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만(朴泰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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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642년(인조 20)~1689년(숙종 15) = 48세]. 조선 중기 인조(仁祖)~숙종(肅宗) 때의 문신. 사헌부(司憲府)지평(持平)홍문관(弘文館)수찬(修撰) 등을 지냈다. 자는 일경(一卿)이고, 호는 부남(部南)이다. 본관은 반남(潘南)이다. 아버지는 강화부경력(江華府經歷)박세교(朴世橋)이고, 어머니 덕여 이씨(德輿李氏)는 의빈부도사(儀賓府都事)이석기(李碩基)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금양군(錦陽君)박미(朴瀰)이며, 증조할아버지는 참찬(參贊)박동량(朴東亮)이다. 고려시대에 좌의정을 지낸 박은(朴訔)의 후손이기도 하다. 첫째 부인 함안 윤씨(咸安尹氏)는 윤수익(尹壽益)의 딸이고, 둘째 부인 부여 서씨(扶餘徐氏)는 판서(判書)정헌공(貞憲公)서필원(徐必遠)의 딸이다. 아들은 박필철(朴弼哲)이다.

숙종 시대 활동

1684년(숙종 10) 정시(庭試)문과(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 1685년(숙종 11) 5월 사헌부 지평이 되었고, 그 해 11월 도당록(都堂錄)에 올랐으며, 그 해 12월 홍문관 수찬이 되었다.[『숙종실록(肅宗實錄)』숙종 11년 5월 27일, 숙종 11년 11월 16일, 숙종 11년 12월 10일] 1686년(숙종 12) 2월 홍문관 부교리(副校理)가 되었다가, 그 해 7월 다시 홍문관 수찬이 되었다.[『숙종실록』숙종 12년 2월 11일, 숙종 12년 7월 9일] 그는 이 때 차자를 올려 학문에 힘쓰고, 정사에 부지런하고,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을 보살피고, 인재를 구하고, 언로를 넓히고, 군비를 확충하고, 재용을 절약하고, 기강을 진작시키고, 풍속을 바로잡을 도리를 논하였다. 그리고 진심으로 이를 이행할 것을 청하니, 숙종이 받아들였다.[『숙종실록』숙종 12년 7월 9일]

1686년(숙종 12) 8월 북평사(北平事)가 되었다.[『숙종실록』숙종 12년 8월 21일] 그리고 이듬해인 1687년(숙종 13) 7월 중순에 홍문관 부교리가 되었는데, 그 달에 암행어사가 되어 도정을 살피고 돌아왔다.[『숙종실록』숙종 13년 7월 11일, 숙종 13년 7월 18일] 이어 그 해 11월 홍문관 수찬이 되었다.[『숙종실록』숙종 13년 11월 9일] 1688년(숙종 14) 1월 홍문관 부수찬(副修撰)이 되었으며, 그 해 8월 또 다시 홍문관 수찬을 역임하였다.[『숙종실록』숙종 14년 1월 20일, 숙종 14년 8월 2일]

참고문헌

  • 『숙종실록(肅宗實錄)』
  • 『국조방목(國朝榜目)』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청선고(淸選考)』
  •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