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안신(朴安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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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369년(공민왕18)~1447년(세종29) = 79세]. 조선 초기 태종(太宗)~세종(世宗) 때에 활동한 문신. 자는 백충(伯忠)이고, 호는 상락(上洛)· 청암(淸庵)이다. 초명은 박안신(朴安信)인데, 관직에 오른 다음에 박안신(朴安臣)이라 고쳤다. 본관은 상주(尙州)이고, 참판(參判)박이창(朴以昌), 병마사(兵馬使)박이령(朴以寧)의 아버지이다.

태종 시대 활동

1393년(태조2) 사마시(司馬試)에 수석으로 합격하고, 1399년(정종1) 식년(式年) 문과에 급제하였다. 1408년(태종8) 사간원(司諫院) 좌정언(左正言)에 임명되었다가, 사헌부(司憲府)지평(持平)으로 옮겼을 때 목인해(睦仁海) 옥사(獄事)가 일어났다. 목인해는 태종(太宗)이방원(李芳遠)의 심복으로 무재(武才)가 있어서 왕자의 난 때 이숙번(李叔蕃)과 함께 큰 공을 세웠는데, 태종이 왕위에 오르자 횡포를 부려 말썽을 일으켰다. 사헌부대사헌(大司憲)맹사성(孟思誠)과 지평박안신 등이 목인해를 국문(鞠問)하던 중에 목인해가 태종의 사위 평양군(平壤君)조대림(趙大臨)을 끌여 들었으므로, 태종에게 여쭙지 아니하고 조대림을 불러서 고문하였다. 목인해의 후처가 조대림 집안의 여종 출신이었므로 평소 두 집안의 왕래가 잦았기 때문이다. 태종이 크게 노하여 맹사성과 박안신을 순금사(巡禁司)에 가두고 극형에 처하려고 하였는데, 그가 감옥에서 풍자시를 지어, “태평 시절을 가져온 임금이 대간의 신하를 죽였다는 나쁜 평가를 들을까봐 두렵다.[恐君得殺諫臣名]”고 태종을 깨우치고, 또 황희(黃喜)· 하륜(河崙) 등이 태종에게 그들을 용서하도록 간청하여, 마침내 죽음을 면하고 영덕현(盈德縣)으로 귀양 갔다. 1409년(태종9) 일본(日本)에 사신으로 다녀오다가 해적을 만났으나, 박안신이 호상(胡床)에 걸터앉아 태연스럽게 해적의 요구를 들어주어 일행이 무사할 수 있었다. 1416년(태종16) 병조(兵曹)정랑(正郞)이 되었으나 태종의 사위 남휘(南暉)의 길례(吉禮)에 파촉인(把燭人)을 늦게 보냈다고 파직(罷職)되었다. 1418년(태종18) 사헌부장령(掌令)에 임명되었다.

세종 시대 활동

1421년(세종3) 사헌부집의(執義)로 임명되었다가, 선공감(繕工監)판사(判事)로 옮겼다. 1424년(세종6) 일본 막부(幕府)에서 사신을 보내 ‘고려대장경판(高麗大藏經板)’을 달라고 떼를 썼다. 당시 배불(排佛) 정책을 쓰던 조선(朝鮮)에서는 대장경판이 필요가 없을 것이니, 불교를 믿는 일본에 보내달라는 것이다. 물론 우리나라에서는 이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때 세종(世宗)은 박안신을 회례사(回禮使)로 임명하여, 예물과 불경(佛經) 몇 권을 가지고 가서 그들을 달래도록 하였다. 그가 일본에 이르니, 일본 어소(御所)에서 사신 일행의 입국을 거절하고, 오직 불경만을 받아들였다. 그가 치서(馳書)하여 교린(交隣)의 뜻으로 간곡히 타이르자, 입국을 허락하였다. 일본에서 돌아와서, 1425년(세종7) 우사간(右司諫)이 되고, 다음해 우사간대부(右司諫大夫)· 좌사간대부(左司諫大夫)가 되었으며, 1427년(세종9)부터 공조참의· 예조참의· 병조참의· 이조참의와 병조참판· 예조참판· 형조참판· 공조참판· 이조참판과 황해도관찰사(黃海道觀察使)· 충청도관찰사(忠淸道觀察使)· 전라도관찰사(全羅道觀察使)· 평안도관찰사(平安道觀察使)를 두루 지냈다. 1439년(세종21) 형조판서에 임명되었고, 다음해 나이 70이 되어 관례대로 치사(致仕)하기를 청하였으나, 세종이 허락하지 않고 궤장(几杖)을 하사하였다. 그해 의정부(議政府)우참찬(右參贊)에 임명되었다가, 사헌부대사헌과 공조판서· 이조판서를 역임하였다. 1445년(세종27) 이조판서박안신이 늙고 병들었다고 전문(箋文)을 올려 벼슬에서 물러나기를 청했으나, 세종이 윤허하지 않고, 예문관(藝文館)대제학(大提學)으로 삼았다. 1447년(세종29) 11월 10일 노병으로 졸하니, 향년 79세였다.

성품과 일화

『필원잡기(筆苑雜記)』에서는 박안신이 기국이 크고 도량이 넓은 인물이었다고 하며 다음과 같은 일화를 전한다. 일찍이 좌의정맹사성과 대간(臺諫)에서 같이 일을 의논하다가 태종의 뜻을 거슬려서 사형을 당하게 되었는데, 맹사성은 낯빛이 흙빛이 되고 경황없이 어쩔 줄을 몰라 하였으나, 오히려 젊은 박안신은 낯빛이 태연자약하였다. 시(詩) 한 수를 지었는데, 그 끝 구절에 “우리 임금이 간관(諫官)을 죽인 이름을 얻을까봐 두렵다[恐君留殺諫臣名]” 하였다. 종이와 붓이 없어서 이 시를 사금파리로 땅에 그어서 글자를 쓴 다음에, 옥리(獄吏)에게 눈을 부릅뜨며 말하기를, “마땅히 이 시를 상감에게 아뢰어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죽어서 여귀(癘鬼)가 되어 너희들을 씨가 없게 만들 것이다.” 하였다. 옥리가 무서워서 이를 전하니 태종이 듣고 노여움을 풀고 그들을 석방하였다. 이처럼 성품이 강하고 과감하며 담론(談論)을 잘하였으나, 집을 다스리는 것은 검소하였다고 한다.

아들은 박이창· 박이령 형제가 있었는데, 모두 말로(末路)가 좋지 않았다. 맏아들 박이창은 해학이 있고 청렴결백하였는데, 문종(文宗) 때 성절사(聖節使)로 사신을 가면서 노자로서 양곡(糧穀) 40말을 더 가지고 갔다가 말썽이 생기자, 돌아오는 길에 의주(義州)에서 자결하였다. 둘째 아들 박이령은 계유정난(癸酉靖難) 때 김종서(金宗瑞) 일당으로 몰려서 이징옥(李澄玉)과 함께 파직되어 무안(務安)으로 유배되었다가, 연일(延日)로 이배(移配)되어 교살(絞殺)당하였다.

묘소와 시호

시호는 정숙(貞肅)이라 하였다. 묘소는 경상도 상주 개운리(開雲里) 대방동(大芳洞)의 선영에 있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태조실록(太祖實錄)』
  • 『태종실록(太宗實錄)』
  • 『세종실록(世宗實錄)』
  • 『상주박씨세보(尙州朴氏世譜)』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 『용재총화(慵齋叢話)』
  • 『해동야언(海東野言)』
  • 『해동잡록(海東雜錄)』
  • 『임하필기(林下筆記)』
  • 『필원잡기(筆苑雜記)』
  • 『역대요람((歷代要覽)』
  • 『택당집(澤堂集)』
  •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