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안성(朴安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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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438년(세종 20)~1512년(중종 7) = 75세]. 조선 전기 세종~중종 때 활동한 문신. 의정부(議政府) 좌찬성(左贊成)을 지냈다. 본관은 죽산(竹山)이고 주거지는 서울이다. 조부는 병조 참의(兵曹參議)를 지낸 박고(朴翶)이고, 조모 이씨(李氏)는 이한(李澣)의 딸이다. 아버지는 연성부원군(延城府院君)영의정(領議政)박원형(朴元亨)이며, 어머니 단양 우씨(丹陽禹氏)는 군기직장(軍器直長)우승경(禹承瓊)의 딸이다.

세조~성종 시대 활동

1459년(세조 5) 문과(文科)에 합격하였다. 1460년(세조 6) 주부(主簿)가 되었고, 1464년(세조 10) 호조 정랑(正郞)으로 있을 때인 그 해 7월에 세조에게 적전(籍田) 시행을 건의하였다. 같은 해 12월에 사헌부(司憲府)장령(掌令)이 되었고, 1465년(세조 11)에 승문원(承文院) 부지사(副知事)가 되었다.

1469년(예종 1) 1월 22일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1473년(성종 4)에 부정(副正)이 되었고, 1474년(성종 5)에 예빈시(禮賓寺) 정(正)이 되었는데, 그 해 8월에 재상 경차관(災傷敬差官)으로 충청우도(忠淸右道)와 전라도(全羅道)에 내려가 구휼을 하였다. 1475년(성종 6) 9월에 봉상시(奉常寺)정(正)이 되었는데, 그 해 11월 경상도 관찰사윤호(尹壕)가 치계하기를, “대마주 대관(對馬州代官) 구난도로(仇難都老)가 삼포(三浦)에 도착하여 왜인(倭人)을 쇄환(刷還)하고, 죄를 범한 왜인 대시로(大時老) · 피고사야문(皮古沙也文)을 목 베었습니다.” 하였다. 왕이 기쁜 일이라고 하며 그들을 위로하기 위하여 박안성을 선위사(宣慰使)로 임명하니, 가서 그들을 위로하고 왔다. 1478년(성종 9) 10월에 통정대부(通政大夫) 형조 참의가 되었고, 1479년(성종 10)에 사간원(司諫院)대사간(大司諫)이 되었으며, 1480년(성종 11) 1월에 충청도 관찰사가 되었다. 1481년(성종 12) 1월에 다시 통정대부 형조 참의가 되었고, 그 해 5월에 병조 참지(參知)가 되었으며, 그 해 11월에는 통정대부 이조 참의가 되었다. 1484년(성종 15) 6월에 가선대부(嘉善大夫)황해도 관찰사가 되었고, 1485년(성종 16) 5월에 가선대부 중추부(中樞府)동지사(同知事)가 되었다. 1486년(성종 17) 4월에 천추사(千秋使)로 명(明)나라 서울 북경(北京)에 갔다가 그 해 8월에 돌아왔다. 그 해 특진관(特進官)이 되었다가 다음해 1487년(성종 18) 8월에 호조 참판이 되었고 12월에 사헌부(司憲府)대사헌(大司憲)이 되었다. 1488년(성종 19) 2월에 다시 가선대부 중추부 동지사가 되었고, 1489년(성종 20) 7월에 가선대부 공조 참판이 되었다. 1490년(성종 21) 6월에 전라도 관찰사가 되었고, 1491년(성종 22) 5월에 가선대부 중추부 첨지사(僉知事)가 되었다. 1492년(성종 23)에는 중추부 동지사로 천추사가 되어 명나라 서울 북경에 다녀왔다. 1493년(성종 24)에는 전라도 양전 순찰사(全羅道量田巡察使)가 되었고, 1494년(성종 25) 5월에 가선대부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이 되었으며, 그 해 6월에 가선대부 병조 참판이 되었다. 그리고 그 해 12월 성종이 승하하자 수릉관(守陵官)이 되었다.

연산군 · 중종 시대 활동

1495년(연산군 1) 선릉 수릉관(宣陵守陵官)이 되었고, 1496년(연산군 2) 12월에 예조 판서가 되었으며, 1498년(연산군 4) 8월에 평안도 관찰사가 되었다. 1500년(연산군 6) 7월에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이 되었고, 그 해 9월에 공조 판서가 되었다. 1501년(연산군 7) 6월에 형조 판서가 되었고, 1502년(연산군 8) 11월에 세자좌빈객(世子左賓客)을 겸하였다.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甲子士禍)>에 연루되어 그 해 4월에 장형(杖刑)을 속 받고 진잠(鎭岑)에 유배되었다가 1506년(연산군 12) <중종반정(中宗反正)>이 일어나자 연산군 폐위로 방면되었다.

1506년(중종 1) 10월에 숭정대부(崇政大夫) 의정부 좌찬성이 되었다. 그는 그 해 12월에 나이가 70세가 되었다하여 궤장(几杖)을 하사받았다. 1507년(중종 2) 3월에 다시 의정부 좌찬성이 되었다. 1508년(중종 3) 7월에 중추부 영사가 되었고, 그 해 8월에 경연(經筵) 영사(領事)를 겸하였다. 1512년(중종 7) 8월 6일 세상을 떠났다.

성품과 일화

그는 성격이 너그럽고 온화하여 여러 사람을 용납함이 장자(長者)의 풍토가 있고, 엄격하고 과감하게 백성에게 임(臨)하는 것이 대신의 체모를 갖추었다고 한다.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사신(史臣)이 논하기를, “그는 박원형의 아들인데, 성격이 너그럽고 온화하여 억지로 꾸미기를 일삼지 아니하였다. 일찍이 성종대왕의 능을 지키는 관원이 되었는데, 갑자년(연산군 10) 봄에 연산군이 대신들을 불러, 죄 입은 후궁(後宮)들의 아들에게 상제(喪制)대로 거상(居喪)하지 못하게 할 것을 의논하게 하니, 그 때 모두 화를 두려워하여 아무도 감이 이의(異議)하지 못하였는데, 그가 홀로 힐난하니, 연산군이 노하여 외방으로 귀양 보냈었다” 라고 하였다.[『중종실록(中宗實錄)』중종 7년 8월 6일 「박안성 졸기」]

시호

시호는 정안(靖安)이다. 부인은 한양 조씨(漢陽趙氏)조계발(趙季發)의 딸인데, 자녀는 2남을 낳았다. 1남은 박수륜(朴守綸)이고, 2남은 문과에 급제하여 병조 참지를 지낸 박수문(朴守紋)이다.

참고문헌

  • 『세조실록(世祖實錄)』
  • 『예종실록(睿宗實錄)』
  • 『성종실록(成宗實錄)』
  •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 『중종실록(中宗實錄)』
  • 『국조방목(國朝榜目)』
  • 『한국인(韓國人)의 족보(族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