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형(朴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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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398년(태조 7) = ?]. 고려 충목왕(忠穆王)~조선태조(太祖) 때의 문신. 행직(行職)은 예문춘추관(藝文春秋館) 태학사(太學士)와 찬성사(贊成事) 등을 지냈다. 본관은 죽산(竹山)이고, 거주지는 개성이다. 아버지는 전리판서(典理判書)를 지낸 박덕룡(朴德龍)이며, 할아버지는 대제학(大提學)을 지낸 박원(朴遠)이고, 증조할아버지는 첨의정승(僉議政丞)을 지낸 박전지(朴全之)이다.

고려 충목왕~조선 태조 시대 활동

박형(朴形)은 고려 말 성균관시(成均館試)에 장원을 하였고, 1347년(고려 충목왕 3) 4월에는 문과(文科)에 급제하였다. 그 뒤 대간(臺諫)과 대언(代言)을 역임하였다.[『태조실록(太祖實錄)』태조 7월 1월 14일] 고려는 우왕(禑王)이 즉위 후 명(明)나라와 친교를 단절하고 원(元)나라와 친교를 재개하였다. 이때 정권을 잡고 있던 이인임(李仁任)은 박형을 비롯하여 이에 반대하는 김구용(金九容) · 이숭인(李崇仁) · 정몽주(鄭夢周) · 임효선(林孝先) · 염정수(廉廷秀) · 염흥방(廉興邦) · 정사도(鄭思道) · 이성림(李成林) · 윤호(尹虎) 등을 자기를 해치려 했다는 구실로 모두 유배시켰다.[『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권30 「신우」 1]

1380년(우왕 6) 5월 박형은 밀직사(密直使)로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었고, 1382년(우왕 8) 12월 우왕이 절급도감(折給都監)을 설치하자 판개성(判開城)으로 별좌(別坐)가 되어 토전(土田)을 분급(分給)하였다. 1388년(우왕 14) 그의 아들인 밀직제학(密直提學)박중용(朴仲容)은 최영(崔瑩) 등이 <조반(趙胖)의 옥사>를 기화로 이인임 · 임견미(任堅味) · 염흥방(廉興邦) 등을 축출할 때 임견미의 족속이라 하여 처형되었다.[『태조실록』태조 7월 1월 14일] 이 때 그는 각산수(角山戍)로 귀양을 갔다.[『고려사절요』 권33 「신우」 4]

조선 개국 후 예문춘추관 태학사가 되었고, 이어 찬성사가 되었다. 이후 70세가 되었으므로 치사(致仕)하여 벼슬에서 물러났다.[『태조실록』태조 7월 1월 14일] 1398년(태조 7) 1월 14일 세상을 떠났다.

시호 및 자녀

시호는 정강(靖康)이다.[『태조실록』태조 7월 1월 14일] 부인 오씨(吳氏)는 오원경(吳原敬)의 딸인데, 자녀는 1남을 두었다. 장남은 밀직제학박중용이다.

참고문헌

  •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 『태조실록(太祖實錄)』
  • 『동문선(東文選)』
  • 『목은집(牧隱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