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운(朴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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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493년(성종 24)~1562년(명종 17) = 70세)]. 조선 중기 중종·인종 · 명종 때의 학자. 자는 택지(澤之)이고, 호는 용암(龍巖)·운암(雲巖)이다. 본관은 밀양(密陽)인데, 아버지는 성균관(成均館)진사(進士)박종원(朴宗元)이고, 어머니 허씨(許氏)는 생원(生員)허양(許諒)의 딸이다.

중종~ 명종 시대의 은둔

1519(중종 14) 사마시(司馬試)에 진사(進士)로 합격하였다. 한양으로 박영(朴英)을 찾아가 학문하는 큰 방도를 배우기도 하였다. 그는 남보다 뛰어난 자질로 고인(古人)을 믿는 학문을 더해 자신을 돌아보고 실천할 것을 생각하여 세습(世習)에 유입(流入)하지 않았다. 선산부(善山府) 동쪽 해평현(海平縣)에 은거(隱居)하면서 학문에 종사하였는데, 특히 정자(程子)와 주자(朱子)의 학설을 깊게 공부하였다. 특히 「격몽편(擊蒙編)」과 「자양심학지론(紫陽心學旨論)」을 짓고 이황(李滉)에게 서신으로서 자문을 구하기도 하였다. 1562년(명종 17) 병환으로 세상을 떠났는데, 향년 70세였다.

저서로는 『경행록(景行錄)』, 『삼후전(三侯傳)』, 『위생방(衛生方)』, 『용암집(龍巖集)』이 있다.

성품과 일화

박운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뜻이 범상치 않았고, 자신을 견지할 적에는 안색이 씩씩하고 언어가 믿을 만 하였다. 고인(古人)의 아름다운 말씀과 착한 행실을 토론하는 등 날마다 부지런히 하여 닦고 살피는 공부가 오래 되도록 더욱더 독실하였다. 그가 어버이를 섬길 적에는 안색을 살피고 뜻을 순종하여 시종 어김이 없었으며 음식과 거처를 모두 적절하게 해 드렸다. 상복(喪服)을 입을 적에는 슬퍼하다가 야윌 정도로 상례를 다하였다. 제사를 지낼 적에는 재계(齋戒)를 신중히 하고 친히 재물을 장만하였으며, 자식이나 노비들도 목욕하고 옷을 갈아입도록 하는 등 정성과 공경을 다하였다. 향리에서는 궁한 사람을 도와주고 환난에 처한 사람을 구휼하면서 제때에 하지 못할 것처럼 여기었으며, 남이 상(喪)을 당하였다는 말을 들으면 각각 정분(情分)을 보아 차등 있게 애도를 표시하였다. 선(善)을 좋아하고 악(惡)을 미워하였으며 허물을 덮어주고 선행은 드러냈으며 일을 만나 처리할 때 도리에 맞도록 힘썼다.

비문과 제향

이황(李滉)이 묘갈명(墓碣銘)을 지었다. 선산(善山)의 월암 서원(月巖書院)과 낙봉 서원(洛峯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효행으로 선조 때 고향에 정문(旌門)이 세워졌다. 첫째 부인 김씨(金氏)는 김백(金栢)의 딸로 1녀를 두었는데, 이인수(李仁壽)의 처가 되었다. 둘째 부인 김씨(金氏)는 교수(敎授)김헌(金瓛)의 딸인데, 3남을 두었다. 1자는 박호(朴灝)이고, 2자는 박연(朴演)이고, 3자는 박잠(朴湛)이다.

참고문헌

  • 『정조실록(正祖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사마방목(司馬榜目)』(정덕14년기묘식 正德十四年己卯式)
  • 『용암집(龍巖集)』
  •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