과 필법(筆法)은 행의(行誼)가 순수하고 독실하여 더욱 발전하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는 평소에 청음(淸陰)김상헌 · 죽음(竹陰)조희일과 서로 친하게 지내며 늙어서 이웃에 터를 잡아서 함께 살자고 굳게 약속하고, 그들의 집과 가까운 백악(白嶽) 아래에, 서울 집을 마련하여 그들과 어울렸다. 그러나 광해군 때 세상이 어지러워지자, 낙향하여 전라도 영암(靈岩)에 있는 옥봉(玉峯)의 옛 집을 수리하고 그 곳에서 여생을 보냈다. 만년에는 호남 지방의 명승지인 송산(松山)과 송호(松湖)에 별장을 지어놓고, 이곳저곳 왕래하면서 학문을 연마하고 시(詩)와 서(書)를 익혔다.

어머니를 섬기는 데에 매우 효성스러워, <정유재란> 때에 피란하던 중에도 입에 맞는 음식이나 몸에 편한 물건을 공급하지 않은 것이 없었고, 심지어 주연(酒宴)까지 베풀어 장수를 축원하였다. 또 조상을 섬기는 데에도 온갖 정성을 다하였는데, 계절에 따라 성묘(省墓)할 적에 폭우나 한파로 길이 막혔다고 하여 제사를 거르는 일이 없었다. 제전(祭田)에서 거둬들이는 곡식을 별도로 하나의 창고에 보관하여 두었다가, 때가 되면 제물을 준비하였는데, 제물은 조촐하고 깨끗하게 갖추도록 힘쓰는 것을 후세에 전하는 법규로 정하였다. 집을 다스리는 데에도 법도가 있어서 내외(內外)의 분별이 엄격하였고, 궁핍한 종족을 구휼하여 주었는데, 자기 힘이 닿는 데까지 돌보았다. 그러나 세상일에 대해서는 대체로 담박하였다.

광해군 때 백사(白沙)이항복(李恒福)과 현헌(玄軒)신흠(申欽)이 변방(邊方)에 유배당했는데, 그는 천리를 멀다 하지 않고 계속 찾아가서 문안을 하였다. 신흠이 답서(答書)에서, “옛날의 이른바 ‘붕우(朋友)의 도’를 이제야 비로소 보게 되었다.”고 하였다. 또 동계(桐溪)정온(鄭蘊)도 광해군에게 직언(直言)하다가 제주도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 당시는 잘못하면 무슨 화(禍)가 미칠는지 예측할 수 없는 때였는데도, 백진남은 술을 가지고 나와서 정온을 송별하였다.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유배지에서 풀려난 정온은 해남으로 백진남을 찾아 왔으나, 그는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으므로, 그의 무덤에 찾아가서 시를 지어 애도하였다. 한편 백진남은, 광해군 때 폐모론(廢母論)에 찬성하던 그의 사촌 누이 아들 선세휘(宣世徽)가 과거에 장원 급제하여 고향에 돌아와서 그를 찾아오자, 문을 닫아걸고 집안에 들이지 않았다고 한다.

묘소와 후손

묘소는 전라도 해남 장성산(長星山)의 묘원(墓原)에 있는데, 정철의 현손 장암(丈巖)정호(鄭皓)가 지은 묘갈명(墓碣銘)이 남아 있다. 부인 해남윤씨(海南尹氏)는 선전관(宣傳官)윤관중(尹寬中)의 딸이고, 미암(眉巖)유희춘(柳希春)의 외손녀이다. 자녀는 2남 1녀를 두었는데, 장남 백상빈(白尙賓)은 생원(生員)이고, 차남 백상현(白尙賢)은 진사(進士)이며, 딸은 별좌(別坐)이복길(李復吉)에게 시집갔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면암집(勉菴集)』
  • 『상촌집(象村集)』
  •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
  • 『청음집(淸陰集)』
  • 『혼정편록(混定編錄)』
  • 『미암집(眉巖集)』
  •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
  • 『악록집(岳麓集)』
  • 『구원집(九畹集)』
  • 『연경재전집(硏經齋全集)』
  • 『연천집(淵泉集)』
  • 『연재집(淵齋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