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수서(朴守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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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67년(명종 22)~1627년(인조 5) = 61세]. 조선 중기 선조~인조 때 활동한 문신 · 학자. 우승지(右丞旨)를 지냈다. 자는 경승(景承)이고, 호는 우계(尤溪)이다. 본관은 함양(咸陽)이고, 거주지는 경상도 예천(醴泉)과 풍기(豊基)이다. 아버지는 군자감(軍資監)주부(主簿)박지(朴芝)이며, 어머니 밀양 박씨(密陽朴氏)는 호군(護軍)박언상(朴彦商)의 딸이다.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의병 활동

어려서는 숙부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588년(선조 21)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다.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망우당(忘憂堂)곽재우(郭再祐)와 함께 의병을 일으켜 화왕산성(火旺山城)을 지키며 항전하였다. 1607년(선조 40) 건원릉(健元陵)참봉(參奉)이 되고, 1608년(선조 41)에 창릉(昌陵)참봉(參奉)이 되었다.

광해군 시대 활동

1609년(광해군 1)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설서(說書)에 제수되었다. 1611년(광해군 3)에 북평사(北評事)가 되었다. 1613년(광해군 5)에 성균관(成均館)전적(典籍)이 되었다. 그는 그 해 4월에 정조(鄭造) · 윤인(尹訒) 등이 선조의 계비(繼妃)인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하려 하자, 성균관 전적으로서 그 부당함을 극렬하게 상소하고 귀향하였다. 그 뒤 1615년(광해군 7)에 예조 정랑(正郞)이 되었다. 이 때 『선조실록(宣祖實錄)』 편찬에 참여하였다. 1617년(광해군 9)에 성균관 사예(司藝)가 되었고, 1618년(광해군 10) 7월에 상의원(尙衣院)정(正)이 되었다. 그 해 8월 북도 순안어사(北道巡按御使)가 되었고, 같은 해 12월 통례원(通禮院) 우통례(右通禮)가 되었다. 1620년(광해군 12) 동부승지(同副承旨)가 되었다가 그 해 우승지가 되었다. 1621년(광해군 13) 분병조 참의(分兵曹參議)가 되었다. 이때 분승지조우인(曺友仁)과 함께 경운궁(慶運宮)에서 직숙(直宿)할 때에 조우인이 인목대비 유폐에 대한 비판의 시(詩)를 지어 책자에 적었고, 박수서는 조우인의 시를 소매에 넣어 갔다. 이때 백대형(白大珩)이 분승지로서 조우인과 직숙을 교대하고 박수서를 만나러 갔다가 조우인이 지은 그 비판의 시를 보고 기뻐하였다. 백대형은 나오자마자 고변할 꾀를 내어 관유(館儒) 우필전(禹弼甸)에게 상소하여 말하게 하고, 글을 올려 이를 증명하니, 대각의 논핵이 계속해서 일어났다. 광해군은 박수서가 역적을 편들고 임금을 배반하였다는 죄로 국문하였는데, 혹독하게 고문을 당하고 금부에 하옥되었다가 <인조반정(仁祖反正)> 때로 이르러서야 풀려났다.

인조 시대 활동

1623년(인조 1) 용양위(龍驤衛) 부호군(副護軍)이 되었으며, 그 뒤 곧 울산부사(蔚山府使)가 되었다. 1627년(인조 5) 우승지가 되었는데, <정묘호란(丁卯胡亂)>이 일어나자 대가(大駕)를 호위하여 강도(江都)에 들어갔다가 난이 평정된 뒤 돌아 왔다. 같은 해 세상을 떠나니 나이 61세이다. 저서로는 『우계일고(尤溪逸稿)』가 있다.

제향

영남사림의 발의로 경상도 순흥의 도고서원(陶皐書院)에 봉안되었다.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인조실록(仁祖實錄)』
  • 『국조방목(國朝榜目)』
  • 『한국인(韓國人)의 족보(族譜)』「만력 16년 무자 2월 24일 사마방목(萬曆十六年戊子二月二十四日司馬榜目)」(하버드옌칭도서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