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세장(朴世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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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629년(인조 7)~1687년(숙종 13) = 59세]. 조선 중기 숙종 때에 활동한 문신. 행직(行職)은 사헌부(司憲府)장령(掌令)이다. 자는 여택(汝擇)이다. 본관은 반남(潘南)인데, 증조부는 사헌부 대사헌(大司憲)박응복(朴應福)이고, 조부는 길주목사(吉州牧使)박동망(朴東望)이며, 아버지는 박유(朴瀏)이다. 어머니 안동권씨(安東權氏)는 현감(縣監)권흡(權恰)의 딸이다.

효종 · 현종 · 숙종 시대 활동

1657년(효종 8)에 사마시(司馬試)의 진사(進士)로 합격하였다. 1679년(숙종 5) 그의 나이 51세에 정시(庭試)문과(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 성균관(成均館)전적(典籍)에 제수된 후, 예조 좌랑(佐郞)을 거쳐 경상도도사(慶尙道都事)에 임명되었다. 병조 좌랑과 병조 정랑(正郞)을 지냈으며 함경남도에서 시험을 관장(管掌)하고 순창 군수(淳昌郡守)에 임명되었다. 1685년(숙종 11) 조정으로 들어와 사헌부 지평(持平)이 되었고, 그 뒤 성균관 사예(司藝)를 거쳐 사헌부 장령이 되었다. 그 후, 봉상시(奉常寺)부정(副正)을 거쳐, 1686년(숙종 12)에 다시 사헌부 장령이 되었고, 종부시(宗簿寺)정(正)을 거쳐 영월군수(寧越郡守)가 되어 근무하다가 1687년(숙종 13) 59세를 일기로 관아에서 세상을 떠났다.

성품과 일화

박세장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천성이 자량(慈良)하고 염직(廉直)하며 조금도 화려하고 뽐내거나 사납고 교만한 기색이 없으며, 남을 대하는 것이 담박하였다. 동기간에 우애도 대단하였는데, 그의 막내아우 학생(學生) 박세헌(朴世櫶)이 일찍 세상을 떠나자, 그 남겨진 고아를 어루만져 사랑하는 것이 친자식과 다르지 않았다. 조카를 보살피기 위하여 옆에 붙여서 집을 지었고, 가난하여 재물이 다 떨어지더라도 그들의 어려움을 돌보지 않은 적이 없었다. 큰 누이가 시골에서 가난하게 살았는데 매우 지극하게 받들었으며 얻은 것이 있으면 반드시 끊임없이 보냈다. 사헌부에 있을 때에는 남의 흠을 들추는 것이나 시세에 따라 처신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고을수령이 되어 백성을 다스릴 때에는 의관을 반드시 정제하고 종일 바로 앉아서 조금도 게을리 한 적이 없었다. 그는 송사(訟事)를 하는 사람이 있으면 반드시 자세하게 일러주었고, 여기에서 발생하는 번거로움이나 복잡함을 싫어하지 않았으므로, 진위(眞僞)가 명백히 밝혀지면 송사가 절로 간결하게 해결되었다. 이와 같이 어진 정사를 베풀었으므로 고을의 뭇 사람들이 다 기뻐하고 따랐다.

묘소와 비문

그의 묘소는 처음에 경기도 철원부(鐵原府) 골파리(骨坡里)에 있었으나 뒤에 철원부 삭녕군(朔寧郡) 치소(治所) 동쪽 구기촌(舊基村)으로 옮겼다. 박태순(朴泰淳)묘지명(墓誌銘)을 지었다. 부인은 경주김씨(慶州金氏)현감(縣監)김진현(金震縣)의 딸인데, 1남 5녀의 자녀를 두었다. 아들은 박태하(朴泰夏)이다. 1녀는 진사 이언위(李彦緯)의 처가 되었고, 2녀는 동평군(東平君)이항(李杭)의 처가 되었으며, 3녀는 이세발(李世發)의 처가 되었고, 4녀는 참봉(參奉)이만직(李萬稷)의 처가 되었으며, 5녀는 약혼 후 결혼 전에 죽었다.

참고문헌

  • 『숙종실록(肅宗實錄)』
  • 『국조방목(國朝榜目)』
  • 『사마방목(司馬榜目)』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