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안제(朴安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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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90년(선조 23)~1663(현종 4) = 74세]. 조선 중기 광해군 ~ 현종 때에 활동한 문신. 행직(行職)은 병조 참의(參議)이고, 자는 계순(季順)이다. 본관은 밀양(密陽)인데, 서울 출신이다. 아버지는 형조 판서박정현(朴鼎賢)이며, 어머니 청풍김씨(淸風金氏)는 증영의정(贈領議政)김급(金汲)의 딸이다. 좌참찬(左參贊)박호원(朴好元)의 손자이고, 분승지(分承旨)박안효(朴安孝)의 동생이다.

광해군 · 인조 시대의 활동

1612년(광해군 4) 사마시(司馬試)에 진사(進仕)로 합격하여, 화려한 명성이 드러나서 후진(後進)들의 으뜸이 되었다. 그때 광해군(光海君)의 혼란한 시대를 만나서, 이이첨(李爾瞻)이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위해야 한다는 의논을 제기하자, 태학(太學)에 재학하던 그는, 유생들을 이끌고 항의의 상소를 올리니, 사람들이 위태롭게 여겼다. 1621년(광해군 13) 정시(庭試)문과(文科)에 장원 급제하여 관례에 따라 성균관 전적(典籍)에 임명되었으나, 그 뒤 3년간 다른 직책으로 옮기지 못하였는데, 이것은 이이첨이 고의적으로 막았기 때문이다. 1623년(인조 1) 어버이를 봉양하기 위해 외직을 자청하여 해미현감(海美縣監)으로 나갔다. 1626년(인조 4) 10월 사헌부 지평(持平)이 되었다가, 1627년(인조 5) 1월 다시 사헌부 지평이 되었다. 1628년(인조 6) 영광군수(靈光郡守)가 되어, 옛날 영광군수를 지낸 아버지 박정현의 공적을 계승하니, 전후 아버지와 아들의 송덕비가 두 개 나란히 세워졌다. 1631년(인조 9) 8월 사헌부 장령(掌令)이 되었다. 이때 인조의 사친(私親)을 추숭(追崇)하는 일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하였다가, 이조 판서이귀(李貴)에 의하여 그해 윤11월 충청도목천현감(木川縣監)으로 좌천되었다. 1635년(인조 13) 연달아 부모의 상(喪)을 당하여 4년 동안 여묘살이를 하다가 병을 얻었다. 상복을 벗자마자, 1639년(인조 17) 9월 다시 사헌부 장령이 되었다. 1640년(인조 18) 1월 홍문관 수찬(修撰)에 임명되었으나, 마침 서울 근교 농장에 있으면서 병이 심하여 왕명을 받들지 못하였다. 그를 좋아하지 않은 사람들이 모함하여 위험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으나, 인조의 보호에 힘입어, 호남 지방으로 귀양을 갔다가 4개월만에 석방되었다. 1646년(인조 24) 2월 또다시 사헌부 장령이 되었는데, 얼마 안 되어 외직을 요청하여 공산현감(公山縣監)으로 나갔다.

효종 · 현종 시대의 활동

1650년(효종 1) 홍문관 수찬(修撰)이 되었다가, 종3품으로 승품(陞品)되어 종성부사(鍾城府使)로 나갔다. 이때 그가 상소를 올려서, 다섯 가지 시폐(時弊)를 개진하니, 효종이 가납(嘉納)하였는데, 그 중에 시행되거나 개혁된 일이 많았다. 1652년(효종 3) 11월 승정원 동부승지(同副承旨)에 발탁되었다가, 충주목사(忠州牧使)로 나갔다. 1657년(효종 8) 11월 다시 승정원 승지(承旨)가 되었다.

1659년(현종 즉위) 형조 참의가 되고, 이듬해 1660년(현종 1) 11월 병조 참의가 되었다. 1663년(현종 4) 1월 다시 병조 참의가 되었는데, 그해 9월 작은 병으로 자리에 누웠으나 일어나지 못하고 돌아가니, 향년이 74세였다.

성품과 일화

박안제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모습이 수려하고 묵중하였다. 어렸을 때 아이들과 장난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고, 나이 겨우 14, 5세가 되자, 이미 노숙한 성인(成人)처럼 품위 있게 행동한다는 명성이 났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재상감으로 기대하였다.

그는 효도와 우애를 천성으로 타고나서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들에게 우애로웠다. 항상 그는 서재(書齋)에서 조용히 경서(經書)와 사서(史書)를 읽으면서 스스로 여가를 즐기었다. 평소 휴식할 때에도 조금도 나태하지 않았고 갑작스런 일을 당해도 황급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평소 화려한 것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집안 사람들도 생활이 검소하였다. 지위가 당상관(堂上官)에 이르고 여러 번 고을 수령을 맡았으나,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집안에 한 섬의 곡식도 저축한 것이 없었다.

1646년(인조 24)2월 <강빈(姜嬪) 옥사(獄事)>가 일어났을 때, 당시 장령이었던 박안제는 시아버지인 인조에게 며느리 강빈(姜嬪)을 사사(賜死)하라는 분부를 거두도록 간청하였으나 인조는 따르지 않고, 맏며느리이며 소현세자(昭顯世子)의 부인인 강빈을 처형하였다. 그 다음달 3월 인조는 종묘에 제관을 보내, 강빈을 세자빈(世子嬪)에서 폐출하고 사사(賜死)한 연유를 선조(先祖)의 영령(英靈)들에게 고하였다. 그 제문을 장령박안제가 지었는데, 종묘에 올린 글에 “국가가 불행하여 변고가 대궐 안에서 발생했습니다. 강빈은 위호(位號)를 외람되이 칭하였고 비단 적의(翟衣)를 미리 만들었으며, ‘흉한 물건을 파묻어 악한 짓을 하였고 독을 넣어서’, 역심(逆心)을 드러내 윤리강상을 어지럽혔으니, 무슨 짓인들 차마 못하겠습니까? 죄가 종사(宗社)에 관련되는데, 사사로운 은혜를 어찌 돌아볼 수 있겠습니까? 이에 의리에 따라 처형하고 그 연유를 감히 신령에게 고합니다.”라고 하였다. 인조가 비망기(備忘記)에서 “흉한 물건을 파묻고 독을 넣었다는 것은 추측이다.”라고 하교하였는데, 박안제가 제문(祭文)을 지으면서 이것을 사실로 단정하여 죄안으로 삼았기 때문에, 모두 그를 비난하였다.『인조실록(仁祖實錄)』 권47 참조)

묘소와 비문

묘소는 충청도 예산현(禮山縣) 돈절리(敦節里)에 있는데, 부인과 같이 묻히었다. 강백년(姜栢年)이 묘갈명(墓碣銘)을 지었다.

부인 동래정씨(東萊鄭氏)는 중추부 첨지사(僉知事)정회원(鄭烣遠)의 딸인데, 자녀는 2남 4녀를 두었다. 2남 박승후(朴承後)는 장례원(掌隷院) 사평(司評)을 지냈고, 장녀는 판서이은상(李殷相)의 처가 되었고, 4녀는 목사(牧使)이관(李慣)의 처가 되었다. 맏사위 이은상은 월사(月沙)이정귀(李廷龜)의 손자인데, 도승지·형조판서를 지냈다. 장녀는 이은상과 혼인하여 1남 1녀를 낳았는데, 그 딸이 서포(西浦)김만중(金萬重)에게 시집갔다.

참고문헌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인조실록(仁祖實錄)』
  • 『효종실록(孝宗實錄)』
  • 『현종실록(顯宗實錄)』
  • 『현종개수실록(顯宗改修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사마방목(司馬榜目)』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광해조일기(光海朝日記)』
  • 『묵재일기(黙齋日記)』
  • 『응천일록(凝川日錄)』
  • 『포저집(浦渚集)』
  • 『설봉유고(雪峯遺稿)』
  • 『충재집(冲齋集)』
  • 『지봉집(芝峯集)』
  • 『월사집(月沙集)』
  • 『월당집(月塘集)』
  • 『지천집(遲川集)』
  • 『설봉유고(雪峯遺稿)』
  • 『도곡집(陶谷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